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경(大宗經)/제3 수행품(修行品)

제3 수행품(修行品) 3장

원재(Aid Perfection) 2014. 9. 30. 12:18

대종경(大宗經)

제3 수행품(修行品) 3장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과거 도가(道家)에서 공부하는 것을 보면, 정할 때 공부에만 편중하여, 일을 하자면 공부를 못 하고 공부를 하자면 일을 못 한다하여, 혹은 부모 처자를 이별하고 산중에 가서 일생을 지내며 혹은 비가 와서 마당의 곡식이 떠 내려가도 모르고 독서만 하였나니 이 어찌 원만한 공부법이라 하리요. 그러므로, 우리는 공부와 일을 둘로 보지 아니하고 공부를 잘하면 일이 잘되고 일을 잘하면 공부가 잘되어 동과 정 두 사이에 계속적으로 삼대력 얻는 법을 말하였나니 그대들은 이 동과 정에 간단이 없는 큰 공부에 힘쓸지어다.]

동정일여[動靜一如]

[개요]

원불교 표어의 하나. 동과 정이 한결같음. 동정간(動靜間) 불리자성(不離自性) 공부. 일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끊임없이 참된 마음을 지키는 공부를 말한다.

[동정일여의 의미]

일을 하면서 육근(六根)을 활발하게 사용할 때나 일이 없어 한가할 때나 항상 청정하고 지선(至善)한 본래마음을 잃지 않는 공부를 하는 수행법이다. 동(動)은 몸과 마음을(六根) 작용하여 일을 처리해 가는(有事) 것을 말하며, 정(靜)은 일이 없을(無事) 때를 이름이며, 일여(一如)는 한결같음을 의미한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삼학수행(三學修行)의 표준을 놓지 않고 삼대력(三大力)을 얻어 나가는 무시선(無時禪)의 실천 강령이다. 동과 정은 심신작용에 대한 양면적 표현이다. 우리의 본성은 동이라 할 수도 정이라 할 수도 없는 본래 그대로이나 육근을 사용하는 측면에서 보면 동정으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다.

일여(一如)는 참 마음, 본성 그대로의 마음으로 궁극의 진리(일원의 진리)와 내가 하나가 되고, 도(道)와 내가 하나가 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동정일여의 공부는 마음이 작용하고 몸을 사용할 때나 조용히 일이 없을 때나 항상 가리거나 기울어짐이 없이 본연의 성품을 온전히 지키는 공부이다. 일이 없을 때는 성품의 본연청정함에 머물며, 일이 있을 때에는 성품의 본연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마음과 몸을 사용하여 도(道)를 떠나지 않는 공부이다. 텅 비고 고요하여 참된 성품 본연의 마음이 만사 만물에 응할 때 그 충만한 작용이 발현되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드러나도록 하는 공부이다.

곧, ‘마땅히 진공(眞空)으로 체를 삼고 묘유(妙有)로 용을 삼아 동(動)하여도 동하는 바가 없고 정하여도 정하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작용’(《정전》 무시선법)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동하여도 분별에 착(着)이 없고 정하여도 분별이 절도(節度)에 맞아 육근의 동정 모두가 다 공적영지의 자성에 부합되지 않는 바가 없게 된다”고 했다.

[동정일여의 수행]

동정일여의 수행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일상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챙기는 마음을 놓지 않고 성품의 본래면목이 드러나도록 심신을 지켜 나가야 한다. 이러한 공부를 해나가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공부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일이 없을 때에는 항상 일 있을 때에 할 것을 준비하고 일이 있을 때에는 항상 일 없을 때의 심경을 가지는 것’(《대종경》 수행품10)이다. 일이 없을 때 미리 준비하여 일이 있을 때 당황하거나, 혼란스러워져서 본성의 고요함을 잃지 않도록 하며, 일이 있을 때는 목전의 상황에만 얽매이지 말고 차분하게 순서를 따라 일을 처리함으로서 고요하고 넉넉한 심경을 지켜갈 수 있도록 하는 공부이다. 정중동공부(靜中動工夫)ㆍ동중정공부(動中靜工夫)이다.

둘째 구체적인 공부 방법으로 육근이 무사한 때(靜時)에는 마음을 오롯하게 하여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一心)을 양성하며 육근이 유사한 때(動時)에는 굳건한 마음으로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양성하는 공부를 하는 것이다.

