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 교의품(敎義品) 39장
대종경(大宗經)
제2 교의품(敎義品) 39장
대종사 물으시기를 [우리가 기위 한 교문을 열었으니 어찌하여야 과거의 모든 폐단을 개선하고 새로운 종교로써 세상을 잘 교화하겠는가.] 박 대완(朴大完)이 사뢰기를 [모든 일이 다 가까운 데로부터 되는 것이오니 세상을 개선하기로 하오면 먼저 우리 각자의 마음을 개선하여야 하겠나이다.] 송 만경(宋萬京)이 사뢰기를 [우리의 교리와 제도가 이미 시대를 응하여 제정되었사오니 그 교리와 제도대로 실행만 하오면 자연 세상이 개선되겠나이다.] 조 송광(曺頌廣)이 사뢰기를 [저는 아직 대종사의 깊으신 뜻을 다 알지 못하오나 대종사의 법은 지극히 원만하고 지극히 평등하사 세계의 대운(大運)을 따라 무위이화(無爲而化)로 모든 인류가 개선될 줄 믿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의 말이 다 옳도다. 사람이 만일 세상을 개선하기로 하면 먼저 자기의 마음을 개선하여야 할 것이요, 마음을 개선하기로 하면 먼저 그 개선하는 법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이미 법이 있고 또는 그대들이 이 공부하는 이치를 알았으니 더욱 정성을 다하여 오늘의 이 문답이 반드시 실천으로 나타나게 하라. 각 종교가 개선되면 사람들의 마음이 개선될 것이요, 사람들의 마음이 개선되면 나라와 세계의 정치도 또한 개선되리니 종교와 정치가 비록 분야(分野)는 다르나 그 이면에는 서로 떠나지 못할 연관이 있어서 한 가지 세상의 선 불선(善不善)을 좌우하게 되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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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완[朴大完]
본명은 정립(正立). 법호는 영산(靈山). 법훈은 대봉도. 1885년 1월 5일 전남 여천군 삼일면 진례리에서 부친 병렬(炳烈)과 모친 김현경(金顯慶)의 5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천성이 너그러우면서도 매사에 박력있고 주밀했으며, 어려서 한문사숙에 입학하여 공부한 뒤 13세의 나이로 일본에 건너가 소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통역, 동경기상학회 관측기사, 농장지배인 등 다양한 경험을 했다. 31세 이후 만주ㆍ시베리아ㆍ상해ㆍ남경 등지를 주유하며 세월의 무상함과 함께 일제의 탄압 속에 고통 받는 민족현실에 분개했다.
기미년을 전후하여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했으나 만세운동과 연루, 체포되어 목포지방법원에 이송되어 미결수로 9개월, 3년 징역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38세 되던 해 출감 후 전국을 유람하다가 1927년(원기12) 귀가 중 전북 이리역에서 평소 면식 있던 목사로부터 지도받을 만한 인물이 불법연구회에 있다는 소식에 총부를 방문했다. 이때 소태산대종사를 만나 ‘대완(大完)’이란 법명을 받고 그 길로 만고풍상의 세속생활을 청산하고 전무출신을 서원했다. 세상을 혁명코자 했던 그의 생활은 출가 후 농업부원으로서 분뇨통을 나르며, 알봉 밭을 일궈 박을 심어 황등장에 가져다 파는 등 일대전환을 이루었다.
