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경(大宗經)/제3 수행품(修行品)

제3 수행품(修行品) 11장

원재(Aid Perfection) 2014. 10. 1. 22:23

대종경(大宗經)

3 수행품(修行品) 11

회화(會話) 시간에 전 음광(全飮光)이 공부인과 비공부인의 다른 점이란 문제로 말하는 가운데 [이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들도 어떠한 경우에 이르고 보면 또한 다 삼학을 이용하게 되나, 그들은 그 때 그 일만 지내 가면 방심이요 관심이 없기 때문에 평생을 지내도 공부상 아무 진보가 없지마는, 우리 공부인은 때의 동·정과 일의 유·무를 헤아릴 것 없이 이 삼학을 공부로 계속하는 까닭에 법대로 꾸준히만 계속한다면 반드시 큰 인격을 완성할 것이라.] 하는지라, 대종사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음광의 말이 뜻이 있으나 내 이제 더욱 자상한 말로 그 점을 밝혀주리라. 가령, 여기에 세 사람이 모여 앉았는데 한 사람은 기계의 연구를 하고 있으며, 한 사람은 좌선을 하고 있으며, 한 사람은 그저 무료히 앉아 있다 하면, 외면으로 보아 그들이 앉아 있는 모양은 별로 다를 것이 없으나, 오랜 시일을 계속한 후에는 각각 큰 차이가 나타나게 될 것이니, 기계 연구를 한 사람은 어떠한 발명이 나타날 것이요, 좌선에 힘쓴 사람은 정신에 정력을 얻을 것이요, 무료 도일(無聊度日)한 사람은 아무 성과가 없을지라, 이와 같이 무엇이나 그 하는 것을 쉬지 않은 결과는 큰 차이가 있나니라. 또는, 내가 어려서 얼맛동안 같이 글 배운 사람 하나가 있는데, 그는 공부에는 뜻이 적고 광대 소리 하기를 즐겨하여 책을 펴 놓고도 그 소리, 길을 가면서도 그 소리이더니 마침내 백발이 성성하도록 그 소리를 놓지 못하고 숨은 명창 노릇하는 것을 연전(年前)에 보았고, 나는 또 어렸을 때부터 우연히 진리 방면에 취미를 가지기 시작하여 독서에는 별로 정성이 적고, 밤낮으로 생각하는 바가 현묘한 그 이치이어서 이로 인하여 침식을 다 잊고 명상에 잠긴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으며, 그로부터 계속되는 정성이 조금도 쉬지 않은 결과 드디어 이날까지 진리 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이것을 두고 볼지라도 사람의 일생에 그 방향의 선택이 제일 중요한 것이며, 이미 방향을 정하여 옳은 데에 입각한 이상에는 사심 없이 그 목적하는 바에 노력을 계속하는 것이 바로 성공의 기초가 되나니라.]

전음광[全飮光]

[주요약력]

본명은 세권(世權). 법호는 혜산(惠山). 법훈은 대봉도. 불법연구회 연구부장, 교무부장, 서무부장, 서정원장, 수위단원을 역임했다.

[생애와 활동]

전음광은 1909617일 전북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에서 부친 영규(永奎)와 모친 전삼삼(田參參)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평지리에서 쌀 5백석을 추수하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전음광은 성격이 활달했으며 두뇌가 치밀하고 명석하여 매사에 준비함이 철저했다. 일찍이 한문공부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1세 되던 해 16세인 권동화(東陀圓權動華)와 결혼했다. 전음광이 소태산대종사를 처음 뵌 것은 1923(원기8) 1월 모친을 따라 진안 만덕산에 갔을 때였다. 그 후 전주로 이사하여 전주공립보통학교를 다니던 중 두 번째로 소태산을 뵙게 되었으며, 마음에 느낀 바 있어 학교를 중퇴하고 전무출신이 되어 소태산을 모시고 다니기로 했다.

모친의 연원으로 입교한 전음광은 소태산을 시봉하며 익산총부 건설에 정성을 다해 조력했다. 모친의 소태산에 대한 신심은 마령에서 전주로, 전주에서 다시 익산총부로 이사하기에 이르렀다. 모친은 소태산의 식사를 전담했고 전음광은 회화강연상시일기감각감상심신작용처리건을 소태산에게서 직접 지도받았다. 1926(원기11) 서무부서기로 임명되어 교무사무를 아울러 5년간 근무했다. 그리고 청년단을 만들어 일반 청년들의 체육음악 등 연예지도를 담당했다.

