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경(大宗經)/ 제4 인도품(人道品)

제4 인도품(人道品) 35장

원재(Aid Perfection) 2014. 10. 11. 20:13

대종경(大宗經)

4 인도품(人道品) 35

하루는 여러 제자들이 신문을 보다가 시사(時事)에 대하여 가부 평론함이 분분하거늘, 대종사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이 어찌 남의 일에 대하여 함부로 말을 하는가. 참된 소견을 가진 사람은 남의 시비를 가벼이 말하지 아니하나니라. 신문을 본다 하여도 그 가운데에서 선악의 원인과 그 결과 여하를 자상히 살펴서 나의 앞 길에 거울을 삼는 것이 공부인의 떳떳한 행실이요, 참된 이익을 얻는 길이니, 이것이 곧 모든 법을 통해다가 한 마음을 밝히는 일이라, 이러한 정신으로 신문을 보는 사람은 신문이 곧 산 경전이 될 것이요, 혜복의 자료가 될 것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도리어 날카로운 소견과 가벼운 입을 놀려 사람의 시비 평론하는 재주만 늘어서 죄의 구렁에 빠지기 쉽나니 그대들은 이에 크게 주의하라.]

마음공부[-工夫]

[개요]

마음을 인간 완성의 핵심주체로 보고 마음의 본질을 찾아 그 본질이 발현되도록 하려는 모든 노력. 원불교에서는 일원의 진리를 체득하고 실현해 가기 위한 신앙과 수행의 과정을 의미한다. 소태산대종사는 마음공부가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인간완성을 이끄는 핵심적 공부라고 강조하여, “모든 학술을 공부하되 쓰는 데에 들어가서는 끊임이 있으나, 마음 작용하는 공부를 하여 놓으면 일분 일각도 끊임이 없이 활용되나니, 그러므로 마음공부는 모든 공부의 근본이 되나니라”(대종경요훈품1)고 했다.

[마음의 의미]

마음은 매우 다층적 함의를 갖고 있다. 좁은 의미의 마음은 육신에 상대되는 지각능력을 중심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나아가 사람의 내면에서 지각하고 사유하고 추론하고 판단하는 주체로서 마음의 바탕인 성()과 그 발현으로서의 정()()()를 포함하는 개념으로도 사용한다. 넓은 의미에서 마음을 우주와 인간의 근본으로 보는 유심론(唯心論)적 세계관의 마음 개념도 있다. 우주의 본체를 정신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물질적 현상도 마음의 발현으로 보는 이론이다.

불교에서는 초기불교부터 해탈과 번뇌의 근원을 한 마음에서 찾고 무명을 걷어내고 지혜를 드러내는 마음의 수행에 주된 관심을 기울였다. 인간의 모든 문제의 근원을 인간 내부의 마음에서 찾고, 해결책도 마음에서 찾는 경향은 불교적 전통의 중심축을 형성하며 내려왔다. 이 관점은 대승의 유식(唯識)사상에 이르러 삼계가 모두 마음의 소산이며 만법이 오직 식의 나타남(三界唯心 萬法唯識)”이라는 사상으로 나아갔다. 여기서의 심은 중생의 내면적 의식 활동뿐 아니라 외부에 펼쳐진 객관세계 전체의 뿌리라는 관점을 포함하고 있다. 자연현상도 심식(心識)에 의한 업의 소산으로 보기에 이른 것이다. 식을 인간의 내면적 의식에만 국한하지 않고 우주자연의 근원이라는 의미까지 확대한 것이다.

