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 수행품(修行品) 53장
대종경(大宗經)
제3 수행품(修行品) 53장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공부하는 사람이 밖으로는 능히 모든 인연에 대한 착심을 끊고 안으로는 또한 일심의 집착까지도 놓아야 할 것이니 일심에 집착하는 것을 법박(法縛)이라고 하나니라. 사람이 만일 법박에 걸리고 보면 눈 한 번 궁글리고 몸 한 번 동작하는 사이에도 법에 항상 구애되어 자재(自在)함을 얻지 못하나니, 어찌 큰 해탈(解脫)의 문에 들 수 있으리요.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이 성품을 기르되 모름지기 자연스럽게 기르고 활발하게 운전하여 다만 육근이 일 없을 때에는 그 잡념만 제거하고 일 있을 때에는 그 불의만 제거할 따름이라, 어찌 일심 가운데 다시 일심에 집착하리요. 비하건데, 아기를 보는 사람이 아기의 가고 옴과 노는 것을 자유에 맡겨서 그 심신을 활발하게 하되, 다만 위태한 곳에 당하거든 붙잡아서 가지 못하게 하고 위태한 물건을 가지거든 빼앗아서 가지지 못하게만 하면 가히 아기를 잘 본다고 할 것이어늘, 아기를 본다 하여 아기를 붙잡고 굳게 앉아서 종일토록 조금도 움직이지 아니하면 아기는 자연히 구속에 괴로와 할 것이니 일심에 집착하는 폐단도 또한 이에 다름이 없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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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박[法縛]
법을 고정된 실체로 생각하여 법에 묶이는 것. 법집(法執)이라고도 한다. 법은 본래 무법(無法)에 법했기 때문에 법이라는 실체는 없다. 다만 참다운 법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 ‘법’이라고 이름 할 뿐이다. 작게는 교법에 얽매여 참다운 실행이 없거나 그 가르침에만 고정되어 활용의 도를 모르는 것을 말한다. 법박에 걸리면 자승자박하는 것과 같아 오히려 자유를 잃고 구속될 수 있다. 법을 닦음이 중요하나 마지막엔 그 법마저도 놓아버리는 상 없는 공부가 중요하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나는 녹야원에서 발제하에 이르기까지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고 했다. 이는 본래 법은 설할 것도 없는 것이며, 현실적으로 49년간 설한 법에 대해서는 그 법에 묶이지 말라는 의미이다.(원불교대사전)
해탈[解脫]
일체의 심적(心的) 구속과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것. 삼독심ㆍ오욕 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물론 죽음 앞에서도 초연하고 담담해 질수 있는 마음 상태를 말한다. 소태산대종사는 “해탈한 사람의 심경은 범상한 생각으로 측량하지 못할 바가 있나니, 무슨 일이나 그 일을 지어 갈 때에는 천만년이라도 그 곳을 옮기지 못할 것 같으나 한번 마음을 놓기로 하면 일시에 허공과 같이 흔적이 없나니라”(《대종경》 부촉품1)고 했다. 정산종사는 해탈의 도를 다음 세 가지로 들고 있다.
① 생사가 원래 없는 불생불멸의 근본 진리를 철저히 관조하고 그 진리를 생사의 경계에 실지로 응용하는 것.
② 고락이 원래 돈공한 자성의 원리를 철저히 관조하고 그 진리를 고락의 경계에 실지로 응용하는 것.
③ 모든 차별과 이해(利害)가 원래 공(空)한 자리에서 인과 보응되는 이치를 철저히 관조하고 그 진리를 차별과 이해의 경계에 실지로 응용하는 것(《세전》 휴양).
또 “공부하는 사람이 일심을 놓지 않는 것이 평상심을 운용하는 원동력이 되나니, 공부하는 이가 평상의 진리를 깨치면 능히 생사고락에 해탈하는 묘법을 얻을 것이라”(《정산종사법어》 권도편47)고 했고, 삼학공부 중에 수양은 해탈이 표준이 된다고 했다(《정산종사법어》 경의편18).(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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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일심]
<영산선학대학교/장원경 교무>
대종사님께서는 수행품 53장에서 밖으로는 모든 인연에 대한 착심을 끊고 안으로는 또한 일심의 집착까지도 놓도록 하셨으며 일심에 집착하는 것을 법박이라고 하셨다.
법박(法縛)은 법이라는 고정관념에 집착하여 거기에 속박되어 교법을 듣고도 진실한 뜻을 깨닫지 못하거나 실행하는데 도리어 부자유스럽게 얽매이는 것을 말한다. 서가모니불이 열반을 앞두고 "나는 한 법도 설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법박에 얽매이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불교에서도 일심을 강조하는 것은 해탈(解脫)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인데 법박의 폐단으로서는 눈 한 번 궁굴리고 몸 한 번 동작하는 사이에도 법에 항상 구애되어 자재함을 얻지 못하여 큰 해탈의 문에 들 수 없음을 지적하셨다. 육근이 일 없을 때에는 그 잡념만 제거하고, 일 있을 때에는 불의만 제거할 뿐 일심 가운데 다시 일심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심을 아기 보는 일에 비유하셨다.
일심(一心)을 챙기는 목적은 번뇌로부터 벗어나서 인간의 본연을 그대로 드러내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아 어디에도 집착(執着)함이 없이 자유로운 경지에 도달하는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미망(迷妄)에 휩싸이지 않고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는 것이다. 그러한 일심이야 말로 건강한 일심이다. 일심공부를 하면 자연히 정신이 두렷하고 고요해서 일체의 사심잡념이 없이 마음이 온전해 진다.
일심공부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이상적인 자리, 돌아가야 할 원초적인 자리이기 때문이다.
일심공부를 하다보면 번다한 잡념을 끄리던 중에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도 어렵지만 일심해야 한다는 틀에 매이는 어려움도 있다. 그러나 그 순간 틀에 매이는 자신을 알아차려 볼 수만 있다면 그 틀을 놓는 공부를 하게 된다.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경지가 일심인데 일심 그 자체를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해서 매달리는 것은, 스스로 자유롭지 못하고 얽매어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일심의 중요성은 강조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집착하여 빠져서는 건강한 일심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건강한 일심을 챙기자면 무시선 무처선으로 때와 곳을 가리지 않고 선할 줄 아는 것이다. 이것이 일심연속(一心連續)이고 일념만년(一念萬年)이다.
자연을 보라. 물새는 물위를 걸어도 자취를 남기지 않고, 바람이 대숲에 불어 와도 바람이 지나가면 그 소리를 남기지 않는다. 흔적없는 일심공부에 들어 집착하는 생활 대신 본성을 회복하는 생활을 해야한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