45세되던 1929년(원기14) 무진(戊辰) 동선 후 진안 마령에 파견되어 교화를 시작하여 1932년(원기17) 원평(김제) 초대교무, 이듬해 마령교무, 다시 원평교무가 되어 용신에 출장법회를 보는 등 새 회상의 법음을 전하는 일에 열성을 다했다. 첫 부임지인 마령에서는 동네 사랑방을 빌어 농촌계몽활동을 하는 등 교화가 활발해지자 회관을 신축하여 비로소 교당 간판을 달았다. 13년이나 봉직했던 용신교당에서는 문맹퇴치운동으로 야학을 실시하여 한글교육은 물론 한문과 교전공부를 가르치며 무지를 깨우쳤으며, 일찍이 배워둔 약학지식으로 의료혜택이 전무했던 인근주민에게 봉사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인근주민들의 농사일을 지도계몽하고 가정의 어려운 일을 상담하는 등 일찍이 농촌계몽운동의 선구자였다. 이러한 교화로 인해 일반법회에만 300여명이 참석하여 교화의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면서도 일제의 강압에는 매우 단호했다. 한번은 법종(法鍾)을 내놓으라는 강압에 이 종은 인근 주민에게 시간을 알리는 유일한 종이기 때문에 안 된다며 끝까지 버텼으며, 일제가 ‘구주(救主)이신 대성종사(大聖宗師)’라는 가사를 빌미로 못 부르게 했던 성가를 법회 때마다 어김없이 불렀다. 농촌의 상록수 교역자로 선구에 섰던 그는 해외교화개척에도 열성이었다.
일본 오사카(大阪)를 비롯하여 만주 목단강에까지 가서 교화활동을 전개했다. 1935년(원기20) 6월 20일 오사카교당 교무로 부임하여 능란한 교화방편과 설법으로 그해 7월 7일 첫 예회를 보았다. 8월 25일에는 사이죠구(西城區) 지부와 히가시요도가와구(東淀川區) 분회로 나누어 예회를 보는 등 해외교화의 가능성을 보였으나 일경의 감시와 압력으로 이듬해 10월 귀국했다. 일본어ㆍ만주어ㆍ러시아어 등 외국어에 능통하고, 신학문에 상당한 식견을 가졌으며, 국내외 정세에 정통했던 그는 해방 후 정계진출의 간곡한 청원도 뿌리치고, 수위단원도 스스로 사임한 후 오직 교화와 수양에만 전념하다가 1958년(원기43) 1월 4일에 중앙수양원에서 열반했으며, 1988년(원기73) 9월 대봉도(大奉道) 법훈이 추서되었다.(원불교대사전)
송만경[宋萬京]
본명은 상면(相冕). 법호는 모산(慕山). 1876년 전북 김제군 용지면 송산리에서 출생하여 한학을 수학한 후 용지면장을 지낸 인물이다. 1924년(원기9) 2월, 전북 정읍 내장사에서 소태산대종사를 처음 만난다. 당시 소태산은 가깝게 지내던 동향 출신의 백학명(白鶴鳴) 선사가 내장사 주지로 부임함에 따라 내장사 경내에 평소 구상해왔던 이상적인 도덕사업을 펼칠 수 있도록 제안을 받게 되고, 그 추진을 위해 정산종사 등 제자 4인을 내장사에 보내어 준비하게 했다. 하지만 내장사 경내 승려들의 반대로 계획이 무산되어 실행에 옮기지 못했지만, 이때 처사로 있던 송만경은 소태산을 만나 ‘만경(萬京)’이란 법명을 받고 전무출신을 단행했다.
그는 동년 6월 1일에 열린 불법연구회 창립총회에 김제지방 대표로 참가하고 개회사를 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보였다. 이후 1927년(원기12) 교무부장, 이듬해 교무로 근무하면서 총부 선(禪)에 참여한 선객을 지도하기도 했다. 창립 당시 7부 가운데 생산을 담당하는 농업부가 제대로 창립되지 못함을 보고 농업부 창립을 제안하는 의견안을 제출했고, 이후 ‘농업부창립연합단’을 주도하여 산업부로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한편 1928년(원기13) 제2회 조단으로 각장(角長) 27명과 항장(亢長) 3명 등 불법연구회에 첫 단장이 배출될 때, 제1호 항장의 중임을 맡기도 했다. 1929년(원기14) 총부 농업부장을 지내며 교단 발전에 헌신하던 그는 1930년(원기15) 8월, 부득이한 사정으로 사가로 돌아갔으며, 이듬해 1931년(원기16) 3월 5일 56세를 일기로 열반에 들었다.(원불교대사전)
조송광[曺頌廣]
[주요약력]
본명은 공진(工珍). 법호는 경산(慶山). 불법연구회 제2대 회장. 공타원 조전권의 부친. 기독교 장로(長老)의 신분으로 소태산대종사의 제자가 되었다.