이러한 유심적 경향이 화엄사상(華嚴思想)에 이르러 일체유심조라는 개념으로 표현되었다. 이에 마음수행은 개인적 내면의 문제를 넘어서 모든 존재의 근원에 까지 관통하는 의미로 심화되었다. 유가에서 마음은 맹자(孟子) 이후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부각되며 그 후 지속적으로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넓은 의미로는 유학 전체를 마음을 수양하는 학문으로 말하기도 한다. 맹자는 학문의 도란 놓은 마음을 구하는 것일 뿐이다”, 또는 자기의 마음을 다하는 사람은 그 본성을 알 수 있고 본성을 아는 사람은 하늘의 도리를 알 수 있다.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길이다”(맹자진심상)고 말한다. 마음의 수행을 통해 인간본성의 회복뿐 아니라 천도의 근원까지 파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송대의 정이천(程伊川)마음은 하나이지만 본체로 말하면 고요하여 움직임이 없는 것(寂然不動)’이며 작용으로 말하면 대상에 감응하여 통한다(感而遂通)’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했다. 마음을 중심으로 철학체계를 세운 학풍이 송명대의 심학(心學)이다. 육구연(陸九淵)성인(聖人)의 학문은 심학이다. ()()()가 서로 전한 소위 인심(人心)은 위태하고 도심(道心)은 은미하니 오직 정미하게 살피고 한결같이(精一)하여 진실로 그 중()을 잡으라는 말이 곧 심학의 연원이다”(육상산전집)고 했다. 시비(是非)선악(善惡)의 판단 및 도덕적 실천행위에 있어서 마음이 갖추고 있는 능력과 주체성을 중시하는 입장이다. 심학을 마음을 해석하고 수양하는 학문이라는 넓은 의미에서 정의한다면 심성을 위주로 전개된 조선조 유학은 대체로 심학적 경향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원불교사상에서 마음은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불교적 전통을 계승하여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한다. 마음의 본질을 깨닫고 마음의 자유를 얻은 경지가 부처라는 의미이다. 마음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조명해볼 수 있다. 먼저 현상을 접하여 모든 인식과 분별 판단을 하는 지각능력을 지니는 주체이다. “한 마음이 선하면 모든 선이 이에 따라 나타나고 한 마음이 악하면 모든 악이 이에 따라 일어나나니 그러므로 마음은 모든 선악의 근본이 된다”(대종경요훈품3).

마음은 현상으로 드러날 때 매우 역동적으로 활동하므로 살피고 조절하여 마음의 역량이 바르게 발현되도록 해야 한다. 마음의 발함에 따라 선악이 드러난다. 이런 의미에서 마음의 작용을 관조하고 마음이 선하게 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공부가 필요하다. 한편 마음은 성품, 정신, 뜻을 총체적으로 함축한 표현이기도 하다(정산종사법어원리편12). 동시에 마음은 세상과 우주 자연에까지 그 외연이 확대된다. 곧 일체가 마음의 짓는 바이며 자연 현상과 법계가 모두 마음의 나타난 바라고 보기도 한다.

[마음공부의 의미]

공부(工夫)의 의미는 원래 공부(功扶)를 뜻했다. ()성취하다’, ()돕다는 뜻으로 무엇을 도와 성취하다는 의미를 지녔다. 그렇다면 공부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배우고 실천하여 탁월한 능력을 얻어가는 모든 노력의 과정, 곧 인간의 삶에서 자신의 목표에 따라 자신을 연마하고 승화시켜 나가는 모든 활동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마음과 공부의 정의를 통해 마음공부의 의미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마음공부는 마음의 본질을 깨달아 이를 발현하는 과정에서 마음을 연마하고 승화시켜가는 모든 노력과 이러한 노력을 통해 마음을 총체적으로 알고 그 본질을 발현하여 궁극의 경지에 이르는 노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원불교에서 마음공부는 협의에서 마음의 지각능력을 중심으로 마음을 관조하고 현실 삶에서 부딪치는 모든 현상, 곧 경계에서 마음 사용을 바르게 하는 것에 초점을 두는 수행을 의미한다.

광의의 마음공부는 교리 전체가 마음공부라는 입장이다. 일원의 진리를 깨닫고 실현해가는 수행 등 모든 과정의 노력이 이에 해당한다. 구체적으로 인생의 요도 사은사요(四恩四要)와 공부의 요도 삼학팔조(三學八條)로써 전 세계를 불은화(佛恩化)하고 일체대중을 선법화(禪法化)”(정산종사법어경륜편5)하려는 공부이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쉼 없이 마음을 닦고 몸으로 증득해가는 과정에서의 모든 활동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원불교 마음공부의 특징]

원불교의 마음공부는 그 내포된 의미나 미치는 범위를 고려할 때 다음의 몇 가지 측면에서 그 특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의 삶속에서 부딪치는 내외의 현상에 직면하여 부단하게 자신의 인격을 고양시키는 공부이다.

