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正典)/제2 교의편(敎義編)

제2절 일원상의 신앙(一圓相-信仰)

원재(Aid Perfection) 2014. 8. 15. 13:43

정전(正典)

2 교의편(敎義編)

1장 일원상(一圓相)

2절 일원상의 신앙(一圓相-信仰)

일원상의 진리를 우주 만유의 본원으로 믿으며, 제불 제성의 심인으로 믿으며, 일체 중생의 본성으로 믿으며, 대소 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로 믿으며, 생멸 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로 믿으며, 선악 업보가 끊어진 자리로 믿으며, 언어 명상이 돈공한 자리로 믿으며, 그 없는 자리에서 공적 영지의 광명을 따라 대소 유무에 분별이 나타나는 것을 믿으며, 선악 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는 것을 믿으며, 언어 명상이 완연하여 시방 삼계가 장중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는 것을 믿으며, 진공 묘유의 조화는 우주 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에 은현 자재하는 것을 믿는 것이 곧 일원상의 신앙이니라.

일원상의 신앙(一圓相-信仰)

일원상의 진리를 우주 만물의 궁극적이고 근본적인 진리라고 믿어 모든 복락을 구해가는 생활을 말한다. 일원상의 진리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믿어가는 것이다. 신앙이란 진리를 믿고 실행하는 것, 궁극적인 가치를 가진 대상을 믿고 거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이 종교적 이상에 자기를 완전히 바치는 실천적 태도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종교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요 체험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이라는 말 속에는 수행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신앙과 수행은 표리의 관계인 것이다. 신앙이 철저하면 수행도 역시 철저하게 되고, 수행이 철저하다는 것은 신앙도 철저하다는 것이다. 신앙은 깊은데 수행이 부족하다든가, 수행은 철저한데 신앙이 깊지 못하다면 이는 잘못된 신앙이요 잘못된 수행인 것이다. 진리를 믿는다는 신()자의 뜻에 세가지가 있다. 진리를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다 믿는다(不疑), 믿는 사람 스스로가 거짓되지 않고 참 되어 간다(),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실천을 통해서 진리의 의미를 확실히 밝힌다()는 세가지 뜻이 있는 것이다. 대종경신성품 7장에서 신()이란 법을 담는 그릇이 된다고 한 것은 믿는다는 뜻(不疑)이요, 의두 해결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은 진리의 뜻을 밝힌다는 뜻()이며, 계율을 지키는 근본이 된다는 것은 참되어 간다는() 뜻이다. 믿음은 종교인의 뿌리이다. 뿌리가 튼튼해야 나무가 잘 자라듯이 종교인은 믿음이 깊어야 큰 인격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불교의 신앙은 자력적인 깨침을 얻으려는 성격이 강하고, 기독교의 신앙은 타력적인 구원을 얻으려는 면이 강하다. 도교의 신앙은 인간과 자연과의 일치를 강조한 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일원상의 신앙은 자타력 병진 신앙이다. 일원상 신앙의 특징은 우주 전체를 믿는 원만한 신앙이요, 현실세계에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는 사실을 믿는 사실신앙이며, 또한 자타력 병진신앙이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어떠한 사물을 대할 때에도 항상 부처님을 대하듯 경건하고 청정한 마음으로 살아가려는 것이다. 일상생활 그대로가 기도하는 생활이요 불공하는 생활인 것이다. 이러한 생활이 곧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생활이며, 일원상의 진리를 신앙하는 생활이다. 신앙과 수행을 자력과 타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신앙은 절대자로부터 얻는 타력이요, 수행은 스스로 얻는 자력인 것이다. 자력과 타력은 어느 하나 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자력은 타력의 근본이 되고, 타력은 자력의 근본이 되어 상호 보완의 관계인 것이다. 신앙이 투철해야 수행도 철저해지고, 수행이 철저하면 신앙도 깊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일원상의 진리를 신앙하고 수행하는 것은 자력과 타력을 아울러 갖추어서 부처님의 인격을 이루고 일원상의 진리를 닮아가서 진리와 내가 하나가 되어가는 것이다.(원불교 용어사전)

일원상의 신앙[一圓相-信仰]

궁극적 진리로서의 일원상진리 그 자체를 부처로 모시고 받들며(숭앙하면서), 그러한 일원상진리에 의하여 살아가는 신앙행위, 곧 법신불신앙. 다시 말하면 우주만유의 본원이요, 우리 마음의 본성인 법신불일원을 신앙의 대상으로 모시고, 그 법신불의 무한한 은혜와 위력에 귀의하고 감사드리며, 나아가 그의 분신으로서 살아가려는 신앙태도를 말한다. 이러한 일원상 신앙의 구체적 내용으로서 원불교에서는 법신불사은신앙을 강조한다. 이 가운데 법신불은 일원상진리의 본체론적 파악인 근원성 내지 전체상을 의미한 것이라면, 사은(四恩)은 그 진리의 현상론적 파악인 작용성 내지 구체상(具體相)을 지칭한 것이라 본다. 그러한 의미에서 원불교의 일원상 신앙은 개체신앙이나 형식신앙을 넘어선 전체신앙, 또는 사실신앙의 의미를 지닌다.