[생애와 활동]
조송광은 1876년 5월 10일 전북 정읍군 정주읍 연지리에서 부친 기승(淇承)과 모친 방수정화의 아들로 출생했다. 어릴 적부터 유학을 공부했고 18세에 동학 농민운동에 참여했고 이후 의술을 익혀 약방을 경영하며 이름을 사방에 떨쳤다. 기독교를 신앙한 것은 27세 때부터였다. 신앙생활 5년만에 김제 원평에 구봉교회를 설립했고 43세에는 장로가 되었다. 또한 기미년 만세운동에도 참여했고, 은밀히 동지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가들을 재정적으로 후원하기도 했다.
이웃에 사는 송적벽(호적명 찬오)으로부터 소태산을 한 번 만나 보라는 제의를 여러 차례 받고 전주 한벽루(寒碧樓)에서 첫 만남을 갖게 되니, 1924년(원기9) 봄이었다. 조송광과 소태산이 서로 도덕 문답을 가졌다. 조송광이 말문이 막히는 사람이 제자가 되기로 제의했다. 2시간이 채 못 되어 조송광이 지고 말았다. 무슨 말을 해도 부족하자 제자 되기를 원하며 주고받은 대화가 다음 《대종경》 전망품 14장의 내용이다.
“조송광이 처음 와 뵈오니,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보통 사람보다 다른 점이 있어 보이니 어떠한 믿음이 있는가.’ 송광이 사뢰기를 ‘여러 십년 동안 하나님을 신앙하온 예수교 장로이옵니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을 믿었다 하니 하나님은 어디 계시던가.’ 송광이 사뢰기를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 부재하사 계시지 아니하는 곳이 없다 하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그대가 늘 하나님을 뵈옵고 말씀도 듣고 가르침도 받았는가.’ 송광이 사뢰기를 ‘아직까지는 뵈온 일도 없사옵고 말하여 본 적도 없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그대가 아직 예수의 심통(心通) 제자는 못 되지 아니했는가.’
송광이 여쭙기를 ‘어떻게 하오면 하나님을 뵈올 수도 있고 가르침을 받을 수도 있겠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공부를 잘하여 예수의 심통 제자만 되면 그리 할 수 있나니라.’ 송광이 다시 여쭙기를 ‘성경에 예수께서 말세에 다시 오시되 도둑같이 왔다 가리라 했고 그때에는 여러 가지 증거도 나타날 것이라 했사오니 참으로 오시는 날이 있사오리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성현은 거짓이 없나니 그대가 공부를 잘하여 심령(心靈)이 열리고 보면 예수의 다녀가는 것도 또한 알리라.’ 송광이 사뢰기를 ‘제가 오랫동안 저를 직접 지도하여 주실 큰 스승님을 기다렸삽더니, 오늘 대종사를 뵈오니 마음이 흡연(洽然)하여 곧 제자가 되고 싶나이다. 그러하오나, 한편으로는 변절 같사와 양심에 자극이 되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예수교에서도 예수의 심통 제자만 되면 나의 하는 일을 알게 될 것이요, 내게서도 나의 심통 제자만 되면 예수의 한 일을 알게 되리라. 그러므로, 모르는 사람은 저 교 이 교의 간격을 두어 마음에 변절한 것 같이 생각하고 교회 사이에 서로 적대시하는 일도 있지마는, 참으로 아는 사람은 때와 곳을 따라서 이름만 다를 뿐이요 다 한 집안으로 알게 되나니, 그대의 가고 오는 것은 오직 그대 자신이 알아서 하라.’ 송광이 일어나 절하고 제자되기를 다시 발원하거늘, 대종사 허락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나의 제자된 후라도 하나님을 신봉하는 마음이 더 두터워져야 나의 참된 제자니라.’”