셋째 일이 없을 때에는 밖의 경계가 마음을 침범하여 들어오지도 않고 마음이 밖의 경계에 끌려가지도 않아서(外不放入 內不放出) 적적성성한 본래 성품에 머무는 수행의 깊은 경지에 침잠하는 공부를 한다. 일이 있어 동할 때는 천만가지 일 중에서도 본래 마음을 한결같이 지키며(正體如如) 순역경계에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 공부를 하는 것이다. 수행의 경지가 현실적인 일에서 발현되어 일이 바르게 이루어지고 도의 넉넉함도 함께 즐기는 해탈공부이며 자재공부이다.

넷째 내정정(內定靜)ㆍ외정정(外定靜) 공부이다. 정정은 마음이 안정되고 고요함을 얻는다는 뜻이다. 안정된다는 것은 마음이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음을, 고요함은 마음에 욕심이 가라앉고 청정한 일심을 간직함을 뜻한다. 내정정은 일이 없을 때의 청정한 마음을 기르는 수양법이며, 외정정은 일이 있을 때 생활 속에서 정의를 실천함으로써 번뇌의 근원을 잠재우는 수양법이다.

맹자의 부동심과 노자의 허정(虛靜)을 융합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서, 마음과 기운이 온전히 조화를 이루고 이에 바탕하여 깨달음을 얻는 수행을 지향하고 있다. 이는 왕양명(王陽明)의 동할 때도 마음이 정(定)하고(動亦定), 정할 때도 마음이 정(定)하여(靜亦定), 동하고 정하는 어느 때에나 항상 백천삼매(百千三昧)를 얻는 경지, 곧 일상삼매(一相三昧) 일행삼매(一行三昧)와도 통한다고 할 수 있다.

동정일여의 공부는 수도에 발심하여 공부하는 사람들이 조용한 곳에서 일 없이 고요히 앉아 하는 정할 때의 공부에 치중하여, 일을 하자면 공부를 못하고, 공부를 하자면 일을 못한다고 생각하는 전래의 공부법에 대한 비판적 대안이기도 하다. 동정은 몸과 마음 작용에 대한 양면적 관점이므로 동정이 일여한 공부로, 공부를 잘하므로 일이 잘되고 일을 잘하면 공부가 잘되어 동정간에 삼대력을 얻게 해야 완전한 공부법이다.

“과거 도가(道家)에서 공부하는 것을 보면 정할 때 공부에만 편중하여 일을 하자면 공부를 못하고 공부를 하자면 일을 못한다 하여 또는 부모처자를 이별하고 산중에 가서 일생을 지내며 또는 비가 와서 마당의 곡식이 떠내려가도 모르고 독서만 했나니, 이 어찌 원만한 공부법이라 하리요”라 했으니, 이것이 곧 소태산대종사가 밝힌 과거 도가의 공부법과 구분되는 입장이다. 이에 대한 새로운 공부의 대안으로 소태산은 “우리는 공부와 일을 둘로 보지 아니하고 공부를 잘하면 일이 잘 되고 일을 잘하면 공부가 잘되어 동과 정 두 사이에 계속적으로 삼대력 얻는 법을 말했나니 그대들은 이 동과 정에 간단이 없는 큰 공부에 힘쓸지어다”(《대종경》 수행품3)라고 했다.(원불교대사전)

영육쌍전[靈肉雙全]

[개요]

영적인 삶 곧 정신의 고양을 추구하는 수도의 삶과 육신의 삶 즉 건강하고 건전한 현실 삶을 함께 온전히 완성해 가는 것을 추구하는 사상. 원불교 교리 표어 중 하나로 《원불교교전》 맨 머리에 실려 있으며, 공부(工夫)와 사업(事業)을 병행하여 복(福)과 혜(慧)를 원만하게 갖추자는 이사병행의 이념과도 상통한다.

[시대 사상적 배경]

석가모니불은 백성의 경제생활을 도와주어야 악행이 감소된다 했고, 맹자(孟子)도 의식(衣食)이 족해야 백성들이 예절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인류역사를 통해 종교 전통에서는 현실생활의 가치보다 정신적 가치를 높이는데 중점을 두었다. 근대에 이르러 이러한 전통에 대한 반성과 함께 과학의 발달이 가져온 현실 상황의 급격한 변화에 따라 종교도 변화를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칼빈주의가 근대 자본주의 형성의 직접적인 동력이었다고 말한다.