이는 경계를 따라 일어나는 마음을 멈추고 원래 요란하지도 않으며 어리석음도 그름도 없는 본래마음을 되찾아가는 공부로서 마음공부의 가장 기본적이며 필수적인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예쁘고 밉고 좋고 나쁘고 하는 분별이 있는 마음을 참 마음이 아닌 것으로 보고 허공처럼 텅 빈 마음이 참 마음이라고 하고 찾아가는 마음공부이다. 정산종사는 성불하고 성인되는 길이 멀고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요 가까이 내 마음으로 공부하기에 달린 것”(정산종사법어권도편27)이라고 한다. 이 공부는 시간과 처소, 환경과 처지에 관계없이 누구나 행할 수 있고 행해야 하는 보편성을 지닌 공부라는 것이 소태산의 관점이다.

시대적 과제 해결이라는 의미에서의 마음공부이다.

마음 난리는 모든 난리의 근원인 동시에 제일 큰 난리가 되고 이 마음 난리를 평정하는 법이 모든 법의 조종(祖宗)인 동시에 제일 큰 병법이 되나니라”(대종경수행품58)고 했듯이 마음공부로 자신의 인격을 승화시킬 뿐 아니라 이 세상의 평화를 이룰 수 있다. 현대사회가 지니는 중요한 특징은 물질문명의 발달로서 물질문명은 인류사회를 편리하고 화려하게 바꾸었지만 그에 따라 사람의 정신은 점점 쇠약해져 가게 되었으므로 마음공부를 통해 정신의 주체를 세우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대와 사회현상에 대해 통찰할 수 있는 지혜를 필요로 한다. “만일 현대와 같이 물질문명에만 치우치고 정신문명을 등한시하면 마치 철모르는 아이에게 칼을 들려준 것과 같아서 어느 날 어느 때에 무슨 화를 당할지 모를 것”(대종경교의품31)이라고 지적한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의 하나가 마음공부이다. 원불교에서는 무엇을 배우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에서 소태산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 작용하는 법을 가르친다고 할 것이며, 거기에 다시 부분적으로 말하자면 지식 있는 사람에게는 지식 사용하는 방식을, 권리 있는 사람에게는 권리 사용하는 방식을, 물질 있는 사람에게는 물질 사용하는 방식을, 원망 생활하는 사람에게는 감사생활하는 방식을, 복 없는 사람에게는 복 짓는 방식을, 타력생활하는 사람에게는 자력생활하는 방식을, 배울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배우는 방식을, 가르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가르치는 방식을, 공익심 없는 사람에게는 공익심이 생겨나는 방식을 가르쳐 준다고 하겠노니, 이를 몰아 말하자면 모든 재주와 모든 물질과 모든 환경을 오직 바른 도로 이용하도록 가르친다 함이니라”(대종경교의품29).

마음 작용하는 법을 배워 마음을 바르게 사용하도록 하고, 그에 의해 인간의 모든 문명이 바른 도()로 이용되도록 하는 것이 핵심적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마음공부는 한 번 실력을 얻고 보면 능히 우주 만유를 지배할 수 있으며, 명예와 재보(財寶)와 일체 모든 학식을 다 참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니, 실력 있는 외화(外華)는 근원에서 흐르는 물 같고 실체에서 나타난 그림자 같아서 그 물과 그림자가 전부 참으로 화하게 되나니라”(정산종사법어근실편4).

