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 수행품(修行品) 37장
대종경(大宗經)
제3 수행품(修行品) 37장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나는 그대들에게 희·로·애·락의 감정을 억지로 없애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희·로·애·락을 곳과 때에 마땅하게 써서 자유로운 마음 기틀을 걸림없이 운용하되 중도에만 어그러지지 않게 하라고 하며, 가벼운 재주와 작은 욕심을 미워할 것이 아니라 그 재주와 발심의 크지 못함을 걱정하라 하노니, 그러므로 나의 가르치는 법은 오직 작은 것을 크게 할 뿐이며, 배우는 사람도 작은 데에 들이던 그 공력을 다시 큰 데로 돌리라는 것이니, 이것이 곧 큰 것을 성취하는 대법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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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中道]
[개요]
두 극단을 떠나 한편에 치우치지 않는 공명한 길. 불교에서는 유(有)나 공(空)에 치우치지 않는 진실한 도리, 또는 고락의 양편을 떠난 올바른 행법을 중도라고 한다.
[불교의 중도 사상]
불교의 중도사상(majjihimā paṭipadā)은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은 바른 길이라는 의미로서 초기불교부터 근본진리의 중요한 특징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이어 대승ㆍ소승 각 교파에서도 중도야말로 불교적 진리관의 요체라는 의미에서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초기불교의 중도는 보통 실천 중도와 이론 중도(理論中道)로 나누어 설명된다. 실천 중도는 녹야원의 처음 설교에서 교진여 등 다섯 사람에게 설해진 내용이며, 구체적으로는 정견(正見)ㆍ정사유(正思惟)ㆍ정정진(正精進)ㆍ정업(正業)ㆍ정어(正語)ㆍ정정(正定)ㆍ정념(正念) 등의 팔정도(正道)로서 설명되었다.
석가모니가 치우친 수행법으로 반대한 것은 고행주의와 쾌락주의의 두 가지였다. 팔정도는 고행이나 낙행(樂行: 쾌락행) 등의 치우침에 떨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지혜와 정력(定力)과 자재(自在)와 깨달음(覺)과 열반을 얻는 가장 정당한 방법으로 생각되었다. 《잡아함》 권9, 《중아함》 권29에 동일한 내용이 있다. 과도한 정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심해탈(心解脫)을 얻지 못한 자기의 마음을 비관한 한 비구가 귀가하여 오욕락(五欲樂)을 수용하고 보시(布施)로 복업(福業)을 닦으려 할 때 세존이 이를 가야금의 비유를 들어 훈계했다. 그리고 능히 시(時)를 분별하고 상(相)을 관찰하여 중(中)을 잡으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 형편을 따라 대의를 세우라는 말이다.
팔정도마다 머리에 정(正)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중정(中正)의 뜻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 중도 외에 석가모니는 이법중도(理法中道)를 설하여 다시 이론적이고 사상적인 중도관을 제시했다. 석가모니는 유아(有我)와 무아(無我), 죽은 후 생명이 영속되는가 아니면 단멸되는가 등 여러 가지 치우친 견해를 극복하고자 했다. 이밖에도 육체와 마음은 하나인가 둘인가, 또는 일체존재의 본성이 하나인가 여럿인가의 문제도 중요했다. 후자의 경우 모든 존재가 하나인 근본에서 나왔다고 보는 견해는 전변설(轉變說), 많은 다양한 성질을 지닌 존재의 결합이라는 관점은 적취설(積聚說)이라고 불리어졌다.
적취설에서도 중요한 원소를 몇 가지로 보는가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분립되었다. 이런 관점은 당시에 제기되었던 여러 가지 형이상학적 문제들로서 석가모니는 이를 십이연기(十二緣起)에 의한 중도사상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모든 존재는 독립된 개체의 실체가 없고 다만 인연에 의하여 서로 의지하고 서로 바탕이 되는(相依相資)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원리의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게 된다”(此有故彼有)는 원리는 서로의 공간적인 인연을 말한다 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발생하기 때문에 저것이 발생한다”(此起故彼起)는 원리는 서로의 시간적인 인연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시간적인 면에서 무상(無常)인 것이며 공간적인 면에서 무아(無我)인 것이다.
