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 서품(序品) 8장
대종경(大宗經)
제1 서품(序品) 8장
대종사 길룡리(吉龍里) 간석지(干潟地)의 방언(防堰) 일을 시작하사 이를 감역하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지금 구인은 본래 일을 아니하던 사람들이로되 대 회상 창립 시기에 나왔으므로 남 다른 고생이 많으나 그 대신 재미도 또한 적지 아니하리라. 무슨 일이든지 남이 다 이루어 놓은 뒤에 수고 없이 지키기만 하는 것보다는 내가 고생을 하고 창립을 하여 남의 시조가 되는 것이 의미 깊은 일이니, 우리가 건설할 회상은 과거에도 보지 못하였고 미래에도 보기 어려운 큰 회상이라, 그러한 회상을 건설하자면 그 법을 제정할 때에 도학과 과학이 병진하여 참 문명 세계가 열리게 하며, 동(動)과 정(靜)이 골라 맞아서 공부와 사업이 병진되게 하고, 모든 교법을 두루 통합하여 한 덩어리 한 집안을 만들어 서로 넘나들고 화하게 하여야 하므로, 모든 점에 결함됨이 없이 하려함에 자연 이렇게 일이 많도다.]
★★★★★★★★★
방언공사[防堰工事]
[개요]
원불교 교단 초기인 1918년(원기3)부터 1년간 소태산대종사와 제자들이 전남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 앞 해안 갯벌을 막아 농토를 만든 공사. 이 공사로 교단 창립의 물질적 토대 마련, 영육쌍전의 정신실현과 무시선 무처선의 수행정신 확립, 단결과 화합의 정신구현, 공익정신 배양 등 원불교의 정신적ㆍ물질적 기본 터전을 닦는 계기가 되었다.
[방언공사 과정]
소태산은 대각 후 제자들과 교단 창립기의 어려움을 극복하려 노력했으며, 이러한 노력의 하나가 길룡리의 간척개간이라는 방언공사였다. 방언공사는 1918년(원기3) 3월에 시작되었으며, 당시 간척사업으로서 바다를 막아 언답을 만드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언답을 쌓는 중장비도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로서 많은 노동력을 요하고, 또한 간척의 경비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초기교단의 운영과 방언공사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소태산은 창립제자들과 함께 저축조합을 설립하고 금주금연과 허례폐지를 시행했다.
이러한 일을 통해 저축 금액이 2백여원에 이르렀고 소태산 자신도 가산을 정리한 400원, 그리고 인근 부호에게 400원을 대부받아 총 1,000원의 자금을 마련했으며, 모인 돈으로 목탄을 구입했는데, 마침 목탄 시세가 올라 8,000~9,000원의 자금을 확보했다. 자금이 어느 정도 확보되자 방언공사를 결심하고 소태산을 따르던 창립제자들은 천지신명께 서약을 올린다.
“우리들은 다행히 대도대덕의 초창 시대를 당하여 외람히 단원의 중한 책임을 맡았는 바, 마음은 한 사문(師門)에 바치고 몸은 공중사에 다하여 영원한 일생을 이에 결정하옵고 먼저 방언공사를 착수하오니 오직 여덟 몸이 한 몸이 되고 여덟 마음이 한 마음이 되어 영욕고락에 진퇴를 같이하며 비록 천신만고와 함지사지를 당할지라도 조금도 퇴전치 아니하고 후회치 아니하고 원망치 아니하여 종신토록 그 일심을 변하지 않기로서 혈심 서약하오니 천지신명은 일제히 통촉하사 만일 이 서약에 어긴 자 있거든 밝히 죄를 내리소서”(《불법연구회창건사》 제11장).
