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경(大宗經)/제3 수행품(修行品)

제3 수행품(修行品) 26장

원재(Aid Perfection) 2014. 10. 3. 12:57

대종(大宗經)

3 수행(行品) 26

대종사 봉래정사(蓬萊精舍)에 계시사 등잔 불을 가리키시며 말씀하시기를 [저 등잔 불이 그 광명은 사면을 다 밝히는데 어찌하여 제 밑은 저 같이 어두운고.] 김 남천(金南天)이 사뢰기를 [이는 실로 저와 같사오니, 저는 대종사의 문하에 직접 시봉하온 지 벌써 여러 해가 되었사오나 모든 일에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멀리서 내왕하는 형제들만 같지 못하나이다.] 대종사 웃으시며 다시 송 규에게 물으시니, 송 규 사뢰기를 [저 등불은 불빛이 위로 발하여 먼 곳을 밝히고 등대는 가까운데 있어서 아래를 어둡게 하오니, 이것을 비유하오면 혹 사람이 남의 허물은 잘 아나 저의 그름은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나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하면, 사람이 남의 일을 볼 때에는 아무것도 거리낌이 없으므로 그 장단과 고저를 바로 비춰 볼 수 있사오나, 제가 저를 볼 때에는 항상 나라는 상()이 가운데 있어서 그 그림자가 지혜 광명을 덮으므로 그 시비를 제대로 알지 못하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렇게 원만하지 못한 사람이 자타(自他)없이 밝히기로 하면 어찌하여야 될꼬.] 송 규 사뢰기를 [···락에 편착하지 아니하며, 마음 가운데에 모든 상을 끊어 없애면 그 아는 것이 자타가 없겠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의 말이 옳다.]

봉래정사[蓬萊精舍]

전북 부안군 변산면 실상동의 실상초당과 석두암을 통칭하여 봉래정사라 한다. 봉래정사라고 이름하는 것은 변산을 소금강(小金剛)으로 여기어 금강산의 별칭인 봉래산의 이름을 따 그 수양처를 봉래정사라 했다. 소태산대종사는 1919(원기4)부터 1924(원기9)까지 5년간 봉래정사에 머물렀다. 소태산이 하산한 뒤, 경상도에서 이주해 온 이춘풍이 산외(山外) 변산 초입인 신복리 종곡에서 산내(山內: 內邊山) 실상동으로 들어와 봉래정사를 수호하며 스스로 봉래산인(蓬萊山人)이라 칭했다. 이춘풍의 가족들이 길룡리로 이사한 뒤에 이보국이준경 등이 한때 봉래정사 수호주로서 주재하다가 이후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퇴락되어 버렸고, 1948(원기33) 오창건이 1개월간 머물며 개축공사를 하여 초가지붕을 양철지붕으로 개수했으나 한국전쟁으로 실상사 등 일대가 소실되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원불교대사전)

실상초당[實相草堂]

전북 부안 내변산 실상동에 있었던 삼간초가로 소태산대종사가 1920~1921(원기5~6)에 주석했다. 소태산은 법인성사 2차 백일기도 결제 후, 변산에 입산하여 마땅한 주처가 없어 정산종사가 상좌로 있는 월명암에 임시 몸을 의탁했다. 이 때 소태산을 찾아온 전주와 원평 제자들이 이를 민망히 여겨 자청하여 따로 집을 마련하여 시봉할 것을 간청했다. 소태산이 내장사 주지 백학명에게 하산의 뜻을 밝히자 그가 산 아래 실상동에 살 집을 주선해주었다. 마침 실상사 옆 마을에 배씨라는 사람이 살림집과 전답을 내놓았으므로 이를 매입했다.

집은 배씨의 소유이나 대지는 실상사 소유이므로, 2칸 집과 아울러 근방의 논 네마지기와 밭 경작권까지 사들였다. 개울 물길을 마당 앞으로 돌리고 초가 2칸 집에 한 칸을 더 늘려 삼간초가로 증축했다. 비용은 이만갑이 부담했다(1대유공인역사). 월명암에서 실상 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19202월이었다. 실상초당은 실상사 쪽을 바라보며 방 2칸 부엌 1간이 있었고 본채와 정면으로 마주보는 헛간 2칸이 있었다. 본채 입구 쪽에 첫 번째 방을 소태산이 사용했다.