이 연기의 원리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십이인연설이다. 이 십이인연(十二因緣)은 무명(無明)의 인(因)으로 부터, 즉 무명에 의해서 행(行)이 있고 행에 의하여 식(識)이 있고 식에 의해서 명색(名色)이 있고 이 명색에서 육입(六入)ㆍ촉(觸)ㆍ수(受)ㆍ애(愛)ㆍ취(取)ㆍ유(有)ㆍ생(生)을 거쳐 노사우비고뇌(老死憂悲苦惱) 등의 십이인연으로, 모든 존재가 서로 인(因)과 연(緣)이 되어 생성변화하고 윤회한다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예를 들어 일체 존재가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에 관하여 무명이 있는 한 유라고 볼 수 있으나 무명을 멸하면 모든 것이 공하므로 무로 볼 수도 있다는 관점을 제기한다.
실천수행의 입장에서의 중도를 제외한 모든 형이상학적 문제는 십이연기에 의해 응답하며 설명하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집착된 관점을 벗어난 중도적 지혜를 통해 열반의 경지를 증득하여 실천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석가모니의 열반 후 약 500년경에 대승불교를 흥기시킨 용수(龍樹, Nãgãrjuna)는 석가모니의 모든 사상을 중도에 의하여 설명코자 하여 《중론》을 저술했다. 중론에서는 생(生)ㆍ멸(滅)ㆍ단(斷)ㆍ상(常)ㆍ일(一)ㆍ이(異)ㆍ내(來)ㆍ출(出)의 8종의 편견을 벗어난 공(空)의 세계를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고 본다.
만유는 모두 연기의 소산이므로 실체가 없어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이를 팔불중도(八不中道)라고 말한다. 요컨대 중도는 모든 집착이나 분별을 벗어난 무소득(無所得)의 경지를 의미했다. 중도사상은 그 후 천태종ㆍ화엄종에서 이론적으로 더욱 정치해지고 선불교에서 실천적으로 계승되었다.
천태종의 개창자 지의(智顗)는 중도에 바탕한 바른 관점(正觀)이 부처의 안목이라고 말하고(《수습지관좌선법요(修習止觀坐禪法要)》) 이러한 안목을 얻을 때 정과 혜를 고르게 갖추어 불성을 요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나아가 세간(生死)과 출세간(涅槃)에 집착하지 않고 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참된 중도적 실천이라고 보았다. 세간적 관점을 세제(世諦, 또는 俗諦)라 하고 출세간적 관점을 제일의제(第一義諦, 또는 眞諦)라고 본다면 두 가지를 벗어난 중도적 관점을 바른 안목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화엄을 비롯한 대승 각 교파에 일관되어 있다.
[유교의 중용사상]
중국 고전인 《서경》에서는 중(中)에 대하여 언급한 내용이 보인다. 요(堯)가 순(舜)에게 위를 전할 때 “진실로 그 중을 잡으라”(允執厥中)라고 부촉했다. 순이 우(禹)에게 위를 물려줄 때 “인심은 오직 위태롭고 도심은 오직 미묘하니 오직 정성되고 한결같이 하여 진실로 그 중을 잡으라”(人心惟危 道心惟徵 惟精惟一 允執厥中)고 한데서 중의 실천 방법을 찾아볼 수 있다. 이어 《서경》 ‘홍범’에서 말한 황극(皇極)도 중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논어》에서는 중용(中庸)의 덕(德)이 지극함을 말했다.(《논어》 옹야편) 이렇게 단편적으로 논의되던 중사상은 자사(子思)의 저서로 알려진 《중용》에서 체계적으로 종합되었다.
중용이란 개념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석이 나와 있으나 성리학자 주자(朱子)의 주석이 가장 저명하다. 그는 ‘중’이란 기울어지거나 의지하지 않고 지나치거나 모자라지도 않는 것이라 했고 ‘용’은 평상(平常)함을 뜻하니 본분을 지켜 괴이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라 정의했다.(《중용장구》 서) 《중용》에서는 중을 중과 화의 두 가지로 설명한다. 중은 희로애락의 감정이 아직 발동되지 않을 때를 말하고 발하되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한다. 여기서 사려와 감정이 발동되지 않을 때는 근본적 중이라면 발동될 때는 상황에 따른 조화로운 발현이 중시된다.