소태산의 창립제자들은 이 서약을 마치고 다음날 즉시 비장한 결심으로 방언공사에 착수했다. 이에 소태산은 방언공사를 시작하여 감역을 하면서 제자들에게 말했다. “지금 9인은 본래 일을 아니하던 사람들이로되 대 회상 창립 시기에 나왔으므로 남다른 고생이 많으나 그 대신 재미도 또한 적지 아니하리라”(《대종경》 서품8)고 했다. 소태산은 일부 제자들에게는 새끼를 꼬게 했고, 다른 제자들에겐 말뚝으로 사용할 나무를 베어오게 하는 등 간척사업의 방축선을 정하고 방축재료는 갯벌 흙을 사용했다.
작업에 필요한 연장은 가래나 삽을 사용했으며 운반은 달구지나 지게, 망태기로 했다. 이처럼 힘겨운 방언사업을 시작한 지 1년만에 준공이라는 교단사적 업적을 이루게 된 것이다. 마을 앞의 간척지를 개간하여 2만 6천여평의 농토를 얻게 되었으니, 이는 초기교단의 기초가 되는 귀중한 토지가 되었으며 소태산과 제자들이 합심 노력한 결정체였다. 간척을 통해 얻은 농토는 ‘정관평’이라 했다. 1919년(원기4) 3월 방언의 준공을 마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옥녀봉 기슭 바위 상단에 성업을 기념하기 위해 이름을 새겼다.
이를 ‘제명바위’라고 하는 바, 약 3m 높이의 자연석 바위에 시멘트를 판처럼 바르고 간척공사 기간과 참여자 이름을 새겼다. 크기는 가로 80cm 세로 40cm에 오른쪽에서부터 한자 세로글씨로 “영광 백수 길룡(靈光白岫吉龍) 간석지 양처(干潟地兩處) 조합원 설시원(組合員設始員) 박중빈(朴重彬) 이인명(李仁明) 박경문(朴京文) 김성섭(金成燮) 유성국(劉成國) 오재겸(吳在謙) 김성구(金聖久) 이재풍(李載馮) 박한석(朴漢碩) 대정7년 4월 4일 시(大正七年四月四日始) 대정8년 3월 26일 종(大正八年三月二十六日終)”이라 음각했다.
방언을 준공하자 한일합방 10년만에 한민족의 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1919년(원기4) 3ㆍ1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소태산은 제자들에게 독립만세 소리는 “개벽을 알리는 상두소리니, 바쁘다 어서 방언 마치고 기도드리자”(《정산종사법어》 국운편3)라고 하며 법인기도를 올리는 계기가 된 것이다.
[방언공사의 정신]
영광 길룡리의 조그마한 마을에서 간척사업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으며, 주위에서 비평과 조소가 난무했다. 교단 창립기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간척사업에 중장비도 없이 괭이와 삽뿐인 기구를 동원하여 한줌 한줌 흙더미를 일렬로 줄을 서서 건네줌으로써 언을 쌓아나갔던 것이다. 더욱이 방언기간 동안 조수간만의 차가 심했다. 한 달 가운데 사리기간인 보름 동안은 공사를 계속할 수 없었고, 인부가 많을 때는 하루 50여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품삯이 많이 지출되었다.
사실 조수 간만의 차와 태풍, 홍수 등으로 둑이 일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었지만 일심합력의 정신으로 진력을 다했다.
