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경(大宗經)/제12 실시품(實示品)

제12 실시품(實示品) 30장

원재(Aid Perfection) 2014. 10. 6. 14:16

대종경(大宗經)

제12 실시품(實示品) 30장

한 제자 교중 초가 지붕을 이면서 나래만 두르고 새끼는 두르지 아니 하는지라,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밤 사이라도 혹 바람이 불면 그 이어 놓은 것이 허사가 아닌가.] 하시었으나, [이 지방은 바람이 심하지 아니하옵니다.] 하며 그대로 두더니, 그 날 밤에 때 아닌 바람이 일어나 지붕이 다 걷혀 버린지라, 그 제자 송구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며 [대종사께서는 신통으로 미리 보시고 가르쳐 주신 것을 이 어리석은 것이 명을 어기어 이리 되었나이다.] 하거늘,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이번 일에는 그 든든하고 떳떳한 길을 가르쳐 주었건마는 그대가 듣지 아니하더니, 이제는 도리어 나를 신기한 사람으로 돌리니 그 허물이 또한 더 크도다. 그대가 나를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대는 앞으로 나에게 대도 정법은 배우지 아니하고 신기한 일만 엿볼 터인즉, 그 앞 길이 어찌 위태하지 아니하리요. 그대는 곧 그 생각을 바로잡고 앞으로는 매사를 오직 든든하고 떳떳한 길로만 밟아 행하라.]

나래

[방언] ‘이엉(초가집의 지붕이나 담을 이기 위하여 짚이나 새 따위로 엮은 물건)’의 방언(충남, 함경).

대도정법[大道正法]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큰 도리와 올바른 법. 대도와 정법을 함께 강조한 말. 소태산대종사는 1919년(원기4) 아홉 제자들과 함께 법인기도를 올리면서 “사람은 만물의 주인이요 만물은 사람의 사용할 바이며, 인도는 인의가 주체요 권모술수는 그 끝이니, 사람의 정신이 능히 만물을 지배하고 인의의 대도가 세상에 서게 되는 것은 이치의 당연함이어늘, 근래에 그 주체가 위(位)를 잃고 권모술수가 세상에 횡행하여 대도가 크게 어지러운지라, 우리가 이때에 먼저 마음을 모으고 뜻을 합하여 나날이 쇠퇴하여 가는 세도(世道) 인심을 바로잡아야 할 것”(《대종경》 서품5)이라고 했다.

소태산은 불법이 대도이지만 근대말 조선사회의 승려들은 독선기신(獨善其身)의 소승(小乘)에 떨어져 있음을 지적하고 부처님의 무상 대도에는 변함이 없으나 부분적인 교리와 제도는 이를 혁신하여, 소수인의 불교를 대중의 불교로, 편벽된 수행을 원만한 수행으로 돌리고자 했다(《대종경》 서품16). 그는 신기한 이적과 신통을 경계했으며 대도정법인 일원상의 진리를 올바르게 신앙하고 수행함으로써 광대 무량한 낙원세계를 이루고자 했다.(원불교대사전)

독선기신[獨善其身]

자신의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 《맹자(孟子)》 진심장의 ‘궁즉독선기신(窮則獨善其身)’에서 따온 것이다. 원래는 선비가 곤궁할 때에는 홀로 선을 행하면서 자신을 수양한다는 긍정적인 의미였으나, 뒤에 자신 한 몸의 편안함만을 꾀한다는 부정적 의미로 바뀌었다. 한 번 옳은 일이라고 생각이 되면 다른 사람과 함께하려는 노력이 없이 자기 혼자서만 온전하게 잘해 나가는 것으로 사람 사는 세상은 각양각색의 인간들이 뒤섞여서 더불어 사는 것인데,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독선기신하다 보면 소승에 떨어지거나 벽지불이 되기 쉽다. 또한 개인주의에 사로잡히기 쉽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이해하거나 표용하고 용서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아무리 옳고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독선기신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원불교대사전)

[든든하고 떳떳한 길]

<유법원 교무/평화교당>

이 법문의 요지는 미리 예방차원에서 지시하신 가르침을 그대로 받들지 않고 신통으로 보는 것을 경계하시고 든든하고 떳떳한 길을 밟고 행하도록 부촉하신 말씀이다.

부교무 시절에, 교감님께서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

“사람은 문리가 터져야 한다. 문리가 터지면 일의 기틀을 볼 줄 알아서 막히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때는 어쩌면 그렇게 시키는 일도 제대로 받들어 들이지 못했는지. 또 교감님께서는 “어쩌면 그렇게 부교무 눈에는 일이 보이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 당시는 그 말씀의 뜻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 말씀의 뜻이 새록 새록 느껴진다.