청렴한 생활을 지향하는 청교도정신을 통해 부지런히 일하며 저축하는 정신이 함양됨으로써 자본의 축적이 가능해졌다고 보았다. 그는 경제생활을 더욱 진취적이고 적극적으로 향상시켜 가는데 종교적 이념이 기여할 수 있다는데 주목한 것이다. 이는 중세 서양에서 종교 편향적 가치관으로 인해 현실 삶의 문제에 부정적인 결과를 낳은 것과는 대조된다. 한국에서도 조선 후기에 실학을 숭상하는 학자들은 조선의 통치이념이었던 성리학의 도덕적 엄숙주의의 전통을 비판했다.

실학자들은 현실생활을 정체시키는 법률 제도 등 사회규범들을 사실적으로 개선하고 농ㆍ공ㆍ상 등 실업과 의학 및 과학지식과 기술을 도입할 것을 주장했으며 실증적 고증을 통해 사실 또는 객관적 지식을 확충해가는 실사구시(實事求是)적 탐구방법을 추구하는 등 새로운 학풍을 일으켰다. 실학자 박지원(朴趾源)은 “이용(利用)이 있은 다음에 후생(厚生)이 있다. 즉 경제생활을 풍부하게 할 수 있고 경제생활을 풍부하게 한 다음에 도덕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하여 경제생활을 가볍게 알고 도덕만 강조하는 완고한 유생(儒生)들을 비판했다.

그는 경농법(耕農法)ㆍ양잠법(養蠶法)ㆍ도자기 제조술(陶滋器製造術)ㆍ야금술(冶金術) 등 청나라의 선진기술을 배워오자고 주장했다. 농부의 농사경험과 농서(農書)를 연구하여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지어 유생들이 농업발전에 무관심함을 비판하고 영농방법의 개선, 농기구의 개량, 관개수리시설의 확장을 주장했다. 이 밖에도 많은 실학자들이 현실생활을 발전적으로 이끌 수 있는 실다운 학문이 되어야 할 것을 주장했던 것은 한국역사상 새로운 각성이 시작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실학의 싹은 크게 발흥하지 못했다.

[영육쌍전 개념의 형성]

한국 근대의 격변하는 상황에서 소태산대종사는 미래 종교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했다. 영육쌍전은 그 가운데 하나로서 《정전》 수행편의 ‘영육쌍전법’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과거에는 세간생활을 하고 보면 수도인이 아니라 하므로 수도인 가운데 직업 없이 놀고먹는 폐풍이 치성하여 개인ㆍ가정ㆍ사회ㆍ국가에 해독이 많이 미쳐 왔다. 이제부터는 묵은 세상을 새 세상으로 건설하게 되므로 새 세상의 종교는 수도와 생활이 둘이 아닌 산 종교라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불조사(諸佛祖師)가 바로 전해주신 심인(心印)인 법신불 일원상의 진리와 수양 연구 취사의 삼학(三學)으로써 의ㆍ식ㆍ주를 얻고 의ㆍ식ㆍ주 와 삼학으로써 그 진리를 얻어서 영육(靈肉)을 쌍전(雙全)하여 개인 가정 사회 국가에 도움이 되게 하자.” 이 내용에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문명의 전환점으로 인식하고 과거 수도생활에 대한 반성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방향을 찾아 볼 수 있다. 전통종교의 수행전통에서는 일정한 자력적인 경제활동이 없이 수행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는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이끌어야할 수도인들이 오히려 개인과 사회에 해독을 끼치는 원인이 되었다. 이제 묵은 세상이 새 세상으로 바뀌는 전환의 시기이므로 새 세상의 종교는 수도와 생활이 둘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소태산은 ‘산 종교’라고 명명하고 있다. 수도와 현실의 삶이 유리되지 않아서 건강한 현실 삶 속에서 수도의 결실이 맺어지고 수도를 통해 얻어진 체험과 지혜가 현실적 삶에서 실현됨으로써 모두가 도움이 되는 생활을 영위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수도와 생활을 아울러 온전하게 하는 삶을 성취하는 것이다.

인간생활에서 정신생활과 육신생활은 서로 떠날 수 없는 연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정신을 존중하는 종교인들은 물질생활의 향상을 소홀히 생각하거나 나아가 이것이 수도에 장애가 된다고 보기도 했다. 정신의 숭고성만을 강조하고 물질생활에 대한 이해와 개발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빈곤과 질병으로 인해 발전이 정체되는 뒤떨어진 사회가 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우나 정신이 건전하지 못하면 인간성이 파괴되어 온전한 삶이 되기 어렵다. 영육쌍전은 영에 치우친 전통적 종교의 편향적 경향, 또는 육에 치우친 세속주의적 삶을 떠나 영과 육이 건강하게 상보적인 온전한 삶을 지향한다.