마음공부에서는 기본적으로는 마음에 관해 몸을 주재하는 주체로 보고 마음을 주된 공부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몸의 수행까지 포함하여 영과 육을 함께 닦아가는 수행을 지향하는데 특징이 있다. 마음공부라고 하여 마음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며 마음과 분리될 수 없는 몸의 문제를 포함한다는 의미이다. 구체적으로는 망념을 쉬고 참된 본성을 드러내어 지혜를 닦음과 동시에 몸에서는 수승화강을 통한 기운의 조화로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때에는 경계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원래 요란함도 어리석음도 그름도 없는 본래 마음을 견지하는 동시에 생명의 근원인 원기를 보존하여 천지의 원기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공부는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이 사회 속에서 건전한 자아를 확립하고 바른 질서를 세우는데 그치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천지자연과 합일의 경지에 이름을 그 궁극으로 한다.

정산에 의하면 마음은 인간의 삶과 가치영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는 우주 자연에 까지 그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사람도 마음이 들어서 길흉화복과 생로병사를 지어 나가며, 천지도 근본되는 형상없는 진리, 곧 심이 들어서 성주괴공과 풍운우로상설과 유무 변화가 된다. 그러므로 천심이 곧 인심이요, 이는 일원과 같은 의미다. 심이란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한 것이다”(한울안 한 이치에일원의 진리67).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마음공부는 정전에서 자연 천지 같은 위력과 천지 같은 수명과 일월 같은 밝음을 얻어 인천 대중(人天大衆)과 세상이 곧 천지같이 우대할 것이니라라고 했듯 천지의 밝음 및 조화와 하나가 되는 경지를 지향한다. 이에 소태산은 심고와 기도의 효과를 설명하면서 확호한 심력(心力)을 얻으면 무궁한 천권(天權)을 잡아 천지 같은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나니라”(대종경교의품17)고 말한다. 천권이나 천지와 같은 위력은 사회적 맥락에서 파악하기 어려운 초월적인 어떤 측면을 포함한다.

정산도 공부인이 형상 없는 마음공부를 잘하고 보면 무형한 심력이 생겨나서 무한한 우주의 큰 기운을 능히 이끌어 응용할 수 있게 되나니, 이것을 일러 삼계의 대권(大權)이라 한다”(정산종사법어권도편49)고 하여 그 흐름이 같이 하고 있다.(원불교대사전)

[시사를 평론할 때]

<장원경 교무/담양교당>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반인들은 타인의 시비 평론을 별 생각없이 날카롭게 해오고 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흥미거리로 삼아 비판하고 퍼트리는 재미로 살기도 한다.

안방에서 인터넷을 통해 시시 각각 나라 안팎의 시사를 접하는 이 시대에 대종사님께서 오신다면 또 인도품 35장으로 가르침을 주시리라.

여러 제자들이 신문을 보다가 시사를 평론함이 분분한 자리에서 남의 시비를 가벼이 말하지 말라 하시고 신문을 본다 하여도 선악의 원인과 그 결과를 살펴서 앞 길에 거울을 삼으라는 것과 이러한 정신으로 신문을 보는 사람은 신문이 곧 산 경전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도리어 날카로운 소견과 가벼운 입을 놀려 죄의 구렁에 빠지기 쉽다고 크게 주의를 주실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시비에는 어둡고 타인의 시비에는 밝으며, 지혜있는 사람은 자신의 시비에는 밝으며, 남의 시비는 볼 여가가 없다.

정산종사께서는 그 원인으로, 남의 시비에 밝은 것은 상없는 마음으로 보기 때문에 밝은 것이며, 자신의 시비에 어두운 것은 아상에 가리워 져서 어둡다고 하셨다.

진정으로 공부에 눈 뜬 사람은 남의 시비를 가릴 여가가 없다. 공부에 눈 뜨려면 통만법명일심((通萬法明一心)의 결심으로 임해야 한다.

통만법명일심이란 우주의 모든 차별 현상을 꿰뚫어 그 이치를 막힘없이 알아서, 안으로 평등하고 청정한 성품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는 만법을 응용하여 일심을 밝히기도 하고, 일심을 깨달아 만법을 건설하기도 하는 경지로써 대원정각의 경지를 말한다. 과거 모든 성자가 통만법명일심의 수도자세로 공부했다.