한번은 방언의 둑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김광선이 언답을 둘러보던 중 제방에 구멍이 뚫려 바닷물이 흘러드는 것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몸을 던져 물구멍을 막았던 일도 있었다. 언답의 조그만 구멍이 커져 무너지려는 상황에서 자신의 몸을 던져 구멍을 막았던 정신은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교단을 위하는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방언공사를 진행하던 중 인근의 부호 한 사람이 분쟁을 일으켜, 관청의 허가를 받아 간척한 땅을 차지하려고 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는 조합원들의 결실로 이루어진 언답을 빼앗을 욕심으로 간석지 대부(貸付)원서를 쌍방 제출한 후, 이 토지권이 장차 자기의 소유가 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때 제자들이 낙심하며 그 부호를 원망하자, 소태산은 제자들에게 “공사 중에 이러한 분쟁이 생긴 것은 하늘이 우리의 정성을 시험하려 하심인 듯하니, 제군은 조금도 거기에 끌리지 말고 또는 저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하지도 말라. 일은 반드시 바른 대로 돌아오는 것이 이치의 당연함이어니와 설령 우리의 노력한 바가 헛되어 저 사람의 소유로 된다 할지라도 우리에 있어서는 양심에 부끄러울 바가 없으며, 또는 우리의 본의가 항상 공중을 위해 활동하기로 했으니 비록 처음 계획과 같이 대중을 위해 사용하지는 못하나 그 사람도 또한 대중 중 한 사람은 되는 것인즉 다못 한 사람에게라도 그만한 이익을 주지 않는가”(《대종경》 서품9)라고 했다.
소태산이 말한 대로 세상사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 부호의 토지권 소유의 분쟁은 원만히 해결이 되었다. 또한 일제강점기의 각종 사찰 속에서 불법연구회는 영산에서 방언공사를 하는 것으로부터 당국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공사 자금과 인부들의 노임을 조사하고 “당신들은 사가를 불고하고 이런 일을 하니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냐”고 따지면서, 방언공사가 끝날 무렵 소태산을 영광경찰서로 연행하여 여러 날 심문했다. 이러한 안팎의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방언공사를 성공리에 마쳤으나 방언답은 4~5년간 염독(鹽毒)으로 흉작을 거두어 곤궁한 생활을 면치 못했다. 이후 1955년(원기40)부터 3년여 동안 제2방언사업을 실시했는데, 1, 2차 총 공사면적은 5만 3천여평에 달한다.
[방언공사의 의의]
하루는 이춘풍이 와서 소태산을 뵈오니, “저 사람들이 나를 찾아온 것은 도덕을 배우려 함이어늘, 나는 무슨 뜻으로 도덕은 가르치지 아니하고 이 같이 언을 막으라 했는지 아는가”(《대종경》 서품10)라고 물었다. 초기교단의 창립정신을 깊이 새겨보라는 의미로서 방언의 정신을 계승하는 길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과제를 던져준 것이다. 방언공사의 의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방언을 통해 초기교단의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여 공부하는 비용을 준비하게 하고, 동심합력으로 나아가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증거를 보이기 위함이다. 일심합력을 통해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시와 종을 일관하는 성취감을 갖게 해주자는 것이다.
② 제자들의 굳은 신심이 있고 없음을 알기 위함이다. 험난한 방언공사를 전개하면서 도덕을 공부하러 온 사람들의 신심 정도를 파악하는 지렛대로 삼은 것이다. 이웃 사람들의 조소를 받으며 노동의 경험도 없는 사람들로서 힘에 부치는 힘든 일을 하게 하는 것으로 제자들의 참된 신심이 있고 없고를 시험하기 위함이었다.
③ 근로사업으로 자작자급의 방법을 보아서 복록이 오는 근본을 알게 하고자 함이다. 방언답을 완성함으로써 여기에 곡식을 심어 식량을 확보하는 것은 인과의 차원에서도 분명한 것으로 노력을 하면 그만큼 결실이 온다는 복록의 소종래를 알리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당시 미신적 요행이나 걸식과 같은 구습을 타파하기 위한 소태산의 염원이기도 했다.
④ 앞으로의 종교는 노동을 중시하여 영육을 쌍전하고 이사를 병행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저축조합과 방언공사 등을 통하여 특별한 노력과 근로가 아니면 사업의 토대를 세우기 어렵다고 하며 공동출역을 하게 한 것이나, 간석지의 방언공사를 한 것은 과거종교의 정적 수행을 벗어나 도학과 과학을 병행하고 동과 정, 영과 육을 병행하게 한 것이다.
