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正典)/제2 교의편(敎義編)

제3절 작업취사(作業取捨)

원재(Aid Perfection) 2014. 8. 17. 18:27

제3절 작업취사(作業取捨)

 

정전(正典)
제2 교의편(敎義編)

제4장 삼학(三學)

제3절 작업취사(作業取捨)

 

1. 작업 취사의 요지

    작업이라 함은 무슨 일에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을 작용함을 이름이요, 취사라 함은 정의는 취하고 불의는 버림을 이름이니라.

 

2. 작업 취사의 목적

    정신을 수양하여 수양력을 얻었고 사리를 연구하여 연구력을 얻었다 하더라도, 실제 일을 작용하는 데 있어 실행을 하지 못하면 수양과 연구가 수포에 돌아갈 뿐이요 실효과를 얻기가 어렵나니, 예를 들면 줄기와 가지와 꽃과 잎은 좋은 나무에 결실이 없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니라.

    대범, 우리 인류가 선(善)이 좋은 줄은 알되 선을 행하지 못하며, 악이 그른 줄은 알되 악을 끊지 못하여 평탄한 낙원을 버리고 험악한 고해로 들어가는 까닭은 그 무엇인가. 그것은 일에 당하여 시비를 몰라서 실행이 없거나, 설사 시비는 안다 할지라도 불 같이 일어나는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거나, 철석같이 굳은 습관에 끌리거나 하여 악은 버리고 선은 취하는 실행이 없는 까닭이니, 우리는 정의어든 기어이 취하고 불의어든 기어이 버리는 실행 공부를 하여, 싫어하는 고해는 피하고 바라는 낙원을 맞아 오자는 것이니라.

 

3. 작업취사의 결과

    우리가 작업 취사 공부를 오래오래 계속하면, 모든 일을 응용할 때에 정의는 용맹 있게 취하고, 불의는 용맹 있게 버리는 실행의 힘을 얻어 결국 취사력을 얻을 것이니라.

작업취사(作業取捨)

삼학 수행의 하나. 정신수양과 사리연구의 바탕위에서 육근동작을 정의롭게 하는 것을 말한다. 정신수양과 사리연구 공부를 잘 하면 마음에 큰 힘을 얻게 된다. 그 힘을 정의로운 방향으로 사용하지 않고 삿되고 불의한 방향으로 악용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정의롭지 못하고 삿되게 악용한 수양력·연구력을 얻었다 할지라도 취사력이 부족한 사람도 흔히 볼 수 있다. 사람이 무엇을 얼마나 아는가, 어떠한 품성을 가졌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못지않게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행동하는가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작업취사는 인간의 행동력·실천력을 강조하는 것이다. 실천력 없는 수양력·연구력은 공허하기 쉽고 관념적으로 흐르기 쉬운 것이다. 그러므로 작업취사는 언행일치·지행일치·신행일치·각행일치의 생활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람은 의식구조와 정신세계가 매우 복잡해서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각각인 경우가 많다. 좋은 말 착한 말을 잘 하면서도 행동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고 즐거이 헌신 봉공하겠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사리 사욕이 앞서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알고 있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서로 다른 경우도 흔히 있는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아는 것 따로, 행동하는 것이 따로인 경우가 많은 것이다. 종교인들의 경우에도 진리를 믿고 성자의 가르침을 믿으면서도 실제 행동은 진리나 성현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인과보응의 이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선업을 짓지 않고 악업을 짓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자비·인(仁)·박애가 인간에게 가장 높은 가치라고 믿으면서도 그렇게 실천하지 않는 것이다. 오랜 종교수행으로 종교적 진리를 상당히 깨쳤으면서도 깨친만큼 실행하지 않는 경우도 많은 것이다. 그래서 작업취사는 언행일치·지행일치·신행일치·각행일치·원행일치의 생활이다. 말이 앞서고 행동이 뒤따르지 못하거나, 알고 있으면서도 그대로 행동하지 않거나, 깨달음을 얻고서도 그대로 실행하지 않는다면, 이는 오히려 더 큰 죄업이 되고,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게 되는 것이다. 작업이란 말은 몸·입·뜻의 삼업을 청정하게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악업을 끊고 선업을 짓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계율을 잘 지키는 생활을 한다는 뜻이 된다. 또 육근동작을 일원상의 진리에 합일되게 한다는 것이다. 곧 모든 일을 정의롭게 행동하고 불의와 타협하거나 불의앞에 굴하지 않는 것이다. 정의를 실행하고 불의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실천력·결단력·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①자기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역경·난경을 극복하고 백절불굴·칠전팔기의 용기로써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개척해 가는 것이다. ② 인내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어떠한 역경·난경도 인내할 줄 알고, 어떠한 유혹에도 인내하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③ 자기 자신을 이기는 용기가 필요하다. 불같이 일어나는 욕심을 이길 수 있고, 자기 자신의 모순을 극복하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자기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가장 힘이 세고 용기 있는 사람인 것이다. ④ 반항할 줄도 알고 비판할 줄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 순응하고 찬성할 자리에는 찬성하고 순응할 줄 알면서도, 불의 앞에서는 반항할 줄도 알고 비판할 줄도 알고 타협하지 않는줄 아는 용기가 없는 사람은 불의를 물리칠 용기도 없는 것이다. 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태연히 받아들일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 삶에 대한 애착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대개의 사람들은 불의앞에 비굴해지기 쉬운 것이다. 정의를 옹호하고 불의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⑥ 용서 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 정의를 실행한다는 것은 진리를 실천한다는 것이다.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어야 진리를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⑦ 땀 흘리는 용기가 필요하다. 실천력·행동력은 많은 땀을 필요로 한다. 땀흘리는 사람이라야 정의를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작업취사 공부를 잘 하면 행동력· 실천력 있는 인간이 되고, 정의를 실천하고 불의를 물리칠 수 있는 용기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입만 극락 가고 귀만 극락 갈 사람이 아니라, 현실세계를 정의롭고 아름다운 사회, 극락세계·이상세계로 건설해가는 일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원근친소에도 끌려가지 않는다. 활살자재하는 대기 대용의 큰 힘을 얻어 천지의 주인이 된다. 현실세계의 가장 절실한 현장에서 중생제도 하기에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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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 활선 활불에의 길