1932(원기17)부터 3년간은 연구부장과 교무부장을 지냈고 다시 2년간 교무부장을 맡으면서 총부구내에 야학원을 만들어 100여명의 아동을 교육시키기도 했다. “지금 우리 교세는 미약하다. 그러나 원대한 계획과 이상과 포부는 어디에도 지지 않는다는 긍지와 신념으로 신성을 키웠다. 소금에 절인 아카시아 밥도 달게 먹었고, 소태산의 교법이 전 세계 인류의 무상묘법임을 확신하며 미래 세상의 정신적 주인이 될 뜻을 확고히 했다. 전음광은 또한 명쾌한 웅변가였다. 엄격한 형식에 매인 종교인이기보다는 활달하며 정이 있고 멋이 있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소태산과 최초로 은부자(恩父子)의 결의를 맺고 가까이서 시봉을 하며 지도를 받았으며, 소태산의 꾸중과 칭찬을 누구보다도 많이 받으며 인격을 도야했다. 어느 날 회화에서 공부인과 비공부인의 차이점을 감상 발표하여 대중의 칭찬을 받기도 했다(대종경수행품11). 전음광은 교단의 많은 사진을 남긴 카메라맨이기도 했다. 사진사를 직접 집으로 초청하여 1개월간 실지 실습하며, 벽장을 암실로 만들어 필름현상을 할 만큼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다. 그뿐 아니라 교단기관지 발행을 외친 시대감각과 비전을 가진 선각자였다.

1929(원기14) 7월말통신17호에 기고한 회설에서 기관지는 그 사회나 단체의 호흡이다. 시대에 적응한 문물과 사조를 때때로 주입하여 잠자는 자로 하여금 일어나게 하고 게으른 자로 하여금 근면하게 하여 그 사회 그 단체의 생명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기관지는 난산한 시대사조를 레일 위로 이끌어가는 기관차라고 했다. 회보발행의 필요에 대하여는 본교의 힘줄과 피를 잘 활동하게 하는 촉매체로 보고 있다.

전음광의 열정적인 외침으로 1928(원기13) 5월에 월말통신창간호가 복사판으로 나왔고, 다시 월보, 회보로 이름을 달리하여 마침내 원광으로 되기까지 전음광의 열과 성이 밑받침이 된 것이다. 전음광은 공익사업에도 눈을 돌렸다. 현대는 공익사업을 전개하는 종교를 요구하고 있음을 알아 월말통신회설을 통해 주장하는 등 교단의 제반문제를 드러내 논리 정연한 문장으로 소태산의 높은 이상과 포부를 대변했다. 어린이 교육을 위한 유아양성소 설치며 유치원 설립, 우리 교법으로 지도할 수 있는 학교 설립, 양로원 개설, 병원 설립, 남자 교역자생활까지 여러 문제와 그 해결방책을 제시했다.

일정(日政)말기 교단이 어려운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전음광은 일본 경찰과 접촉하여 침착하고도 능란한 말과 글로 그들을 감화시켰다. 이렇게 전음광은 소태산과 교단을 위해 스스로 고난의 길을 걸어온 공심가였다. 전음광은 광복 이후 교직을 놓고 휴양하다가 1960(원기45) 72152세를 일기로 열반했으며, 장녀 팔근이 전무출신했다. 1985(원기70) 3월 제103회 수위단회에서는 전음광의 공적을 기려 대봉도의 법훈을 추서키로 결의했다.

[사상]

전음광은 활발한 집필활동을 통해 1928(원기13)부터 1940(원기25)까지 12년 동안 월말통신, 월보, 회보의 권두 회설95편중 83편을 집필했다. 그 중에 몇 편의 회설을 통해 전음광의 사상을 살펴볼 수 있다.

대업을 완성토록 용맹 매진하라.