뜰에는 영산홍, 목단, 작약, 매화 등을 심어 화단을 꾸몄다. 초당 옆에는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뒷날 날이 가물어 연못의 올챙이가 죽게 되는 예화를 가지고 설한 소태산의 법문이 나오게 된다(대종경인도품32). 1923(원기8)까지 김남천과 그의 딸 김해월이청풍 모녀가 살았으며 소태산이 하산한 이후 이춘풍이 수호주로서 그 가족인 정삼리화와 경순 경화자매가 실상초당에 살았다. 한국전쟁 때 실상동 일대가 소실되었다.(원불교대사전)

석두암[石頭庵]

전북 부안 내변산 실상동 거북바위 옆에 있었던 2간 초당. 소태산대종사가 1921(원기6) 가을부터 1923(원기8) 여름까지 주석했다. 소태산은 실상초당에 머문지 1년 반 만에 다시 새 집 하나를 마련했다. 갈수록 찾아오는 신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숙소의 부족을 느껴, 김남천송적벽이 발의하여 1921(원기6) 음력 칠월에 공사를 착수했다. 신축기지는 천왕봉 아래, 거북바위 옆에 터를 정했다. 실상초당 옆 작은 밭 다랑이를 지나 잠시 대밭 비탈을 올라서면 바로 거북바위 오른쪽이다. 개울 건너 앞산의 인장바위가 한눈에 조망된다. 여기서 선인봉 쪽으로 50보쯤 가면 몇 기의 부도가 나온다.

터의 주선과 재목 보조는 월명암 주지 백학명이, 터를 고르고 축대 쌓는 일은 송적벽이, 목수 일은 김남천, 건축 기간 중 식량과 잡비 일체를 이만갑과 구남수가 맡아 동년 음력 구월에 초당을 준공했다. 석두암 2간 초당은 흙과 짚을 잘 개어 쌓은 흙집이다. 외벽은 벽회를 발랐고 방안 천정을 만들고 벽에 도배를 했다. 2간방은 가운데 칸막이를 지르고 뒷면에 각각 벽장(다락)을 넣었다. 방문은 한식으로 세창살 여닫이 쌍문을 달았고 각방의 측면에 외문을 내었다. 방문을 열면 전면에는 조금 넓은 마루, 좌우에도 반간 정도씩 마루를 달았다.

초당 우측에 아궁이를 내어 두 방에 군불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하고 까대기를 달아내어 비바람을 막았다. 석두암 앞에 토사를 막기 위해 축대를 쌓았으며 거북바위 뒤에 큰 항아리를 하나 묻고 까대기를 쳐 뒷간으로 이용했다. 소태산은 거북바위 옆의 이 초당을 석두암이라 했다. 백학명이 검은 바탕의 목판에다가 흰 글씨로 옥호를 써 방문 위에 걸었다. 소태산 스스로 석두거사(石頭居士)’라 칭했다. 신축 2간 초당 석두암은 소태산의 거실로서 최초의 조실(祖室)이 된다. 방 하나는 석두거사의 처소, 다른 하나는 남자 제자들의 방으로 사용했다.(원불교대사전)

김남천[金南天]

본명은 성규(星奎). 법호는 각산(角山). 1869년 전주에서 태어났으며, 집짓는 일(특히 목수일)에 능했고, 태을교(증산교의 일파) 도꾼이었다. 1919(원기4) 1013(음력 820) 친구 송찬오(송적벽의 본명)와 함께 같은 날에 소태산대종사를 뵙고 제자가 되었다. 소태산이 변산 월명암을 의탁하여 지내는 것을 보고 송구히 여겨 홀로 된 딸 김혜월(金慧月), 외손녀 이청풍(李淸風)과 함께 실상초당에서 소태산을 시봉했다. 한편 둘째딸 김순풍(金順風)과 사위 박원석(朴元石)은 익산 총부기지 확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종질녀인 이청춘(李靑春)은 총부에 사재 70두락을 희사하여 총부유지 대책의 활로를 여는 등 일가가 모두 불법연구회 창립에 큰 역할을 담당하도록 했다.(원불교대사전)

백학명[白鶴鳴]

[주요약력]

본명은 낙채(樂彩). 법명은 계종(啓宗). 법호는 학명(鶴鳴). 한국 근대불교의 대표적인 고승의 한 사람. 반농반선(半農半禪)을 주장한 선사로, 월명암과 실상사에 주석하며 소태산대종사와 친교가 깊었고, 소태산과 선문답을 자주했다. 1867년 전남 영광에서 출생, 1886년 불갑사에서 출가했으며, 내소사월명암내장사 주지를 지냈다. 1988(원기73) 명예대호법으로 추서했다.