상황에 따른 화는 특히 시중(時中)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형식에 고정되어 있는 정제된 중이 아님을 표현했다. 실제로는 순도 대의를 살리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격식을 폐한 일이 있으며 공자에게도 이러한 사례가 많이 있었다. 《맹자》 ‘진심편’에 ‘터럭 하나를 뽑아 천하가 이롭다 해도 하지 않는다’는 양자(揚子)와 ‘머리에서 발끝까지 갈아 없어지더라도 남을 위해서는 하겠다’는 묵자(墨子)와 이도 저도 아닌 중간의 자막(子莫)을 들고, ‘자막의 입장이 중에 가까운 듯하나 중만 잡았지 수기응변의 대의가 없으므로(執中無權) 옳지 못하고 피해가 많다’ 했다.
또 순우곤(淳于髡)이 맹자에게 남녀의 예(禮)를 물은 뒤 ‘형수가 물에 빠졌을 경우에는 손을 잡아 건져야 될 것인가, 예(禮)에 충실해야 할 것인가’를 물었다. 이 때 맹자는 ‘때에 따라 대의를 세우는 권도(權道)를 중시할 것이니 그런 경우에 방관하고 있는 사람은 이리나 승냥이와 같다’고 답변했다(《맹자》 이루편상17). 이와 같이 동(動)할 때의 도가 때와 곳과 대의 또는 이치에 맞으면 과도한 것과 모자람이 없는 중도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이러한 용(用)으로서의 중도 이전에 체(體)로서의 중도에 표준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중용》에서는 이를 희로애락이 발하기 전의 중도(未發之中)로 표현한다. 유가적 중도주의는 《중용》의 ‘극고명이도중용(極高明而道中庸)’이라는 언급에서 가장 잘 드러나 있다. 고명한 깊은 이치를 추구하되 일상생활을 벗어나지 않고 실현한다는 이념이다. 일상에 떨어져 도의 실현을 소홀히 하거나 일상을 포기하고 고원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경계한다. 수신(修身)ㆍ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의 무대에서 이상을 실현하자는 것이 중도주의의 기본내용이다. 유교에서의 중도정신은 개인의 조화로운 마음의 보존과 실현에서만 논의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유가의 덕치주의는 법가(法家)와 도가(道家)의 양극단을 떠난 중도적 입장으로 볼 수 있다. 법가적 법치주의(法治主義)는 개관적 규범인 법과 힘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는 반면 도가는 인위적 제약을 벗어나 자연과 하나가 되는 도치주의(道治主義)를 강조한다. 법가는 부국강병책에 의한 중앙집권적 대통일제국을 지향하는 반면 도가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을 지향한다. 이에 비해 유가는 통치자의 덕에 바탕하고 예(禮)와 악(樂)의 상보적 역할이 이루어지는 대동세계(大同世界)를 지향한다.
[원불교의 중도]
《정전》 ‘천지보은의 조목’에 “천지의 지극히 공정한 도를 체받아서 만사를 작용할 때에 원ㆍ근ㆍ친ㆍ소(遠近親疎)와 희로애락에 끌리지 아니하고 오직 중도(中道)를 잡을 것이요”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의 중도는 외부적으로는 정에 얽힌 친소관계를 벗어나고 내면적으로는 감정의 동요나 집착이 없는 데서 나오는 공정한 표준이나 판단을 의미한다. 《정전》의 사대강령에서 ‘정각정행(正覺正行)은 일원의 진리 곧 불조정전(佛祖正傳)의 심인(心印)을 오득(悟得)하여 그 진리를 체받아서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 육근(六根)을 작용할 때에 불편불의(不偏不倚)하고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원만행(圓滿行)을 하자는 것이며’라고 하여 중도를 원만행으로 표현하고 있다.
위 내용에 의거하면 중도는 근본적으로는 천지의 도, 또는 일원의 진리를 본받아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심신작용을 행함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치우치거나 그릇되게 집착하지 않고 항상 가장 알맞은 도를 행해 나감을 말한다. 나아가 중도를 넓은 의미에서 해석할 때 조화와 균형을 지향하는 원불교의 개교이념이나 교법정신에서 중도의 이념적 지향방향을 찾을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영(靈)과 육(肉), 진리와 현실, 도학과 과학, 외정정(外定靜)과 내정정(內定淨), 신앙과 수행, 동(動)과 정(靜) 등의 병행(竝行) 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의 중도의 성격은 관점이나 사상, 행위 등이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가장 결함 없는 총체적이며 균형 잡힌 상태를 견지했음을 뜻한다. 즉 각 분야가 총체적으로 조화와 균형을 이룬 이상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원불교사상에서 중도는 근원적 진리의 모습이나 본성을 비롯하여 개인의 인격, 사회의 조건, 문명의 성격 등 다양한 영역에까지 매우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중도의 속성 중 또 하나의 요소는 불의(不義)에 반대되는 정의(正義)의 개념이다. 중은 중간의 의미보다도 초월이나 원만에 결부된 정의의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하고 이 속성들이 모두 종합될 때 중도의 참다운 의미가 드러난다. 이 경우 중도는 정의롭게 하는 것, 또는 가장 타당한 방향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견해나 사상이나 행위를 올바르게 도에 부합되게 할 때에 중도가 된다. 심층적으로 이해한다면 중도는 바로 도 자체이기도 하고 또는 도에 일치한 모든 타당한 인식 또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원불교의 중도정신은 불교와 유교 등 전통적 중도사상과 상통되는 면이 많다.(원불교대사전)
공력[功力]
(1)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 공들이고 애쓰는 것.