한 사람이 제자에게 “귀하의 선생님이 성인이라 하니 사리간에 무엇이든지 아시는가”하는 질문에 “다 아신다”고 대답했다. 그 사람은 다시 “그러면 비행기나 기차 제조하는 것도 아시냐”고 물었다. 그러자 “사리의 대체를 아시는 것이요. 그 대체는 근본을 말함인데 대소유무와 시비이해의 대의를 통달하므로 사리를 아신다는 것이지 말단의 기술부분까지 아신다는 것은 아니다”고 대답했다는 일산의 말을 들으시고 대종사는 “그말이 옳다” 하셨다.(변의품 15장)

사람들은 자기 시야와 근기와 그릇만큼 밖에 일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일의 기틀과 대체를 알면 모든 일과 이치가 손바닥 가운데 구슬처럼 투명하게 보일텐데 우리는 보이지 않는 진리를 보지 못하고 보이는 것밖에 보지 못하며,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들리는 소리밖에 듣지 못한다.

<실시품>에 ‘대종사 일이 없으실 때에는 앞으로 있을 일의 기틀을 먼저 보시므로 일을 당하여 군색함이 없으셨다’는 법문이 있다. 대종사님께서는 일의 기틀을 보시고 뒤탈을 없게 하기 위하여 마무리를 철저하게 잘 하도록 하신 것이다.

우리의 대강 대강은 크고 작은 많은 일에 뒤탈을 불러온다. 매사를 대강 대강 보고, 누구의 말일지라도 대강 대강 듣고, 매사를 대강 대강 처리하고 그러므로서 수 많은 불신과 오해를 불러오는 원인이 되고 또 중대사를 그르치게 된다.

흔히 교도님들은 일의 기틀을 보고 하는 말도 그 말이 딱 맞아 떨어지면 교무님은 “훤히 다 알고 하시는 말씀”이라고 하며 마치 신통으로 뭘 볼 줄 아는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이 법문은 대도정법을 배워 든든하고 떳떳한 길보다 속성의 길을 택하려 하는 우리, 요행을 꿈꾸고 로또복권이나 꿈꾸는 우리들에게 좀 더뎌도 든든하고 떳떳한 길을 밟아 행하라는 경종의 메시지이다. 신통은 성현의 말변지사라! 오직 든든하고 떳떳한 길을 밟아 행할 진저.

문리(文理)

⑴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아는 일. 그일 그일에 문리가 터지면 능통하게 된다. 사리(事理)에 문리가 터지면 견성하게 된다. ⑵ 문장의 조리(條理)와 문맥(文脈). 글공부에 문리가 터지게 되면 한 번 보면 바로 그 뜻을 통달하게 된다.(원불교 용어사전)

[도와 신통]

<장석준 교무>

도를 배우되 선후를 알지 못하며 이치를 설하되 본말을 가리지 못하는 이는 사견이라 이름할 것이요 수도라 이름하지 못할지니… <수심결 8장 중>

지금까지 보조국사는 마음이 곧 부처이니 육근의 동작이 곧 불성의 작용이며 내가 바로 부처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이것이 곧 견성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견성을 하였다는 것은 곧 성인이 되었다는 것이며, 성인이라면 그렇지 못한 일반인과는 달리 마땅히 신통 변화를 부릴 수 있어야 할 텐데 어찌하여 오늘 날 마음을 닦는 사람은 많은데 신통 변화를 부리는 사람은 없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위와 같이 대답하고 있다.

흔히 우리는 도를 깨친 사람은 과거 전생을 훤히 안다든지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한다든지 또는 어떤 신비한 초능력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사(邪)와 정(正)을 분간하지 못하는 미혹되고 전도된 사람'임을 철저히 자각하여야 한다.

보조국사의 수심(修心)은 어디까지나 경계에 물들지 않고 공적영지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자는 것이지 결코 어떤 신비한 능력을 갖추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 그토록 마음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이다. 대종사께서도 ‘인도를 여의고 신통만 바란다면 이는 곧 사도(邪道)'라 경계하셨다.

든든하고 떳떳한 길을 가르쳐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신통으로 미리 보시고 가르쳐주셨다고 생각한 제자에게 ‘나를 신기한 사람으로 돌리니 그 허물이 또한 더 크도다’고 질책하신 실시품 30장의 말씀을 깊이 되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