 

[319호] 1982년 06월 06일 (일) 양제승 교무(만덕산농원장) webmaster@wonnews.co.kr

 

대종사님은 만일 정당한 이유없이 공동작업에 나오지 않은 사람이나 작업장에 나와서 일에 게으른 사람이 있을 때에는 이를 크게 경책하셨으니 그 뜻은.....
정신을 수양하여 수양력을 얻었고 사리를 연구하여 연구력을 얻었다 하더라도 실제 일을 작용하는데 있어 실행을 하지 못하면 수양과 연구가 수포에 돌아갈 뿐이요, 실효과를 얻기가 어렵나니 예를 들면 줄기와 가지와 꽃과 잎은 좋은 나무에 결실이 없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니라
원불교 경전 작업취사의 목적에 밝혀진 이 말씀은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앎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은 것 같으나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적은 것 같습니다.   또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으나 작업장에서 땀흘려 일하려는 사람은 적은 것 같습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언제나 실천하는 사람, 일하는 사람이 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공동작업이 있을 때에는 항상 현장에 나오시어 친히 모든 역사를 지도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영육의 육대강령 가운데 육신의 삼강령을 등한히 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와같이 출역을 시키노라고 하셨습니다.   영육의 육대강령이란 수양  연구  취사의 영을 위한 삼강령과 의  식  주의 육을 위한 삼강령을 말합니다.   대체적으로 종교에서는 육에 관한 삼강령은 등한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종사께서는 새 시대의 산 종교는 수도와 생활이 둘이 아닌 즉 영육을 쌍전하는 종교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대종사께서는 만일 정당한 이유 없이 출역하지 않는 사람이 있거나 작업장에 나와서 일에 게으른 사람이 있을 때에는 이를 크게 경책하셨다고 합니다.   이로보아 대종사님께서 영육쌍전에 대하여 얼마나 철저한 생각을 가지셨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에 많은 성현과 불보살이 세상에 나시었으나 대종사님 같이 친히 언답을 막으시며 영육쌍전의 실지 표본을 보여 주신 일은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원기41년 4월 정관평 재방언 공사 착공식에서 정산종사 치사하시기를 대종사께서 우리 회사 창립 첫 사업으로 9인 단원과 함께 이 방언 대공사를 시작하신 것은 교단 건설의 경제적 기초를 세우실 목적도 있었지마는 안으로 그보다 더 깊은 뜻이 계셨던 것이니 이제 재방언의 대역을 시작함에 당하여 우리는 이번 사업도 그 의의와 가치에 있어서 첫 방언 사업과 둘이 아님을 알고 9인 정신과 우리의 정신이 둘이 아닌 큰 정신을 발휘하여 이번 일의 진행으로써 우리 동지들의 신심 정도를 더욱 알아보며 우리 동지들의 사업 역량을 더욱 알아보며 복록의 유래와 영육쌍전의 표본을 이번 일로 인연하여 다시 더욱 절실히 각성하자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 영육쌍전의 대이념에 대하여 어느 정도 각성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얼마만큼 이념구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가를 생각 할 때 스스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만덕산 농원이나 수계농원은 대종사께서 친히 마련하여 주신 곳입니다.   영산성지의 방언공사가 그러하였듯이 이곳 산업장에서도 생산에 직접 참여하면서 정신과 육신을 단련하여 새 회상 영육쌍전의 산 표본이 되라 하심이 분명합니다.
우리의 산업도량은 경제적 의미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심성을 도야하고 기질을 단련하는 신성한 도량이니 이 도량의 성쇠는 교단의 건전한 발전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산업기관은 이사병행의 활선도량이요, 동정일여의 활불 양성기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수양이라고 하면 흔히 조용한 곳에서 명상을 통해 심성을 단련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다운 수양은 동정간에 일터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대종사께서 산업기관을 마련하여 주시고 정산종사께서 만난가운데 지켜주시었으며 대산종법사께서 가꾸어 나가시는 뜻을 이어 받아야 할 것입니다.
교당에서의 교화나 문서를 통한 간접 교화도 중요하지만 산업도량을 통한 간접 교화도 중요하지만 산업도량을 통한 산업교화도 함께 중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정산종사께서는 예비교무들로 하여금 수계농원에서 훈련을 받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하셨고 이제 짧은 기간이나마 수계농원에서의 훈련은 실시되고 있습니다.   산업기관의 훈련도량화를 갈망하는 즈음, 때마침 만덕산 훈련원 착공을 앞두고 방언역사의 의의를 되새기며 다같이 영육쌍전의 선봉이 될 것을 염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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