⑤ 방언공사는 개척정신과 공익정신을 심어주고 있다. 1990년(원기75) 3월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서 원불교는 ‘새로 일어난 종교’란 제목으로 소개되었는데 “원불교에서는 교도들과 함께 간척사업을 통하여 자립하는 생활과 공익정신을 실천하고, 앞으로 다가올 문명한 시대에는 우리 민족이 정신적으로 세계를 이끄는 국민이 될 것을 예시함으로써 일본의 지배를 받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고 했다. 방언공사가 국토개간을 통한 사회공익에 기여한 점이 높이 살 만하다는 것이다.
⑥ 무엇보다도 방언공사의 의의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창립정신과 관련된다는 점이다. 일심합력과 근검절약ㆍ무아봉공 등의 정신으로 창립기의 저축조합과 방언공사의 결실을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방언공사에서 일심합력이라는 원불교의 창립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원불교대사전)
간척사업[干拓事業]
[개요]
호수나 바닷가에 둑을 쌓아 그 안의 물을 빼내고 농경지 등으로 만드는 일. 원불교에서는 창립초기에 간척사업을 했는데 이를 방언공사(防堰工事)라고 한다.
[한국의 간척사업 유래]
일찍이 한국에서도 간척사업이 행해진 적이 있었다. 간석지 개발 사례는 기록상으로 1246년 고려 고종조에 명장 김방경(金方慶)이 서북면 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몽골의 침입으로 주민들과 위도(葦島: 평북 정주군 소재)에 들어가 바닷가에 둑을 쌓고 씨 뿌려(築堰播種) 가을에 풍작을 이루었다 하며(《고려사》 권104), 그 뒤 1256년(고종43) 2월 몽골 침입으로 고려 조정이 강화도에 머물 무렵 포구를 방축(防築)하여 둔전(屯田)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보인다(《고려사》 권79).
1세기 뒤인 1356년(공민왕5)에도 전라도 임피 연해지역에 왜적을 막는 군졸을 써서 축제 한수(築堤捍水)하여 양전(良田)으로 삼았다는 기록(《고려사》 권82) 등 고려조 13ㆍ4세기경에 종종의 간척사업의 사례가 보이고 있다. 다만 위 사실들은 일상적인 여건하에서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군사들의 집단적인 인력을 이용하여 둑을 막았다는 점이 특징이다. 본래 간석지 개발은 많은 인력을 일시에 동원하여야 가능한 것으로 민간 차원에서는 엄두도 내기 어려웠다.
16세기 조선조에는 언답 개발에 관심이 높아져 문헌상으로 ‘언답(堰畓)’ ‘언전(堰田)’이란 말이 하나의 고유명칭으로 대두되었다. 1557년(명종12) 4월 《명종실록》 무신조의 전라관찰사의 장계를 보면 영광지역에 폭풍우가 크게 몰아쳐 ‘해변언답(海邊堰畓)’이 침수가 되었다는 기록이 최초의 예이다. 조선조 선조 때 토정 이지함(土亨李之函)이 충청도 아산 현감으로 부임하여 첫 공사로 걸인들을 불러 모아 관아에 있는 곡식을 먹이고 각자 기능에 따라 일을 시켰다. 둔전과 구황지(舊荒地)를 일구어 농토로 개간했고 더러는 배를 타고 고기를 잡도록 했다.
구황지란 아무도 돌보지 않는 버려진 오래된 황무지, 곧 개펄 따위를 말하는데, 바다를 막아 땅을 넓히는 일이다. 관아가 바로 아산만에 연해 있어서 토정은 개펄을 개간하여 거지들에게 살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강화도에서는 고려 후기, 조선시대에 간척사업이 끈질기게 펼쳐졌다. 현재 고가섬ㆍ환산섬ㆍ동검섬 등이 간척으로 강화도 본도에 이어졌고, 호도면 사기리 입구에는 ‘선두포 축언 시말비’가 서 있는데(1707년 건립), 그것은 18세기 초 선두포에 간척용 둑을 쌓은 내용을 새긴 비석이다.