[영육쌍전의 의미]

영육쌍전의 개념은 대체로 세 가지의 함의를 지닌다.

① 수행상에서의 정신과 육신의 조화로운 완성을 지향하는 것이다. 가장 기본적 수행법인 좌선의 방법으로 소태산은 단전주선법을 제시했다. “좌선이라 함은 마음에 있어 망념을 쉬고 진성(眞性)을 나타내는 공부이며, 몸에 있어 화기를 내리게 하고 수기를 오르게 하는 방법이니, 망념이 쉰즉 수기가 오르고 수기가 오른즉 망념이 쉬어서 몸과 마음이 한결같으며 정신과 기운이 상쾌하리라”(《정전》 좌선법). 단전주선법은 마음에서 참된 본성을 찾고 몸에서 수승화강으로 기운을 조화롭게 하는 선법이다. 단전주는 선 자체를 위해서 뿐 아니라 위생상으로도 극히 긴요한 법이다.

“마음을 단전에 주하고 옥지(玉池)에서 나는 물을 많이 삼켜 내리면 수화가 잘 조화되어 몸에 병고가 감소되고 얼굴이 윤활해지며 원기가 충실해지고 심단(心丹)이 되어 능히 수명을 안보하나니, 이 법은 선정(禪定)상으로나 위생상으로나 실로 일거양득하는 법”이라고 한다. 이 선법을 오래 수행하면 “필경 물아(物我)의 구분을 잊고 시간과 처소를 잊고 오직 원적 무별한 진경에 그쳐서 다시없는 심락(心樂)을 누리게 되리라”고 한다. 마음에서 참된 본성을 회복하며 몸의 기운이 조화로워 원기가 충실해지고 심단이 되어 원적무별한 진경에서 심락을 누림을 지향하는 수행이다.

소태산은 불교에 연원을 두고 있으나 당시 한국 불교 수행의 핵심인 간화선에 대해서는 비판적 견해를 보인다. ‘화두(話頭)만 오래 계속하면 기운이 올라 병을 얻기가 쉽고 또한 화두에 근본적으로 의심이 걸리지 않는 사람은 선에 취미를 잘 얻지 못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화두수행 방법에 대한 반성과 기운의 부조화에 대한 문제를 동시에 제기하고 있다. 단전주선법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여 몸과 마음이 조화롭게 상보적으로 작용하며 온전히 완성되는 성취를 기대했다.

동시에 몸의 건실한 유지를 중시했다. 소태산은 자신의 수행과정을 돌아보고 “나의 길 얻지 못할 때의 헛된 고행을 증거하여 몸을 상하는 폐단이 없게 하라”(《대종경》 수행품47)고 부촉한 바 있다. 육신의 건강을 지키면서 종교수행을 하는 것이 대승수행(大乘修行)임을 강조한다. 또한 몸은 수행하고 보은하는 근본이다. 제자 가운데 신(信)을 바치는 뜻으로 손을 끊은 사람을 보고 소태산은 크게 꾸짖고 ‘몸은 공부와 사업을 하는 데 없지 못할 자본’이라고 강조했다. 영육쌍전은 영(靈)과 육(肉)이 조화로운 건강한 수행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② 수도생활과 현실생활의 원만한 조화이다. 소태산은 불법을 천하의 큰 도라고 하고 불교에 연원을 정했다. 그러나 당시 불법이 현실 삶에서 유리되고 있는 상황을 직시했다. 불법으로 생활하고 불법이 현실생활에서 실현되어 누구나 사람으로서 정당한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 이러한 책임을 회피하고 수도만 일삼는 것은 건강한 삶이 될 수 없으며 도리어 개인 가정 사회 국가에 해독을 끼치는 종교인이 될 수도 있다. 소태산은 대각 후 첫 행보로 가난하고 각성이 부족한 주변 사람들과 함께 삶의 희망을 찾고 생활의 질서를 세워가는 길을 모색했다.