조송광은 소태산에게 심복은 했으나 정식으로 불법연구회 회원은 바로 되지 않았다. 교회에 몸담고 있으면서 변산과 익산으로 종종 소태산을 찾았다. 그러다 1925년(원기10) 약방에 불이나 약재와 물품, 서적이 전부 타 버리고 말았다. 조송광이 남긴 연대기(年代記) 《조옥정백년사(曺沃政百年史)》에 보면 “하늘이 큰 복을 내리려함에 반드시 작은 재앙으로 시험한다했으니 내게 혹시 영광 받들 기회가 멀지 아니하리라. 불법연구회에 정식으로 신입서 제출하고 박 선생(소태산)께 배례 후에 여년(餘年)을 부탁하다”고 밝혀져 있다.
소태산은 그에게 ‘송광(頌廣)’이란 법명을 내렸다. 이는 평소 그가 소태산의 법문을 들을 때마다 ‘참으로 광대하옵니다. 선생님의 도덕이여’하고 칭송하여 마지않는 데서 나온 법명이다. 입교 후 조송광은 원평교당 창설에 앞장섰으며, 1928년(원기13) 제1대 제1회 기념총회에서 불법연구회 제2대 회장에 피선되어 교단 초창의 대소사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한 때에 소태산이 서울에 행가할 때 조송광, 전음광 등 여러 제자가 이리역까지 전송을 나갔다. 이리역에 가기 위해 남중리 마을을 지날 무렵 마을 뒤에 있는 노송(老松)을 보고 스승과 제자들간에 오간 구전심수의 법문이 1929년(원기14) 11월에 간행된 《월말통신》 제21호에 수록되어 있으며 그 내용을 축약한 것이 다음과 같은 《대종경》 불지품 20장의 내용이다.
“대종사 하루는 조송광과 전음광을 데리시고 교외 남중리에 산책하시는데 길가의 큰 소나무 몇 주가 심히 아름다운지라 송광이 말하기를 ‘참으로 아름다워라. 이 솔이여! 우리 교당으로 옮기었으면 좋겠도다.’ 하거늘 대종사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어찌 좁은 생각과 작은 자리를 뛰어나지 못했는가. 교당이 이 노송을 떠나지 아니하고 이 노송이 교당을 떠나지 아니하여 노송과 교당이 모두 우리 울 안에 있거늘 기어이 옮겨놓고 보아야만 할 것이 무엇이리요. 그것은 그대가 아직 차별과 간격을 초월하여 큰 우주의 본가(本家)를 발견하지 못한 연고니라.’ 송광이 여쭙기를 ‘큰 우주의 본가는 어떠한 곳이오니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지금 보아도 알지 못하므로 내 이제 그 형상을 가정하여 보이리라’ 하시고, 땅에 일원상을 그려 보이시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이 곧 큰 우주의 본가이니 이 가운데에는 무궁한 묘리와 무궁한 보물과 무궁한 조화가 빠짐없이 갖추어 있나니라.’”
1931년(원기16) 3월, 총회에서 불법연구회 회장에 재선된 조송광은 그 해 8월, 소태산과 더불어 부산ㆍ경주 등 경상도 일대를 순회했다. 처음으로 경상도 여행을 나선 소태산은 부산에서 많은 인연들을 만났고, 동래 범어사, 양산 통도사, 경주 불국사 등을 거쳐 경북 월성군 현곡면 구미 용담 최제우의 유적을 찾았다.