조선 후기에 와서 농업 생산력 향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정약용(丁若鏞)은 조수를 방지하여 기름진 농지를 만드는 해언(海堰)에 대해(《목민심서》 제11권), 서유구(徐有榘)는 염분을 제거하고 벼를 심는 방법에 대해 언급했다(《임원십륙지》). 1900년대 접어들면서 나라에서는 경지 확장의 필요를 느꼈다. 평지의 확장에 있어서는 공유수면(公有水面) 등 미간지를 개척하는 길뿐인데, 위정 당국은 적극적으로 개간을 장려하는 대상을 국유미간지로 했다. 당시 국유 미간지에 대해서 정확한 조사는 없었지만, 대개 측량한 바는 간석지 20만 정보, 하천변의 황무지 7만 정보, 산기슭 경사지 80만 정보로서 그 태반이 국유지였다(조선총독부, 《대정1년시정년보》).
1907년에 국유 미간지 이용법을 발표하고, 1908년에는 간석지 150정보, 초생지 40정보, 계190정보의 이용 개척이 허가되었다(조선총독부, 《명치39년시정연보》).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시작된 이듬해부터 국유미간지 대부가 본격화되었다. 한일합방 전 1908년에 국유미간지 대부가 총 190정보이던 것이, 1911년에는 7,233정보로 늘어났고, 간석지 대부도 합방 전 1908년에 150정보에 불과하던 것이 합방 1년 뒤인 1911년 말에는 6,967정보로 무려 46배의 증가를 보이고 있다.
간석지 대부는 1911년에 겨우 80건에 불과하던 것이 소태산대종사가 길룡리 방언역사를 할 당시인 1918년에는 1,149건으로 증가했다. 1911년에는 서울에 인접한 황해도와 경기도에서 간척사업이 가장 성행했으며, 서해안인 충청도와 전라도에서도 활발히 진행되어 간석지 면적상으로는 전라남도가 가장 많은 1,857정보가 대부되었다. 1911년부터 1919년까지의 간석지 대부 총면적을 보면 황해도 38,826정보, 다음으로 전라남도가 38,526정보의 간척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간척사업은 일제의 산미 증산 계획에 의해 거의 일인들이 주도되어 경기도를 중심으로 황해도, 충청도에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특히 충청도 아산만과 태안반도 등지는 간만의 차가 심하여 간척사업을 하기에 매우 적당하여 이 무렵 민간인들 사이에도 소규모 개펄막이가 성행했다.
[영광지역 간척 현황]
1918년도 전남지방에는 114건의 간척공사가 진행되었다. 길룡리에서 4km 떨어진 법성포 근방에서도 일인들에 의해 간척사업이 시작되었다. 이 지역은 벌써 1백년 전에 전라감사 이서구(李書九)가 개펄이 변해 논이 될 것을 예언했던 곳이다. 그로부터 백여년 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고 1918년 개펄이 질펀한 해변의 양쪽 사이에 둑을 막아 큰 간척답이 되었다. 이서구의 예언대로 칠암면을 ‘넓은 농토(弘農)’라 개명한 그대로 홍농면이 되었다. 이서구의 예언은 조선총독부 《관보》에서 바로 확인된다.
홍농면 단덕리 샛목(乙津)과 고창군 공음면 마래까지 20여리 바닷물이 들어가던 간석지 124정 1808정보가 일본인(弦間孝三)에 의해 국유미간지 대부 허가를 받아, 1918년(대정7년) 9월 7일자로 고베시(神戶市加納町 1정목 1번지)에 사는 일본인(川岐芳太郞)에게 양도되었다(《관보》 1830호). 1918년이라면 원불교 초기 방언조합이 길룡리 간석지에 방조제 공사를 시작하던 해로 이해 영광군내 여러 곳에서 간척사업이 전개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 《관보》에 나타난 자료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영광면 백학리에 사는 조희경이 염산면 상계리에 제방을 쌓고 논 13정보를 개척했다(《관보》 1735호).