성리품 5장에서는 누구나 만법을 통하여 한 마음 밝히는 이치를 알아 행하면 가히 대원정각(大圓正覺)을 얻는다고 했다.

통만법명일심을 깨닫고 보면 복과 혜를 아울러 간직하여 남의 시비를 보아서 나의 시비를 깨칠지언정 그 그름은 드러내지 않는 공부에 재미를 붙이게 된다.

법위등급 중 정식법마상전급에 이른 사람은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직 자신의 시비만을 다스려 나가는데 온갖 정성을 기울인다.

이 공부를 실행하는데 정기일기법의 심신 작용의 처리건을 기재하는 것 만큼 큰 공부가 없다. 자신의 신구의로 지은 업의 시비이해를 분석하여 자신의 시비이해 보는 눈을 단련시키기 때문이다.

세상이 바로 산 경전이라 하셨는데 현실로 나타나 있는 큰 경전을 잘 읽어 자기를 알고 남의 시비를 않는 것은 국민통합과 나아가 세계 평화를 앞당기는 최상책이다.

통만법명일심[通萬法明一心]

밖으로 천만 사물의 모든 이치를 꿰뚫어 안으로 나의 본래마음을 밝힌다는 뜻. 만법이란 일체 현상, 곧 우주 만유를 가리킨다. 우주의 모든 차별 현상을 꿰뚫어서 그 이치를 막힘없이 알아서, 안으로 평등하고 청정한 성품을 찾는다는 것이다. 만법을 응용하여 일심을 밝히기도 하고, 일심을 깨달아 만법을 건설하기도 하는 경지로서 대원정각의 경지를 말한다. 정산종사는 우주의 대소유무와 인간의 시비이해, 이러한 만사 만리를 보아서 나의 마음을 밝히고 또 밝히고 이것을 활용하라고 했다(한울안 한 이치에). 통만법하여 명일심하기도 하고 명일심하여 통만법하기도 한다.(원불교대사전)

신구의 삼업[身口意三業]

(: 몸 신, : 입 구, : 뜻 의, : 석 삼, : 업 업,)

[개요]

사람들이 몸과 입과 마음으로 업을 짓는 것을 신구의 삼업이라고 한다. 신업(身業)은 몸으로 짓는 업으로 살생(殺生)투도(偸盜)사음(邪淫), 구업(口業)은 입으로 짓는 업으로 망어(妄語)기어(綺語)양설(兩舌) 악구(惡口)이며, 의업(意業)은 마음으로 짓는 업으로 탐애(貪愛)진애(瞋礙)치암(癡暗)이다. 이를 통칭하여 10악업이라고 한다.

[삼업의 의미]

신구의 세 가지 업이 축적되어 에너지를 가진 업력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면 업의 훈습은 거듭되어 이 세상을 고통의 바다로 만들고 심지어는 사람의 얼굴, 생각마저도 그 업의 훈습에 따라 변하게 된다. 초발심자경문선남자, 선여인들에게 세 가지 법이 있다면 진리의 도량에 이르게 되나니 그 세 가지란 무엇인가. 첫째는 신체의 청정(身淨)이요, 둘째는 입의 청정(口淨)이요, 셋째는 생각의 청정(意淨)이다. 이 세 가지 법을 갖추면 부처님의 도량에 이르게 된다. 몸을 가벼이 움직이지 않으면 산란한 마음을 다스려 선정(禪定)을 이루고 말이 적으면 미혹을 돌이켜보아 지혜를 이룬다.

실상(實相)은 언어를 떠난 것이며 진리는 경거망동하지 않는다. 입은 모든 화근의 문이니 반드시 엄하게 지키고 몸은 모든 재앙의 근본이니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한다. 자주 나는 새는 그물에 걸리기 쉽고 가벼이 날뛰는 짐승은 화살을 맞을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설산에서 6년 동안 앉아 움직이지 않으셨고 달마는 소림굴에서 9년 동안을 묵언으로 침묵하셨다. 후세에 참선하는 사람들은 어찌 이 일을 본받지 않는가라고 하여 업을 잘 다스리라고 했다. 신구의 삼업의 구체적인 열 가지 행위를 십악이라 한다. 자기가 짓는 악행의 업을 매일 참회하며 자신이 업의 고통에 스스로 빠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원불교적 의미]