곧 한편으로는 원만한 전체신앙의 대상으로서 법신불을 강조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인과진리에 바탕한 사실신앙의 대상으로서 사은을 강조하는 바, 이를 각각 허공법계 전체에 올리는 진리불공(眞理佛供)과 사은 각각의 당처 당처에 올리는 실지불공(實地佛供)이라 한다. 소태산대종사는 일원상의 신앙에 대해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고 그 진리를 믿어 복락을 구하나니, 일원상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사은이요, 사은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우주만유로서 천지만물 허공법계가 다 부처 아님이 없나니, 우리는 어느 때 어느 곳이나 항상 경외심을 놓지 말고 존엄하신 부처님을 대하는 청정한 마음과 경건한 태도로써 천만사물에 응할 것이며”(대종경교의품3)라고 역설했다.(원불교대사전)

일원상의 진리를 믿어라.

우리 원불교는 신앙과 수행을 병진하는 종교입니다. 일원상의 진리를 신앙하는 동시에 수행의 표본으로 삼는 종교입니다.

우주만유의 본원으로 믿어라.

원각성존 소태산대종사 부처님께서는 일원상의 신앙에 대한 원리를 가르쳐주시면서 제1절 일원상의 진리를 다시금 일일이 밝혀가시면서 일원상의 진리를 우주 만유의 본원으로 믿으며, 제불제성의 심인으로 믿으며, 일체 중생의 본성으로 믿어라 하셨습니다.

또한 대소 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로 믿으며, 생멸 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로 믿으며, 선악 업보가 끊어진 자리로 믿으며, 언어 명상이 돈공한 자리로 믿어라 하십니다.

이어서 대종사께서는 다시금 그 없는 자리에서 공적 영지의 광명을 따라 대소 유무에 분별이 나타나는 것을 믿으며, 선악 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는 것을 믿으며, 언어 명상이 완연하여 시방 삼계가 장중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는 것을 믿어라 하셨습니다.

또한 대종사께서는 진공 묘유의 조화가 우주 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에 은현 자재하는 것을 믿는 것이 곧 일원상의 신앙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대종사님의 이 일원상의 신앙 법문을 받들면서 마음깊이 통절하게 깨우친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얼마나 우리 중생들이 부처님께서 깨치셔서 밝혀주신 일원상의 진리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잘 믿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중생들의 그러한 믿음의 실상을 잘 아시는지라 대종사 부처님께서 이처럼 일원상의 진리를 거듭 거듭 다시 밝혀주시면서 '믿어라 믿어라 믿는 것이 바로 일원상의 신앙이니라'고 부촉하시고 당부하신 대자대비를 마음속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보통 우리 인간들은 우주에 다북차 있는 진리의 은혜로 살아가면서도 그 진리와 은혜를 알지 못합니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생사의 장야(長夜)를 헤매면서도 진리를 알려고도 하지 않고 믿지도 않으면서 그날 그날을 그저 그렇게 살아갈 뿐입니다.

성불제중 제생의세의 거룩한 서원으로 이 땅에 오시어 갖은 고행 난행을 겪으며 우주의 진리를 대각하신 부처님의 법문 말씀과 혜안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습니다.

영생과 인과의 진리를 경전과 법설을 통해 수없이 보고 듣고도 정작 실지 자신의 삶 속에서는 믿지 않고 행치 않습니다.

나와 너의 본성임을 믿어라.

대종사께서는 일원상의 진리를 우주 만유의 본원으로 믿으며, 제불제성의 심인으로 믿으며, 일체 중생의 본성으로 믿어라 하셨습니다.

일원상의 진리를 바로 우주 만유의 본원 즉 삼라만상의 근본 뿌리요 존재의 바탕이요 원천으로 믿어라 하셨습니다. 하늘과 땅, 천지와 그 가운데 존재하는 일체만물이 다 법신불 일원상의 진리가 있어서 존재하는 생명체라는 것입니다.