이에 그들과 함께 저축조합 운동을 시작했는데 이는 영적인 구제와 현실생활을 병행하는 활동, 곧 영육쌍전의 새 삶 운동이었다. 이후에도 저축조합 운동에서 시작된 영육쌍전의 노력은 초기 교단사에서 간석지를 개간하고 법인기도를 올리는 활동으로 이어졌다. 그 후 익산총부 건설당시에도 엿 장사와 농축산과 양잠 개간사업을 일으켰고 한약업 등의 사업을 전개하며 주경야독의 전통을 이어갔다. 소태산은 현실 삶을 영위해나가는데 필요한 물질적 요소들을 의ㆍ식ㆍ주로 표현하고 정신의 의식주에 해당하는 수행과 병행할 것을 강조했다. 곧 불법으로 생활하고 생활에서 불법을 실현하여 정신적 성취와 풍요로운 생활의 영위를 조화롭게 이루고자했다.

“육신의 의ㆍ식ㆍ주가 필요하다면 육신 생활을 지배하는 정신에 일심과 알음알이와 실행의 힘은 더 필요할 것이 아닌가. 정신에 이 세 가지 힘이 양성되어야 그에 따라 의ㆍ식ㆍ주가 잘 얻어질 것이요, 이것으로 그 사람의 원만한 인격도 이루어질 것이며, 각자의 마음 근본을 알고 그 마음을 마음대로 쓰게 되어야 의ㆍ식ㆍ주를 얻는 데에도 정당한 도가 실천될 것이며, 생ㆍ로ㆍ병ㆍ사를 해탈하여 영생의 길을 얻고 인과의 이치를 알아 혜복을 구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또한 참답고 영원한 의ㆍ식ㆍ주 해결의 길이라, 그러므로 정신의 삼강령이 곧 의ㆍ식ㆍ주 삼건의 근본이 된다 하노라”(《대종경》 교의품19).

영육쌍전의 이념을 주창한다고 하여 물질생활과 정신생활의 가치를 동일시하는 것은 아니나 수도 생활을 추구하고 실현하는 노력이 현실의 물질생활을 바르게 이끌어감으로서 현실 생활 속에서 진리가 실현될 수 있게 하자는 데에 본뜻이 있다.

③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의 병진이다. 정신적 고양을 추구하는 정신문명이 과학적 지식과 기술의 발전을 주체적으로 이끌어 정신문명과 과학문명이 겸전한 참 문명세계를 건설하려는 사상이 영육쌍전 정신의 확대된 의미이다. 물질문명으로 대표되는 모든 현실의 문명은 바른 정신으로 구하고 바른 정신으로 사용될 수 있을 때 그 참 의미를 드러낼 수 있다. “안으로 정신문명을 촉진하며 도학을 발전시키고 밖으로 물질문명을 촉진하여 과학을 발전시켜야 영육이 쌍전하고 내외가 겸전하여 결함 없는 세상이 되리라.

그러나 만일 현대와 같이 물질문명에만 치우치고 정신문명을 등한시한다면 마치 철모르는 어린 아이에게 칼을 들려준 것과 같아서 어느 날 어느 때에 무슨 화를 당할지 모를 것이니 이는 육신은 완전하나 정신에 병이 든 불구자와 같고 정신문명만 되고 물질문명이 없는 세상은 정신은 완전하나 육신에 병이 든 불구자와 같나니 그 하나가 충실하지 못하고 어찌 완전한 세상이라 할 수 있으리요. 그러므로 내외문명이 병진되는 시대라야 비로소 결함 없는 평화 안락한 세계가 될 것 이니라”(《대종경》 교의품31)고 했다. 진리추구와 도덕 정신에 바탕하여 과학 지식과 기술을 생활에 도입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의 어느 한편이 충족되지 않으면 완전한 사회가 될 수 없다. 또한 도덕정신이나 종교정신에 의한 목표를 갖지 않은 과학기술은 도리어 인류의 행복에 위협이 된다. 따라서 온전한 정신문명 곧 도학이 건강한 과학문명을 이끌 수 있을 때 참 문명세계가 이루어질 수 있다. 영육쌍전에 포함된 내용은 세 측면에서 집약해 볼 수 있다. 몸과 마음을 조화롭게 수행하는 수도생활, 의식주 등의 현실생활과 종교적 수도 생활의 겸행, 물질문명을 이끄는 과학과 정신문명을 이끄는 도학의 겸전을 통해 이상적 문명사회를 이룩하는 것 등이다. 이는 개인에서부터 사회ㆍ문명에 이르기까지 그 외연이 확충되는 포괄적 이념이라 할 수 있다.(원불교대사전)

이사병행[理事並行]

[개요]

이치와 일을 아울러 수행하자는 것으로 이 표어는 《원불교교전》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처처불상 사사불공, 무시선 무처선, 동정일여 영육쌍전, 불법시생활 생활시불법 등의 교리표어의 뜻을 종합해서 표현한 개념이다.