② 일인 아베 사부로(阿部三郞)가 운영하는 아베농장(현 백수교당 자리에 있는 일인 농장)에서도 백수읍 장산리ㆍ송림리와 영광면 덕호리에 124정 2,611보를, 염산면 봉남리 간석지 79정 811보를 논으로 개발, 대부 허가를 받았다(《관보》 1758, 1759호). 또 선진포 건너 입암리에도 일본인이 3정 8,316보를 국유미간지 대부지로 대여받았다.
③ 1919년도 들어 영광군내에서도 일인들을 중심으로 간척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919년 7월 8일자로 백수읍 학산리 아베농장은 염산면 봉남리의 약 80정보의 간석지 대부 허가를 받아내었다(《관보》 2131호).
④ 동년 9월 12일자로 바바 유이찌(馬場有一)가 와탄천에서 영광읍 근처까지 갯물이 들어가는 영광천변의 무령리 5정여의 간석지를 대부받았다(《관보》 2134호).
[길룡리 방언조합 의의]
길룡리 방언조합은 1919년 9월 16일자에 길룡리 간석지 7정 1,924보를 대부 허가 받았다(《관보》 2134호). 길룡리 방언조합의 이른바 ‘방언공사’ 진행을 전후하여 영광군내 도처에 간척사업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길룡리 인근 마을인 장산리ㆍ덕호리ㆍ입암리 등지에서도 간척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어 주민들 사이에 큰 관심사로 떠올랐다. 당시 영광에서 가장 큰 규모인 홍농들 간척사업은 구수미에서 바로 눈앞에 보인다. 길룡리보다 한 해 앞서 준공된 이 공사를, 소태산은 구수미나루에 서서 지켜보기도 했을 것이며, 나룻배로 건너가 꼼꼼하게 현장을 살펴보기도 했을 것이다.
목냉기와 자갈금 두 야산 사이의 좁은 물목을 막아 124정보의 방대한 간척답을 이룬 홍농들에 비한다면 길룡리 간석지는 10정보에 불과하지만 양쪽 다 방조제 길이는 600m 남짓하다. 당시 대부분의 국유미간지 개척은 일인들을 중심으로 조선총독부의 기술 지원과 막대한 자금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소태산은 일인들처럼 영리 위주의 개척사업을 전개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주민들의 의식 개혁과 더불어 생업 확충에 더 관심을 가지고 방언공사를 전개했다. 비록 소규모의 개펄막이에 불과하지만 조선 사람들의 손에 의해 자력으로 이루어졌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원불교대사전)
도학[道學]
(1) 윤리ㆍ도덕에 관한 학문.
(2) 유학, 특히 송대(宋代) 정주학파의 학(學). 곧 심성(心性)ㆍ이기(理氣)의 학으로 유교만이 도(道)를 분명히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다. 주자(朱子)의 《중용장구(中庸章句)》 서(序)에 “도학이 그 전승을 잃을까 두려워 자사(子思)가 《중용》을 지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도학 가운데는 도통(道統)이란 뜻도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3) 도교(道敎), 도교의 학.
(4) 지식이나 기술을 배우는 과학에 대해서 지혜를 밝히고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를 하는 종교의 가르침.
