제4 인도품(人道品) 36장
대종경(大宗經)
제4 인도품(人道品) 36장
대종사 무슨 일로 김 남천을 꾸짖으시고, 문 정규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남천을 꾸짖는 것이 남천에게만 한한 것이 아닌데 정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어떤 사람을 꾸짖든지 정규는 먼저 정규의 행실을 살펴 보아서 그러한 일이 있으면 고칠 것이요 없으면 명심하였다가 후일에도 범하지 않기로 할 것이며, 결코 책망당하는 그 사람을 흉보거나 비웃지 말라. 어리석은 사람은 남의 허물만 밝히므로 제 앞이 늘 어둡고,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의 허물을 살피므로 남의 시비를 볼 여가가 없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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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천[金南天]
본명은 성규(星奎). 법호는 각산(角山). 1869년 전주에서 태어났으며, 집짓는 일(특히 목수일)에 능했고, 태을교(증산교의 일파) 도꾼이었다. 1919년(원기4) 10월 13일(음력 8월 20일) 친구 송찬오(송적벽의 본명)와 함께 같은 날에 소태산대종사를 뵙고 제자가 되었다. 소태산이 변산 월명암을 의탁하여 지내는 것을 보고 송구히 여겨 홀로 된 딸 김혜월(金慧月), 외손녀 이청풍(李淸風)과 함께 실상초당에서 소태산을 시봉했다. 한편 둘째딸 김순풍(金順風)과 사위 박원석(朴元石)은 익산 총부기지 확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종질녀인 이청춘(李靑春)은 총부에 사재 70두락을 희사하여 총부유지 대책의 활로를 여는 등 일가가 모두 불법연구회 창립에 큰 역할을 담당하도록 했다.(원불교대사전)
문정규[文正奎]
법호는 동산(冬山). 소태산대종사 봉래주석기의 전문 시봉인. 《대종경》 수행품 33장, 인도품 36장, 성리품 14ㆍ22장, 신성품 18장, 전망품 7ㆍ29장 등 7곳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1863년 6월 5일에 전남 곡성군 곡성면 장선리에서 부친 화준(華俊)과 모친 하(河)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다가 52세시 전주로 이사하여 한의업을 경영했다. 1920년(원기5) 친구인 송적벽의 인도로 전북 부안 변산을 찾아 소태산의 제자가 되었다. 후일 소태산은 법설하는 자리에서 “문정규는 늙은 몸으로 그 산중 험로에 들어와서 거처와 음식이 기구하건마는 나 하나 만나보려는 자미로 모든 고생됨을 잊어버리고 오직 즐거워만 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원기19) 《회보》 제9호에 ‘어떠한 고라도 낙 삼을 줄 아는 자는 행복자니라’는 법문이 있으며, 1924년(원기9) 불법연구회 창립총회 때는 전주지방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했다. 이후 익산총부 건설에 적극 동참, 송적벽ㆍ김광선 등과 더불어 엿 제조업을 발의했고, 소태산이 법설 때면 박사시화ㆍ김남천 등과 더불어 백발을 휘날리며 춤을 추어 법흥을 돋구었다. 만년에는 ‘노청년(老靑年)’이란 별명을 들으며 낙도 수양하다가 1936년 4월 13일에 열반했다.(원불교대사전)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