[생애와 업적]

1867년 전남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에서 부친 중수(重洙)와 모친 한양조의 4형제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어려서는 서당에 나가 공부하며 자랐으나 156세가 되면서 가세가 점점 기울자 모필(毛筆) 제조기술을 습득하여 생계를 도왔다. 20세시 부친상을 당하자 초종장례를 지낸 후 편모의 봉양을 아우들에게 맡기고 붓 장사통을 둘러메고 전국각지를 돌아다니다가 순창 구암사에서 당대의 고승 설두(雪竇)화상의 설법을 듣고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백학명은 1886년 불갑사 환송(幻松)장로의 인도로 출가하고 금화(錦華)선사에게 득도했다.

그는 189024세에 구암사를 찾아가서 내전(內典)을 수학하고 설유(雪乳)강백을 계사로 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 이후 10여 년 동안 지리산의 영원사벽송사와 조계산의 선암사송광사 등 이름 있는 선찰과 선지식을 두루 참방하면서 경론 삼장(經律論 三藏)을 널리 통달했다. 19003월 금화의 법통을 이었으니 백파(白坡)7대 법손이 되고 설두의 종손이 된다. 학명이라는 법호는 이때 받은 것이다. 그는 주로 구암운문의 두 절에서 강회를 열었으나 36세되던 1902년 가을 교편을 던지고 참선하는 곳을 찾아가 십수년간을 정진했다.

그래서 부처님과 조사들의 깨친 경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부안 내소사와 변산 월명암의 주지를 맡아 크게 선풍을 일으켰다. 특히 월명암에서는 요사와 선실을 중건 또는 신축하여 일반 선객들이 수행하는 데에 불편이 없게 했다. 10년 동안의 수행과정을 마치고 백양선원으로 와서 선실을 증축했다. 백학명은 48세되던 1914년에 중국의 사찰을 두루 살피는 1년간의 행각을 마치고 일본의 임제종 본산이었던 원각사에 들러 관장이던 석종연(釋宗演)과 아사히(朝日)신문사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도의 선문답을 했다.

해외에서 돌아와 다시 내소사와 월명암의 주지로 있으면서 월명선원을 중창했다. 이때 석두암(石頭庵)에 머물던 소태산과 선문답을 하게 된다. 백학명이 글 한 수를 지어 보내기를 하늘을 뚫는 듯한 산의 절정이여 바다에 돌아가 물결을 이룰지어다. 몸을 돌이킬 길을 알지 못하여 석두암이라는 집에 의지하고 있도다(透天山絶頂 歸海水成波 不覺回身路 石頭倚作家)”라 했다. 이에 대해 소태산은 화답하여 보내시를 절정도 천진 그대로 빼어난 것이요 큰 바다도 천진 그대로 물결인 것이다. 다시 몸 돌이킬 길을 알고 있으니 석두암의 집이 높이 드러나 있다(絶頂天眞秀 大海天眞波 復覺回身路 高露石頭家)”(대종경성리품19)라 했다.

문답의 핵심은 백학명이 소태산을 보니 큰 경륜과 포부를 가지고 중생제도를 할 사람이 오두막집에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다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소태산은 나는 이미 석두암집에서 중생 제도를 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백학명은 192957세시에 내장사 주지로 부임하여 선농일치(禪農一致)라는 기치를 내걸고 내장사 중창 불사를 일으킨다. 이때 소태산의 새 회상 창립에 대해 듣고 말하기를 내가 이미 선생(대종사)의 경영하신 바를 잘 아는지라 내가 내장사로 가게 된 원인이 선생의 취지에 동감한 바 있어 그 곳으로 가게 되었으니 불법연구회의 장소를 그곳에다 정하고 고내장(古內藏)에 선원급 강원을 설립하여 모든 학인과 선원을 양성하고 그 학인과 선원으로 하여금 선생님이 말씀하신 주작야선(晝作夜禪)영육쌍전(靈肉雙全)을 장려하여 호수를 막아 수전(水田)을 만들면 근 백 여 두락이 될 것이다.

그리고 산에는 감나무, 밤나무 몇 만주를 심어서 그 수입으로 후일 인재 양성의 기금으로 삼으면 될 것이다. 대종사 그 말씀을 들으시고 현재 이론으로는 그럴 듯하나 내장사로 말하면 개인 소유가 아니라 공유물이니 어찌 1, 2인의 생각으로 단정하리요마는 될 수만 있다면 그와 같이 주선하여 주는 것이 미래 불교계에서 서광이 될 것이라 했다”(불법연구회창건사본회의 창립). 백학명의 생각과는 달리 승려들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소태산이 변산에서 내려와 서울에 왕래하면서 백학명에게 편지를 보낸 일이 있다. 이에 대한 백학명의 답서는 다음과 같다.