(2) 불법(佛法)을 수행하여 얻은 공덕의 힘. 삼학수행으로 얻은 삼대력(三大力)을 말한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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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것을 성취하는 대법]
<영산선학대학교/장원경 교무>
대종사님께서 제자들을 크게 키워주신 말씀중의 하나가 "희로애락을 억지로 없앨 것이 아니라 희로애락의 감정을 곳과 때를 따라 중도에 맞게 잘 활용하라 하셨으며, 가벼운 재주와 작은 욕심을 미워하지 말고 그 재주와 욕심을 키우라"고 하신 것이다.
수행품 37장에는 감정과 재주와 욕심에 관한 치료법이 간결하고 정확하게 나타나 있다.
과도한 감정 표출과 가벼운 재주와 작은 욕심은 세계와 가정, 사회를 불안하고 어지럽게 하는 큰 요인이 될 수 있다. 세상을 낙원으로 만들기 위한 가장 기초는 감정의 중도적 활용과 재주와 욕심의 바람직한 확장이며, 이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교단 100주년을 앞두고 우리가 세계를 향해 꾸준히 확산해나가야 할 큰 공부이다.
희·로·애·락의 감정을 중도에 맞게 활용하려면 희로애락을 초월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과거의 도가 공부는 희로애락을 없애는데 중점을 두었으나 우리는 초월할 수 있는 힘을 갖추면 희로애락이 나쁜 것이 아님을 알려주셨다. 불보살은 희로애락의 경계를 당하여도 증애에 착심이 없으시나, 범부는 좋고 낮은 데 집착하는 점이 다르다고 하셨다.
다음은 〈대산종사 법문집〉에 나오는 말씀이다.
"희로애락을 쓰더라도 희로애락에 걸리지 않아야 된다. 일념미생전 자리를 회복하는 것이다. 한 스님이 있었는데 그 스님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공양주가 있는 데로 그 스님을 오라고 한다고 거짓으로 전했다.
그쪽으로 가니 스님이 여자 공양주와 좋아한다고 북을 치며 쫓아내니 스님이 허허 웃으며 같이 북을 치며 나가면서 '종부선인은 북을 치는 선인이니라'고 하였다. 참으로 걸림 없는 해탈 자재한 스님의 모습을 보여 주셨다."
재주와 욕심을 크게 돌려 키워야 한다. 재주와 욕심에 마음이 묶여 있는 것이 문제이다. 한 재주에 집착하면 큰 재주를 이룰 수 없다. 나의 재주에만 국집하면 남의 재주를 받아들여 나를 발전 시키기 어렵다. 큰 재주는 인화의 재주이며 넓은 품으로 남의 재주를 받아들이면 내 재주도 넓어진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욕심이 많다. 다만 그 욕심이 성불제중의 큰 서원과 일치되게 돌려 키워야 한다. 욕심을 수용해 주고 그를 키워 무욕(無慾)에 이르게 하고, 그 욕심이 공(公)을 위한 것이 되도록 하고 마침내는 서원으로까지 승화되도록 하셨다.
서원으로 거듭난 사람은 수용력이 증대되고 능력과 실력이 향상되기 때문에 그의 욕심은 무한히 성장할 수 있게 된다.
일념미생전[一念未生前]
(1) 한 생각 생겨나기 이전의 상태. 천지 미분전ㆍ부모 미생전과 같은 말.
(2) 일원상의 진리의 본체를 나타내는 말. 일원상의 진리는 한 생각도 일어나기 이전의 소식이라는 뜻.
(3) 태초(太初). 우주의 시초.(원불교대사전)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