또한 일원상의 진리를 제불 제성의 심인으로 믿어라 하셨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과 성자들의 마음과 심법이 바로 저 인감도장과 같이 일원상 진리와 똑같이 합일한 경지라는 것을 믿어라 하셨습니다.

아울러 일원상의 진리를 일체 중생의 본성으로 믿어라 하십니다. 나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어리석은 일체 중생들의 본성 또한 일원상의 진리와 둘이 아님으로 우리 중생들도 진리를 알고 믿고 닮아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면 불보살이 될수 있다는 믿음과 용기를 가지라 깨우쳐 주셨습니다.

일원상의 진리가 우주 만유의 본원이요, 제불제성의 심인이요, 일체 중생의 본성임을 믿어라 하심으로써 우주만유와 일체중생이 다 제불제성처럼 불성을 갊아 있고 진리와 합일할 수 있는 영성을 갖추고 있다는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신앙법을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일원상의 진리가 진공임을 믿어라.

또한 일원상의 진리를 대소 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로 믿으며, 생멸 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로 믿으며, 선악 업보가 끊어진 자리로 믿으며, 언어 명상이 돈공한 자리로 믿어라 하십니다.

이 대목은 일원상 진리의 진공자리를 밝혀주신 법문입니다. 언어도단하고 심행처가 멸한 우주 진리의 사무쳐 들어가는 입정의 진경에 들어가서는 대소 유무에 분별도 없는 것이며, 생멸 거래에 변함도 없는 것이며, 선악 업보도 끊어진 자리라 하십니다. 이 경지에 들어가서는 모든 상대와 차별도 끊어지고 오직 절대의 자리, 불변의 자리, 영원한 생명의 자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리를 깨쳐 아는 것을 돈오라 하고 그 자리에 사무쳐 들어가서 선악 업보를 몰록 청산하고 청정해탈의 진경에 들어감을 돈수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살··음의 중죄를 지은 죄인이라도 대참회, 대정진으로 일원상 진리의 진공자리를 얻고보면 일시에 청정자성을 회복하고 삼세업장을 녹여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일원상 진리의 영지를 믿어라.

또한 대종사께서는 그 없는 진공의 자리에서 공적 영지의 광명을 따라 대소 유무에 분별이 나타나는 것을 믿으며, 선악 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는 것을 믿으며, 언어 명상이 완연하여 시방 삼계가 장중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는 것을 믿어라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주의 진리는 진공한 가운데 영지불매한 알음알이의 광명과 지혜를 갖추고 있습니다. 저 말없는 하늘과 땅도 천지의 소소영령한 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소유무에 분별이 나타나고 선악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며 언어와 명상으로 그 진리의 모습을 표현할 수 있으며 만고일월의 대지혜광명으로 부처님이 손바닥안의 구슬을 보듯이 시방삼계의 모든 일들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가 무섭고 천지가 무서우며 부처님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과가 무섭고 선악간 업보가 무서운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일이 다 우리 어리석은 중생들 스스로가 짓고 받는 자업자득, 자작자수의 결과물인 만큼 참으로 엄정하고 공정하고 무서운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제 욕심대로 자행자지하며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일원상 진리의 조화를 믿어라.

또한 일원상의 진리는 진공 묘유의 조화가 우주 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에 은현 자재하는 것을 믿는 것이 곧 일원상의 신앙이라고 대종사께서 깨우쳐 주셨습니다.

일원상 진리는 진공과 묘유의 양대 속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진리의 생동성, 역동성으로 인하여 진공과 묘유의 원리가 조화를 나투는데 그 조화는 바로 우주 만유를 통하여 비롯이 없는 과거로부터 다함이 없는 미래를 통하여 생사와 유무와 은현을 자유자재합니다. 일원상의 진리는 우주를 관통하여 두루 있는 신령한 진리로서 광대무량, 불가사의, 불가사량한 우주의 원천적인 힘과 에너지가 되어 영원한 세상에 삼라만상을 주재하는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는 진리불이십니다.

이러한 진공 묘유 조화의 주체인 일원상의 진리를 오롯이 믿는 것이 바로 일원상의 신앙입니다.<송인걸 교무>

원불교신문(http://www.wonnews.co.kr/)

수행의 전제 조건

신앙은 사람의 정신생활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가기로 하면 우리는 반드시 정당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세전신앙) 바른 신앙은 모범적인 가정과 자녀 교육의 핵심이기도 하다.(대종경인도품 43·46)

문제는 신앙의 대상이다. '가장 원만하고 진리에 맞는 대상'을 믿으라고 하셨다. 정산종사께서는 "복과 죄는 다 내 자신이 짓고 받나니 먼저 내 자신을 옳게 믿으며, 허공은 소리 없고 냄새도 없으나 속일 수 없고 어길 수도 없는 위력이 있나니 이 진리를 철저히 믿고 받들라"고 하셨다.(정산종사법어국운편 29) 바로 '일원상의 진리'를 신앙해야 한다.