깊은 산 속 오래된 절에 홀로 누워 신음하다가 생각 밖에 전해온 혜서(惠書)로 학명을 병상에서 불러일으키니 이 기쁨을 어찌하리오. 일차 상경하심에 필히 얻은 바 적지 않으리라 생각하니 부러움을 어찌하리오. 산문을 두드려 보이심은 그 말씀도 의례적인 말씀이라 듣는 사람 또한 의례적인 말씀으로 알 것이나 그러나 어찌 한 형상과 뼈가 다르듯이 수승한 일이 될 것이라 여기십니다. 자못 희유(稀有)한 심월(心月)로 비추는데 결례가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을축년 십월 백학명”(원불교역사박물관 소장). 1929327일 백학명은 효상좌인 고벽(古碧)을 불러 짚세기 네 죽과 당목 한 필을 사오게 하고 하오 2시에 권속을 모이게 한 뒤 원각경보안장을 송경케 하고 미소를 머금으며 입적했다.

백학명은 신년가〉ㆍ〈원적가〉ㆍ〈해탈곡〉ㆍ〈왕생가〉ㆍ〈참선곡〉ㆍ〈망월가백농집을 남겼다. 백학명에게 추서한 명예대호법 법훈 서훈공적은 다음과 같다. “학명선사가 변산 월명암 주지로 있을 당시 정산종사를 상좌로 받아 주어 과거 불교의 제도와 방편을 알게 했으며 실상사의 한만허 주지와 상의하여 석두암 터를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또한 대종사께 세상 구원사업을 제의하기도 하는 등 대종사의 변산 제법시 많은 후원을 했다. 대종사께서 새회상 터전을 물색할 때 승려들의 반대로 좌절되기는 했으나 내장사 일부를 사용할 것을 제의하는 등 과거 불교의 승려직분으로 새 회상 창립을 후원하고 격려한 호법 공덕이 높았다.” 1988(원기73) 9월 제124회 수위단회에서는 백학명의 호법공덕을 추모하면서 명예대호법의 법훈을 추서키로 결의했다.(원불교대사전)

[자타의 국한을 벗어나는 공부]

<장원경 교무/영산선학대학교>

수행품 26장은 등잔밑이 어두운 것 같이 내가 희로애락에 붙잡히고 상에 가리면 다른 이의 시비는 밝게 알되 자신은 바르게 보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세상의 만물은 텅 비고 고요하여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에서도 밝고 신령스럽게 나타나는 지혜의 작용 즉, 공적영지(空寂靈知)의 광명을 따라 이루어져 나타나게 되어있다.

이 광명은 빛과 어둠을 초월한 과학으로 설명될 수 없는 밝음이지만 나라는 상이 들어서 이 광명을 막으면 무명을 일으킨다.

무명은 진리를 깨치지 못해 지혜가 어두운 것을 말한다.

, 경계를 대할 때마다 마음이 요란해지고, 어리석어지고, 글러져서 무명이 생기고 온갖 악업을 짓게 된다.

불가에서는 무명에 의하여 십이인연이 일어나고 육도 윤회를 하게 된다고 밝혔다.

사람이 남의 일을 볼 때에는 아무것도 거리낌이 없으므로 그 장단과 고저를 바로 비춰 볼 수 있지만 자신을 볼 때에는 항상 나라는 상()이 가운데 있어서 그 그림자가 지혜 광명을 덮으므로 시비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하셨다.

자신을 바르게 보려면 기뻐하고, 노여워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희로애락의 감정에 과도히 끌려가지 않아야 한다.

비공부인은 모든 것이 텅 빈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과도한 편착으로 죄업을 짓고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나라는 상을 제거하고 무명을 소멸하는 공부는 자기를 키우는 공부요, 자기를 키우는 공부는 곧 타력과 합하여 진리에 밝아지고 신앙 수행심이 강해지는 공부이다.

사유의 주체가 되는 ''에 대한 상을 끊어 없애는 공부부터 철저히 하여야 그물코 풀리듯이 자기 마음의 무명이 사라지고 자기의 일체 허물이 눈 녹듯이 소멸하게 될 것이다.

자기의 마음공부를 향상시키고 자기의 선행을 확충시켜 전체적인 자기 성장을 힘써 가는 데에는 필연적인 마장이 있게 마련이다.

보통 자기를 향상시켜 가는 과정에서 한 가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은 다른 사람의 과실과 결함이 더 분명하게 보인다는 점이다.

눈은 밖을 향해 있어서인지 우리들은 흔히 남의 부족한 점과 잘못된 점을 더 잘 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일수록 그와 같은 결점이 더 많은 사람일 수 있다.