[내용과 의미]

《대종경》에는 “큰 도는 원융하여 유와 무가 둘이 아니요, 이와 사가 둘이 아니며, 생과 사가 둘이 아니요. 동과 정이 둘이 아니니 둘 아닌 이 문에는 포함하지 아니 한 바가 없나니라”(《대종경》 성리품4)고 하여 원래 대도에는 이와 사가 둘이 아니요, 하나임을 명시했다. 이사병행에는 몇 가지 의미가 복합되어 있다.

첫째, 이는 공부를, 사는 사업을 의미한다. 공부는 주로 자신의 인격완성을 위한 구도의 노력을 의미한다면 사업은 이타적 행위, 사회와 교단과 세계를 위해 헌신하는 활동을 말한다. 이사병행은 공부심으로 사업을 하고 사업 속에서 공부를 찾아 동정간에 공부심을 놓지 않고 닦아 나가는 수행법으로 공부(工夫)와 사업(事業)을 병행하여 복(福)과 혜(慧)를 갖추자는 것이다. 공부는 지혜를 밝히는 것, 사업은 복덕을 쌓는 것에 역점이 있으므로 혜복쌍수의 뜻이 된다.

참 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공부와 사업의 어느 한 쪽에 치우쳐서는 안 되며 공부와 사업을 병행해야 하는 것이다. 전통 불교의 현상가운데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으로 나누어져 갈등을 일으킨 일이 있다. 이판은 고요한 가운데 수행에 매진하고 사판은 사원의 경영에 주력했으나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소태산대종사는 각 수행자가 공부와 사업을 병행하여야 혜복을 겸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교단제도에 있어서도 이사 양면을 두루 밝히고 교도의 원성적을 사정하는 것까지라도 공부등위와 사업등급을 합하여 정하도록 했다.

둘째, 이는 도학, 또는 정신문명을 의미하며 사란 과학, 또는 물질문명을 의미한다. 이사병행은 도학과 과학, 정신문명과 과학문명이 아울러 건전하게 발달하도록 하는 개교이념을 의미한다. 도학은 정신개벽의 길이요, 과학은 물질개벽의 길이다. 정신개벽과 물질개벽이 아울러서 이루어져야 마음낙원과 현실낙원의 이상적 낙원세계가 건설되는 것이다.

문명의 흐름을 살펴보면 정신문명을 고수하기 위해 과학문명에 등한한 감이 있었고, 현대에는 과학적 문명에 열중하는 가운데 정신문명에 등한한 경향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사상적으로 서로 이해와 융통이 없이 막히어 있었고 또 일방적으로 추구한 나머지 사람들은 정신과 육신에 균형을 유지하지 못했으며 세상은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여 우환과 고통을 면할 수 없었다. 소태산대종사는 이러한 큰 모순을 바로잡기 위해 이사(理事)가 둘이 아닌 원만한 대도를 드러내려고 한 것이다.

셋째, 개인의 생활에 있어 이는 수양ㆍ연구ㆍ취사의 삼학공부를 의미한다면 사는 의식주 등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노력을 의미한다. 이사병행이란 수양ㆍ연구ㆍ취사의 삼대력 증진과 의ㆍ식ㆍ주생활의 풍요를 함께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영육쌍전이라는 이념과 합치되는 의미이다. 삼학공부에 매진하여 삼대력을 얻었다 할지라도 의ㆍ식ㆍ주의 해결 없이는 행복한 삶이 되기 어려운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의ㆍ식ㆍ주의 생활이 풍요하다 할지라도 삼대력을 얻지 못하면 가치 있는 삶이 되기 어려운 것이다.

이 두 가지를 병행하여 수도와 생활이 조화롭게 이루어지도록 하자는 것이다. “새 세상의 종교는 수도와 생활이 둘이 아닌 산 종교라야 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제불조사 정전의 심인인 법신불 일원상의 진리와 수양ㆍ연구ㆍ취사의 삼학으로써 의ㆍ식ㆍ주를 얻고 의ㆍ식ㆍ주와 삼학으로써 그 진리를 얻어서 영육을 쌍전하여 개인ㆍ가정ㆍ사회ㆍ국가에 도움이 되게 하자는 것이니라”(《정전》 영육쌍전법).