'일원상의 진리를 신앙한다는 것'은 부처님을 대하는 청정한 마음과 경건한 태도로 천만사물을 대하고(처처불상), 천만 사물 당처에 직접 불공하는 것(사사불공)이다. '처처불상 사사불공'에는 '실지(實地)불공'의 뜻 외에도 '진리(眞理)불공'의 뜻이 들어 있다.

실지불공은 '사은 당처에 직접 올리는 불공'이다. 대소유무의 이치와 시비이해의 분명한 취사를 알아야 진정한 도인이고 덕인이라고 하셨다.(인도품 3) 상대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무조건적인 불공을 해서는 안된다. ''''에 기초한 불공이어야 한다.

진리불공은 '허공법계를 통하여 법신불에게 올리는 불공'이다. 정산종사께서는 진리불공이 감응하는 이치를 '무선전신''비료'의 예로 설명해 주었고,(예도편 9) 자신의 수행에 대한 서원의 중요성과 세상과 회상에 대한 심고를 강조하였다.(권도편 15~16) 이와 같은 실지불공과 진리불공을 아우르는 것이 일원상의 신앙이다.

일원의 공부는 자력인 중에도 타력이 포함되고 타력인 중에도 자력이 포함되어 있는 자타력 병진법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력(수행)과 타력(신앙)을 나누어 볼 때 하는 이야기이고, 실제에 있어 신앙과 수행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과보 받는 내역(인과)과 사은의 도를 단련하여 작업취사의 과목을 정한 것이나,(서품 19) 기도가 위력(신앙)과 정력(수행)을 아울러 얻는 공부인 것 등이 그 예이다.(권도편 14) 신앙 행위는 넓은 의미의 수행이고, 수행도 자력 신앙이라는 측면에서는 넓은 의미의 신앙 행위가 될 수 있다.

'3절 일원상의 수행'에서는 '신앙''수행'의 전제조건으로 못 박아 주었다. 정산종사님께서는 일원상을 신앙하는 것이 정법수행의 원동력이 된다고 하셨고,(원리편 3) 수도의 무한 동력은 신성이라고 했다.(권도편 25) 신앙이 없으면 수행도 깊이 들어 갈 수가 없다.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 불교가 신앙을 병진해야하는 이유이다.

원불교는 신앙이 약한 종교라는 말을 곧잘 한다. 교리체계상으로나 내용에 있어 분명히 신앙과 수행의 '병진'이다. 결코 수행중심의 종교가 아니다.<오렌지카운티교당>

원불교신문(http://www.wonnews.co.kr/)

신문으로 법회 보기 / 일원상의 신앙

참으로 든든한 배경

내가 일원상의 진리와 같음 믿어야, 인과로 변화되는 이치, 철저한 신앙

곳곳이 부처님, 일마다 불공

반갑습니다. 오늘은 일원상의 신앙입니다. 일원상은 진리의 상징이요, 우리들 신앙의 대상이며 수행의 표본입니다.

정전일원상의 신앙 장은 일원상의 진리 장과 내용이 거의 같지요. 다만 "로 믿으며"가 첨해있습니다. 일원상의 진리를 그대로 믿는 것이 일원상의 신앙입니다.

한 제자가 대종사께 여쭸습니다. 일원상의 신앙은 어떻게 하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고 그 진리를 믿어 복락을 구하나니, 일원상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사은이요, 사은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우주 만유로서 천지 만물 허공 법계가 다 부처 아님이 없나니, 우리는 어느 때 어느 곳이든지 항상 경외심을 놓지 말고 존엄하신 부처님을 대하는 청정한 마음과 경건한 태도로 천만 사물에 응할 것이며, 천만 사물의 당처에 직접 불공하기를 힘써서 현실적으로 복락을 장만할지니, 이를 몰아 말하자면 편협한 신앙을 돌려 원만한 신앙을 만들며, 미신적 신앙을 돌려 사실적 신앙을 하게 한 것이니라."

대종경교의품 4장에 "일원상의 신앙은 원만한 전체 신앙이며, 진리적 사실 신앙을 하는 것"입니다.