신구의 삼업은 복짓고 죄짓는 밭이다. 정전일원상 법어에서는 이 원상은 안의 육근(眼耳鼻舌身意六根)을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구족(圓滿具足)하고 지공무사(至公無私)한 것이로다.”라 했다. 육근을 요약하면 신구의 삼업으로 이를 작업할 때 일원상처럼 사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 솔성요론(率性要論)’삼십계문(三十戒文)’을 두어 삼업을 청정하게 하도록 했다. 성가참회의 노래(내가 지은 모든 죄업)’에서는 내가 지은 모든 죄업 생각하오니 탐심 진심 어리석음 근본이 되어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었던 바라 내 이제 모두 깊이 깊이 참회합니다. 죄업이 자성에는 본래 없으나 마음따라 모든 죄가 일어났나니 그 마음 멸도되면 죄도 공한 것 모두 공한 그 자리에 그치오리다라고 노래했다.(원불교대사전)

[사람이 남의 시비는 드러내는데 내 시비는 감추는 것이 무슨 일인가?]

<류성태 교무>

범부 중생들이 살아가면서 고통의 죄업을 짓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서로 시비를 따지다가 자기를 보다 합리화하여 상대방을 비방하는 방향으로 치우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중생들은 남을 함부로 평가하고 폄하하는 습관으로 인해 죄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나의 시비는 쉽게 용서하고 남의 시비는 냉정하게 따지려는 심리는 무엇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인가? 불교의 유식학에서는 세 가지 자성(自性)으로 현상계를 설명하는데, 그중 하나가 분별성(변계소집성)으로 이 변계소집성은 자기의 감정에서 시비의 차별적 집착을 일으켜서 일체 사물에 대하여 자기 주관적 색채를 띠고 남의 잘못을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나아가 우리가 남의 시비는 드러내는데 내 시비는 감추는 이유는,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나의 시비를 너그럽게 생각하고 남의 잘못을 쉽게 판단하는데서 오는 현상 때문이다. 기왕 시비를 따지려면 나와 남의 차별적 분별보다는 불의와 정의의 공정한 분별에서 비롯되어야 할 것이다.

법률피은의 조목 3조에서 "시비이해를 구분하여 불의를 징계하고 정의를 세워 안녕질서를 유지하여 우리로 하여금 평안히 살게 함이니라"고 언급한 이유가 분명해진다.

이 시비란 우리의 행동결과에 직결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리간의 처사에 있어 나타나는 선행은 시()요 악행은 비()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에 소태산 대종사는 시비를 선악과 관련하여 "남의 시비를 보아서 나의 시비를 깨칠지언정 그 그름은 드러내지 말라"는 법어를 설하였다.월말통신 7

물론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시비를 따지지 말라는 것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본 문목은 시비를 따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시비의 편중을 나 중심에 두고 남을 탓하는 것에 흘러가기 쉬움을 극복하자는 것이다.

이에 대종사는 "그대들이 어찌 남의 일에 대하여 함부로 말을 하는가. 참된 소견을 가진 사람은 남의 시비를 가벼이 말하지 아니하나니라"대종경 인도품 35고 하여 남의 시비에 대하여 일희일비하지 말라고 하였다.

아무튼 본 문목이 오늘의 정전솔성요론 10조로 정착되었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의 그릇된 일을 견문하여 자기의 그름은 깨칠지언정 그 그름을 드러내지 말 것이요"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자성을 성찰할 때 항상 남의 잘못을 신경쓰기 전에 자신의 언행에 더 신중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본 문목을 실천해야 하는 이유는 작업취사와 관련되며 취사의 능력을 키우기 위함이라 본다. '정기일기법'에서 심신작용의 처리건을 기재시키는 뜻은 당일의 시비를 감정하여 죄복의 결산을 알게 하며 시비이해를 밝혀 모든 일을 작용할 때 취사의 능력을 얻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