본회(불법연구회)14년의 역사를 가지고 경성, 부안, 영광(영산) 등지에 몇 개의 기초를 정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들은 이때에 있어 환희만 할 것도 아니요, 자만할 것도 아니요, 더 한층 용맹매진의 분투력을 발하여야만 창립자인 우리의 떳떳한 의무라 할 것이다.모든 동지여 서양의 예수는 3년의 전도(傳道)로 동서의 종교계에 패권을 장악했나니 이는 예수의 법을 믿고 활동한 신도들의 악전고투한 결과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종사주(대종사)의 다년간 설법이 계셨고 그 법을 운용할 기관이 대체로 구성이 되었으니 우리의 결심이 굳고 능력이 있다면 우리의 교리와 우리의 사업이 서양인에게 뒤지지 않을 것이다. 법을 내심은 종사주(대종사)에게 있고 그 법을 널리 확장할 의무는 우리에게 있나니 우리는 이 의무를 철저히 지켜야 할 것이다”(월말통신12).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사람의 정신은 하나라 하겠지만 그 정신을 운용하는 방면에 따라서 기술적 정신과 도덕적 정신의 양 방면으로 구분할 수가 있다. 현대 사람들은 모든 물질을 발명하고 제도하는 기술적 정신은 한량없이 개벽되어가고 있으나 그 물질을 구하고 사용하는 도덕적 정신은 아직도 개벽되지 못했으므로 이 구하는 정신과 사용하는 정신을 개벽시키자는 것이다.현대는 진기한 물질이 발명될수록 그 발달된 기술과 무기를 이용하여 범죄자는 나날이 증가하며 인류생활은 잔혹한 비극을 연출하고 있다. 이것은 그 발명된 물질을 자기의 이욕을 얻고자 하는 데 사용하는 까닭으로 그 물질을 사용하는 정신이 개벽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용하는 정신을 개벽시키자는 것은 정당한 교법으로 사람을 교화하여 불의는 죽어도 행치 아니하고 정의는 죽어도 행하는 실행공부를 시켜서 불의한 곳에는 그 물질을 사용치 않게 하고 아무리 어렵더라도 저 사람도 이롭고 나도 이로운 자리이타의 곳에만 그 물질을 사용하도록 정신을 개벽하자는 것이다. 그리한다면 물질문명이 인류생활에 참으로 필요한 것이 될 것이다.”(원불교대사전)

현묘(玄妙)

진리가 한없이 넓고 깊어 헤아릴 수 없이 미묘한 것.

도리나 기예같은 것이 깊숙하고 헤아릴 수 없이 미묘한 것.(원불교 용어사전)

공부인의 삼학 공부 정성

<장원경 교무/ 영산선학대학교>

이 장은 공부인이 사심없이 목적한 바를 향해 노력을 계속하면 성공한다는 것으로 전음광 선진의 공부인과 비공부인의 차이점이라는 회화를 보충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의 삼학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무슨 일이든지 성공하고 싶은 사람들은 결국 삼학으로 마음을 안정해야 일이 잘된다.

지혜롭게 판단해야 실패가 없고 옳지 못한 일을 하면 구속이 따르니 법에 맞게 하려고 할 것이다.

하물며 공부하는 사람이 삼학에 정성을 들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 인생의 성공의 시크릿은 바로 삼학 정성이다. 사람의 일생에 있어서 어떤 방향으로 공을 들이느냐에 따라 그 인생의 질이 결정되고, 옳은 방향을 잡아 나아가더라도 얼마나 오랫동안 공을 들이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결정된다.

기계를 연구한 사람은 발명품을 얻고 좌선에 힘쓴 사람은 정력(定力)을 얻는 법이다.

소태산대종사는 진리에 취미를 갖고 정성이 쉬지 않았다.

20여년의 간절한 구도 끝에 대각을 이루었고 고해에서 헤매이는 일체 중생들을 낙원으로 인도하려는 큰서원을 세계에 펼쳐 놓으셨다.

봄기운이 생생약동하는 요즘, 은생지요 법생지인 이곳 영산은 진리를 찾고 대종사님을 닮으려는 국내외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영산을 찾은 순례객들이 자신의 가정에 돌아가면 일속에서 꾸준히 수양력을 쌓아 끌리는 바를 줄이고, 과한 욕심을 줄여야 정신의 힘이 생겨날 것이다.

태양이 더욱 강하게 비추면 검은 구름이 사라지게 되듯 정신의 힘을 갖추어 놓으면 욕심이 사라지게 된다는 희망을 확인하는 영산 성지 순례길이 되기를 염원한다.

수양이라는 기초공사가 튼튼해야 연구와 취사가 자리를 잡는다.

대각개교의 달 4월에는 또한 지혜의 원천을 찾아가는 데에 끊임없는 공을 들여 혜안을 열어가야 한다.

혜안을 열어야 바른 행을 하게 되어 자연히 복을 장만하게 된다.

우리가 쓸데없이 허송세월을 하는 것은 감사와 은혜를 발견하는 혜안이 없어서 또는 인과를 발견하는 지혜가 없어서 보은 봉공을 하지 않고 노력 없이 여기저기서 도움만 받거나 남의 소중한 것을 빼앗아 빚지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안다고 해서 다 실천하기 어렵고 일시적으로 법문에 감동했다고 해서 바로 실천이 되지는 않는다.

반복 또 반복만이 실천을 가능하게 한다.

더딘 것 같아도 삼학에 대한 반복 병진 실천만이 공부인의 평생을 밝혀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