넷째, 이는 대소유무의 이치, 곧 자연의 이법을 의미한다면 사는 인간사의 시비이해를 의미한다. 이사병행은 대소유무의 이치를 바르게 깨치고, 시비이해의 일을 정당하게 건설하여, 개인적으로는 이상적 인격을 이루는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이상세계를 건설하자는 뜻이다.

대소유무의 이치를 바르게 깨친다는 것은 정각(正覺)을 의미하고, 시비이해의 일을 정당하게 건설한다는 것은 정행(正行)을 의미한다. 정각 없는 정행은 있을 수 없고 정행 없는 정각은 무의미한 것이다. 이사병행의 수행을 정성껏 계속하면 누구나 궁극적으로 이치에도 걸림이 없고(理無碍) 일에도 걸림이 없는(事無碍) 큰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사병행은 이론과 실천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실천이 없는 이론은 공리공론에 떨어지기 쉽고, 이론 없는 실천은 방향 감각을 상실하기 쉽다. 이론과 실천의 일치라야 가치 있는 이론, 정당한 실천이 되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는 지행일치ㆍ각행일치의 뜻이 된다. 대소유무의 이치, 곧 자연의 이법의 증득이 바로 시비이해로 이루어진 인간사 건설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주체적인 통찰이 필요하다. 이에 소태산은 그 어려움을 이렇게 말한다. “우주의 진리를 잡아 인간의 육근동작에 둘러씌워 활용하는 사람이 곧 천인이요 성인이요 부처이다”(《대종경》 불지품12). 소태산은 이사병행의 이념에 바탕하여 제자들의 수행을 지도하고 교단창립에도 진력했다. 길룡리 간석지의 방언을 시작할 때 소태산은 이를 감역하며 이사병행의 방향을 명확히 했다.

“우리가 건설할 회상은 과거에도 보지 못했고 미래에도 보기 어려운 큰 회상이라 그러한 회상을 건설하자면 그 법을 제정할 때에 도학과 과학이 병진하여 참문명세계가 열리게 하며 동과 정이 골라 맞아서 공부와 사업이 병진되게 하고 모든 교법을 두루 통합하여 한 덩어리 한 집안을 만들어 서로 넘나들고 화하게 하여야 하므로 자연 이렇게 일이 많도다”(《대종경》 서품8).(원불교대사전)

[동정일여로 삼대력 배양]

崇山 朴光田(원광대 학장)

우리가 공부를 한다는 것은 일상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 즉 사람이 사람노릇을 잘하고 인류사회가 더욱 발전되어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과거의 공부법을 보면 정(靜)하고 무사(無事)해야만 하고 일체를 불시(不視)해야만 하였기 때문에 공부한 보람을 나타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학교를 일평생 책만 가지고 다니기만 하면 그 사람 정신이 정상이 아니라고 할 것이며 그물을 만드는 것은 그 그물로 물고기를 잡으려고 하는 것인데 일평생 그물을 만들어 놓고 활용하지 아니한다면 그 역시 무의미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공부를 반드시 해야하지만 전 인류가 다같이 마음공부를 그러한 식으로 한다면 개인이나 국가, 사회, 민족의 생활은 파멸되고 말 것입니다.

수양을 한다는 것도 우리 마음 가운데 부정한 마음을 뽑아서 선량한 마음을 기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양을 한갓 안정만 하고 의욕이 없는 것으로 오인한다면 큰 잘못입니다.

진정한 공부란 인생이 꼭 해야할 보람있는 일에 의욕이 있어야 참으로 산 공부입니다. 의욕이 없다는 것은 아편을 먹고 몽롱해 있다던가 술에 취하여 천하가 태평하다던가 하는 상태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러므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의욕상실증을 수양으로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생업을 중요시하지 아니하고 무욕담백(無慾談白)하는 척하는 사람은 세상에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 사람입니다. 욕심에 급급한 사람보다는 나은 듯 하지만 역시 풍채적 인물이라고 어떤 사람이 말했는데 실제에 있어서는 아무 소용없는 사람입니다.