그것은 저에게 그와 같은 허물이 있기 때문에 남의 허물이 더 잘 보이는 것이다.

옛말에 '제 흉 열 가진 자 남의 흉 한 가지 본다'고 했다. 나에게 그런 허물이 없으면 안 보인다.

희로애락의 편착과 나라는 상이 없이 좋은 것은 좋은 것대로 나쁜 것은 나쁜 것대로 스승 삼는다면 자타의 국한을 마음대로 넘어선 편안한 마음의 소유자가 될 것이다.

십이인연[十二因緣]

불교의 중요한 기본 교리의 하나로 십이연기십이지연기(十二支緣起)라고도 하며, 12지 곧 12항목으로 된 연기의 원리. 중생세계의 삼세에 대한 미()의 인과를 열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 말. 과거에 지은 업에 따라서 현재의 과보를 받고, 현재의 업을 따라서 미래의 고()를 받게 되는 열두 가지 인연을 말한다. 십이인연법 또는 십이연기법(十二緣起法)이라고도 한다. 중생과 세계가 생겨나는 이치를 말한 것으로 모든 것은 인연으로부터 일어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멸한다는 뜻. 연기의 법칙은 이것이 있으면 그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그것도 없다라고 하는 이것그것의 두 개 항목에 대해서 그 두 가지가 연기관계(緣起關係)에 있다고 하는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십이연기는 다음과 같다.

무명(無明): ()의 근본이 되는 무지(無知).

(): 무지로부터 다음의 의식작용을 일으키게 되는 동작.

(): 의식작용.

명색(名色): 이름만 있고 형상이 없는 마음과, 형상이 있는 물질. 곧 사람의 몸과 마음.

육입(六入): 의의 육근(六根).

(): 육근이 사물에 접촉하는 것.

(): 경계로 부터 받아들이는 고통, 또는 즐거움의 감각.

(): 고통을 버리고 즐거움을 구하려는 마음.

(): 자기가 욕구하는 것을 취하는 것.

(): ()의 다른 이름. 다음 세상의 과보를 불러올 업.

(): 몸을 받아 세상에 태어나는 것.

노사(老死): 늙어서 죽게 되는 괴로움.

이 십이인연의 전개 순서를 무명이 있기 때문에 행이 있고, 행이 있기 때문에 식이 있고, 생이 있으면 노사가 있다고 보는 입장을 순관(順觀)이라 한다. 이와 반대로 무명이 없으면 행도 없고, 행이 없으면 식도 없고생이 없으면 노사도 없다는 것과 같이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을 역관(逆觀)이라 한다. 십이인연은 석가모니불이 대각한 내용이라고 전해오고 있고, 불교의 기본 교리의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십이인연의 내용해석에 있어서 찰나에 십이인연이 다 들어 있다는 설도 있고, 삼세에 걸쳐 십이인연이 전개된다는 설도 있다.

원시불교의 전통적인 해석은 삼세양중(三世兩重) 인과설이다. 무명과 행을 과거 2(), 명색육입수를 현재 5(), 유를 현재 3(), 로사를 미래 2()라 해서 삼세를 말하는 것이다. 정산종사는 십이연기는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다 같이 수생(受生)하는 과정이지마는 부처님은 그 이치와 노정(路程)을 알기 때문에 매하지 아니함이 다르며, 그 중에서도 현재 삼인(三因)인 애와 취와 유에 특별한 공부가 있다.

부처님은 천만 사물을 지어나갈 때에 욕심나는 마음으로 갈애(渴愛)하거나 주착하지 아니하며, 또한 갈애하고 주착하는 마음으로 취하지 아니하며, 또한 모든 업을 짓기는 하되 그 업에 주착하는 마음은 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일체 모든 업이 청정하여 윤회에 미혹되지 아니하고 윤회를 능히 초월하는 것이다”(정산종사법어경의편45)라고 하여 십이인연을 실제적으로 해석하고 있다.(원불교대사전)

마장[魔障]

어떠한 일에 마()가 끼어듦. 일의 진행을 요사스럽게 가로막음. 소태산대종사는 마장에 관하여 큰 공부를 방해하는 두 마장(魔障)이 있나니, 하나는 제 근기를 스스로 무시하고 자포자기하여 향상을 끊음이요, 둘은 작은 지견에 스스로 만족하고 자존자대하여 향상을 끊음이니, 이 두 마장을 벗어나지 못하고는 큰 공부를 이루지 못하나니라”(대종경요훈품11)고 하여 마음공부 곧 수도를 방해하는 번뇌(煩惱)가 마장이라고 본다.(원불교대사전)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