일찍 부군을 잃고 혼자 된 신심 깊은 교도님께 물었습니다. '살아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오늘날까지 혼자서 삼남매를 길러 오셨는가요?'하고요. 답하기를 "저는 항상 든든한 빽이 있었거든요" 라고요. 항상 법신불 사은님께 기도하고 매달리는 속에서 어떤 어려움도 고달픔도 이겨내 올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새벽기도를 쉬는 것이 아니라, 새벽기도의 힘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올 수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힘이 아닌가 합니다. 든든한 빽이라고 하셨는데 든든한 배경으로 우리를 지켜주시고 돌보아 주시는 법신불 사은은 우리들에게 한없는 은혜와 위력을 주십니다. 우리들은 든든한 배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 옛말이 있습니다만,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자신의 힘과 더불어 타력에 의지하여 살게 됩니다.

그 중에 가장 든든하고 확실한 자신할 만한 타력이 바로 법신불 일원상입니다. 그 힘을 타고 받는 것이 바로 일원상의 신앙이지요.

내가 눈물을 흘릴 때 누가 내 눈물을 닦아주지? 하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내가 기쁠 때 누가 같이 기뻐해 주지? 내가 슬플 때 내 슬픔을 덜어주고, 내가 기쁠 때 내 기쁨을 배가시켜 주는 것이 바로 신앙의 힘입니다. 내가 아플 때 아픔을 덜어주고 내가 좌절해 있을 때 다시 희망을 찾게 해 주고, 내가 오만할 때 오만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힘이 바로 신앙의 힘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찌 기쁘고 좋은 일만 만날 수 있겠습니까? 어렵고 힘든 일, 스스로 감당하기 벅찬 일을 만날 때 의지하고 힘을 탈 수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 이 때를 위하여 내가 그동안 신앙생활을 해 왔구나' 하면서 어떤 난관도 이겨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어떤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당하면 그렇게 기도생활을 해온 내게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지 하면서 신심이 흔들리기도 하는 것을 봅니다. 그래 이런 어려운 일을 당하여 이겨낼 수 있도록 그간 신앙생활, 기도생활을 해 온 것이구나. 그것이 진리를 믿는 신앙인의 바른 자세는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려움 없이 잘 살아가는 사람 중에 종교도 신앙도 필요 없다고 자기만 열심히 살면 된다고 하는 사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삶에 어려움이 생기면 그때 어디엔가 의존하고 싶고, 기도하고픈 마음이 들게 됩니다. 그런데 어디에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소부터 언제나 기도하고 신앙하고 법신불 사은과 가까이 지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기쁜 일을 당하여 진심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며 자만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어려운 일을 당하면 법신불 사은님께 매달려 어려움을 이겨낼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믿는 바른 신앙은

첫째, 내가 바로 일원상의 진리와 같음을 믿는 것입니다. 일원은 우주만유의 근원 자리이며, 모든 부처와 성현들이 깨치신 자리입니다. 또한 우리 모든 중생의 본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깨달으신 후 일체중생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개유불성'(모두가 부처의 성품을 갖고 있다)이라고 하셨지요. 원래 부처와 다르지 않은 성품을 갖고 있음을 믿고 그 마음을 찾아서 지키고 사용해 가는 것이 바로 일원상을 신앙하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좌절하지도 않고, 또한 오만해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갊아있는 불성에 바탕하여 자신을 소중히 하고 또한 타인도 똑같이 소중히 보는 것입니다. 하여서 그 소중한 본래의 마음을 찾아 알고, 지키고 나아가 그 마음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둘째 우주의 진리는 생멸이 없고 인과로 변화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주의 진리는 변하는 진리와 그 가운데 변하지 않는 진리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변하는 진리는 인과에 의해서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 변치 않는 진리가 있으니 길이길이 멸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아무리 재산이 많고 권리를 누리는 사람보다도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의 진리를 믿고 깨치고자 하는 사람이라야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셋째 모두가 부처임을 믿고 모두를 부처로 모시는 것이 일원상의 신앙입니다. 어쩌다 선풍기나 난로를 끄면서 발가락으로 끈 적이 있습니다. 며칠 전 신문에서 선풍기라는 시를 보았는데, 바로 우리 처처불상의 법문을 시로 쓴 느낌을 받았습니다. 더워서, 추워서 선풍기를 켜고 난로를 사용하고는 발가락으로 가볍게 눌러서 꺼 버린 내 행동을 반성합니다. 앞으로는 반드시 공손한 마음과 자세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끄겠다고 다짐합니다.

내가 소중하듯이, 대하는 사람마다 소중히 대하는 것입니다. 또한 대하는 물건마다 함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자세입니다. 모두가 부처이니 모두를 부처 모시듯 하는 것입니다. 나날이 신앙의 힘으로 행복하십시오.

원불교신문(http://www.wonnews.co.kr/)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