푸로지노스는 위대한 신비가이지만 대실업가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단지 자기사사의 것으로 하지 않고 공중에 바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사유를 만들지 아니하는 것이 도인이라 하여 일체의 실업을 버리고 도인연(道人然)한 것은 능력 없는 사이비 도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일을 피하고 사업을 피하는 것은 진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소은(小隱)은 은어능수(隱於能藪)하고 대은(大隱)은 은어조시(隱於朝市)라고 노자는 말했는데 우리는 일을 피하는 것을 공부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 마음을 산수에 소요시키도록 해야합니다. 물욕 세상에 살면서 물욕을 초월하는 심경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수차(水車)가 반은 물 속에 반은 물밖에 있어야 그 능력을 발휘하고 수차의 의미가 있는 것이지 만일 물 속에 아주 잠겨버린다던가 아주 밖으로 전체가 나와 버린다든지 하면 수차의 의미는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차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일과 공부를 별도로 보지 말고 정할 때 얻은 공부력을 가지고 동할 때 일을 잘해야 하며, 또 그 일을 할 때 수양, 연구, 취사의 삼대력을 얻도록 하여 공부력도 주야 24시를 통해서 진보되어 나가면 일도 잘되고 공부도 잘되어서 자기와 국가사회 전체가 자꾸 발전할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마음공부하는 의의가 있는 것이며 참으로 산 마음공부라 하겠습니다.

과거의 공부법은 일을 도외시했고 보통 세속생활에 급급한 사람은 정신없이 물욕에 끌려서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물욕 세상에 빠져 사는 생활을 하지 말고 마음공부를 힘써 하는 동정일여의 공부법으로 단련해야 하며 마음공부 한다 하여 육신생활을 무시하는 사상을 버리고 영육쌍전의 여념 없는 생활을 하는데 힘써야 되겠습니다.

[동정간에 끊임없는 큰 공부]

<영산선학대학교 / 장원경교무>

이 장은 공부와 일을 하나로 생각하여 공부를 잘하면 일이 잘되고 일을 잘하면 공부가 잘 되어, 동과 정 두사이에 계속적으로 계정혜 삼대력을 얻도록 하신 말씀이다.

원불교에 입문하면 공부라는 말을 많이 접한다. 공부는 마음공부로서 진리를 배우고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불교에서 공부는 품을 들이고 공을 들여 노력한다는 뜻인데 그 노력은 수양력, 연구력, 취사력을 얻기 위한 노력이다.

간단한 일을 하려 해도 3가지 힘을 다 모아야 원만히 해결되는데 과거 불교나 도교공부는 정(靜)공부에 편중하여 생활에 유익을 주지 못하였다.

원불교의 교법은 과거 유교, 도교, 불교의 교법과 달리 생활불교를 표방하여 공부와 사업, 동과 정을 아우른 원만한 대도다. 불법과 생활, 영과 육, 이와 사 등 인간의 삶의 전반에 걸쳐 회통과 조화를 강조하고 있다.

옛말에'가승(假僧)은 입산(入山)하고 진승(眞僧)은 하야(下野)한다'는 말이 있다. 말법시대가 되면, 가짜 중은 산속으로 들어가 수행 정진하는 척하고, 진짜 중은 시끄러운 속세로 나와서 중생제도에 노력한다는 말이다.

불교는 오랫동안 경치좋고 조용한 산속에 자리잡아 세상 경계를 멀리하고 청정하게 수행 정진해 왔다. 조용한 것을 찾고 일을 피하고 두려워 하는 것 역시 가승(假僧)이다. 또 과거 유교에서는 비가 와서 곡식이 떠내려가도 독서만 했다.

불법과 생활이 별개로 운영된다면 이중적 생할로 가식적인 종교인이 되고 생활에 곤란이 많을 것이다.

대종사께서는 일제 강점기의 궁촌벽지 영광 길용리에서 회상창립의 뚜렷한 목적을 세우고 어려운 현실을 극복해가는 살림살이를 구상하게 되었다.

허무맹랑한 공상이나 이념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고 그 실현 방법을 직접 지도하여 그 속에서 삶의 질을 향상하는 구체적 방법으로 낮에는 마을사람들에게 금주 금연, 공동출역, 보은미 저축등으로 실천의 힘을 지도하여 생활에 실질적인 변화를 주었고 밤에는 공부를 지도하여 생활종교로 발전하는 밑거름이 되게 하였다.

영산에서 수학하는 예비교무들은 종교적 품성과 사회적 능력을 아울러 닦아 세계 원불교를 선도할 수 있는 멀티형 교화 인재가 되기 위해 오늘도 도학 과학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