소태산은 석굴암 방명록에다 ‘저 무정한 석불도 모든 사람의 찬의를 받거든 하물며 구별력 있는 사람이 어찌 그저 있으랴’고 적고 스스로 불려거사(不侶居士)라 칭했다. 석굴암 앞에서 조송광이 소태산과 함께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1936년(원기21)까지 9년간 불법연구회 회장을 역임한 조송광은 그 이후 16년간 원평교당 교도회장으로서 지역 교화 발전에 적극 노력했다. 1957년 10월 5일 82세로 열반했다. 만식ㆍ전권ㆍ일관 등 세 자매가 전무출신했다.(원불교대사전)
무위이화[無爲而化]
함이 없이 되어짐을 뜻하는 도가철학 용어. 우주 대자연은 인위나 조작이 없이 그대로 두어도 저절로 이루어진다. 노자는 인간이 지(知)와 욕(欲)에 의해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면 오히려 세상에 대위(大僞)와 대란(大亂)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므로 대자연의 저절로 이루어지는 진리에 따라야 한다고 했다. 소태산대종사는 “우주와 만물은 유도 아니요 무도 아닌 그것이나, 그 중에서 그 있는 것이 무위이화 자동적으로 생겨나, 우주는 성(成)ㆍ주(住)ㆍ괴(壞)ㆍ공(空)으로 변화하고, 일월은 왕래하여 주야를 변화시킨다”(《대종경》 천도품5)고 했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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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종교의 사명을 다하는 길]
모경희 교무
교의품의 마지막인 38장과 39장의 법문은 원기13년(1928년), 하계기념과 함께 기념강연회를 베풀고 그 이튿날 남녀 대중을 모이게 하신 후 내려주신 말씀을 나누어 정리한 것이다.
우리 회상에 입문하기 이전 적극적인 사회참여의 전력이 있으며, 당시 시국에 대한 민감한 시각을 가진 몇몇 제자들과의 문답을 통하여 이 세상의 모든 폐단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려면 먼저 각자의 마음을 개선해야 함을 이끌어내시고, 다음과 같이 정리해 주셨다.
'혁명의 원뜻은 모든 불합리한 제도를 합리하도록, 불공평한 일을 공평하도록 개선 혁신하는 것이다. ~(중략) 무력으로써 강제로 복종을 얻는 것은 그 권위가 있을 동안의 일시적 복종이요, 심력(心力)으로써 감화를 얻는 것은 영영 변하지 않을 복종이라, ~ 그 가치를 어찌 비교할 수 있으리오! ~(중략)
여러분이여! 힘써 노력하라. 우리의 교법을 잘 연마하여 전 세계 인류에게 무상묘법이 되게 한다면 취하여 가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이 조그마한 조선의 한 모퉁이 익산 금강원에 잠복한 우리가 장차 세계의 정신적 주인이 되고, 이 나라 국토에도 고루 퍼지지 못한 우리의 교법이 세계의 종법(宗法)이 될지 누가 알겠느냐!
우리는 사람 수효 많은 것을 취하지 않는다. 원대한 발원과 독실한 성의만 있다면 다만 몇 사람이라도 좋다. 사실 열사람만 완전하게 훈련해 놓으면 능히 시방세계를 운전하며 전 우주를 움직일 터인데, 하물며 이와 같이 대중이 모였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그 법이 있으나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행할 수 없다는 뜻을 재삼 반복하여 밝히는 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 사람이 되어서 그 법을 행하려는 생각을 마음에 깊이 새기도록 하려함이다.
여러분은 다시 우리의 표준인 삼대강령의 뜻을 깊이 한번 새겨보라.
사리연구에서 '사(事)'자의 뜻은 정치에 속하는 것이요, '이(理)'자의 뜻은 종교에 속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마땅히 정치와 종교를 아울러 밝혀서 복과 지혜를 유감없이 얻으라.
그러기로 하면 먼저 그 길을 알아야 하므로 연구를 하여야만 할 것인데, 연구를 하기로 하면 먼저 수양이 필요할 것이다. 수양력과 연구력이 풍부하면 모든 일을 취사함에 되지 않는 일이 어디 있으며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같이 훌륭한 강령을 세운 여러분이여! 날마다 즐거워하며 날마다 춤추라!' (〈월말통신〉 4호 법회록에 실린 법문을 현대의 말로 풀어서 올림)
<성지송학중학교>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