(5) 원불교에서는 도학과 과학을 아울러 닦아야 원만한 인격을 이룰 수 있다고 하여 도학ㆍ과학의 병진을 주장하면서도 주가 되는 도학의 중요성을 많이 역설하고 있다. 소태산대종사는 “도학 공부는 모든 학술의 주인이요, 모든 공부의 근본이 되는 줄을 항상 명심하라”(《대종경》 교의품28)했고, “안으로 정신문명을 촉진하여 도학을 발전시키고 밖으로 물질문명을 촉진하여 과학을 발전시켜야 영육이 쌍전하고 내외가 겸전하여 결함 없는 세상이 되리라”(《대종경》 교의품31)고 했다. 또한 “세상에 있어서 도학은 주가 되고 과학은 종이 되는 바 이 본말과 주종을 분명히 알아야만 비로소 도를 아는 사람이라”(《대종경》 인도품5)고 했으며, 정산종사는 “모든 학문의 근본이 되는 도학을 주로 가르치고 배우자는 것”(《정산종사법어》 무본편26)이라 했다.(원불교대사전)
과학[科學]
(1)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인 지식. 넓은 의미로는 ‘학(學)’과 같이 쓰이고 좁은 의미로는 철학 이외의 학문을 총칭하거나 자연과학을 일컬음. ‘과학’을 뜻하는 사이언스(science)는 지식이라는 뜻의 라틴어 사이언티아(scientia)에서 왔으며, 이는 ‘안다(I know)’는 뜻의 접두사 ‘scio-’에서 나왔다.
과학은 검증 가능한 방법으로 얻어진 지식의 체계를 말하는 것으로 폭넓게는 거의 모든 학문적 영역에 적용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분석적이며 실증적인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이라는 명칭은 19세기 무렵부터 자연과학(natural science)이라는 명칭으로 대체되었다. 자연과학은 수학ㆍ물리학ㆍ화학 등으로 세분화되었으며, 사회과학(social science)은 인류 및 동물의 사회생활에 대하여 연구하는 인류학 및 사회학 등의 학문들을 통틀어 일컫는다.
(2) 인간 육체의 편리를 도모하는 학문. 소태산대종사는 정신적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것을 도학(道學)이라 하고, 의ㆍ식ㆍ주 등 인간의 육신생활에 편리를 주는 것을 과학이라 했다. 그는 길룡리 간석지의 방언(防堰) 일을 시작할 때 제자들에게 “우리가 건설할 회상은 과거에도 보지 못했고 미래에도 보기 어려운 큰 회상이라, 그러한 회상을 건설하자면 그 법을 제정할 때에 도학과 과학이 병진하여 참 문명 세계가 열리게 하며”(《대종경》 서품8)라고 했다.
소태산은 “안으로 정신문명을 촉진하여 도학을 발전시키고 밖으로 물질문명을 촉진하여 과학을 발전시켜야 영육이 쌍전하고 내외가 겸전하여 결함 없는 세상”을 예견했다. 소태산은 물질문명에만 치우치고 정신문명을 등한시하면 마치 철모르는 아이에게 칼을 들려준 것과 같아서 어느 날 어느 때에 무슨 화를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 될 것이라 했다. 과학만 발전하고 도학이 약하게 되면 육신은 완전하나 정신에 병이 든 불구자와 같은 것이며, ‘정신문명만 되고 물질문명이 없는 세상은 정신은 완전하나 육신에 병이 든 불구자’로 비유했다. 도학과 과학이 고루 조화롭게 발전이 될 때, 내외문명이 병진되는 시대가 되어 결함 없는 평화 안락한 세계가 될 것이라 보았다.(원불교대사전)
병진[竝進]
‘아울러 나아간다’는 뜻.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두루 원만하게 신앙과 수행을 아울러 함으로써 완전한 인격을 이루어가자는 것이다. 원불교 교의의 특징이 되는 기본 정신의 하나로써 소태산대종사는 여러 방면의 병진을 강조하고 있다.
①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의 병진: 정신문명은 내적인 문명이며 물질문명은 외적인 문명인데 이 두 가지 문명이 병진 조화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바로 원불교의 개교정신이기도 하다. “안으로 정신문명을 촉진하여 도학을 발전시키고 밖으로 물질문명을 촉진하여 과학을 발전시켜야 영육이 쌍전하고 내외가 겸전하여 결함 없는 세상이 되리라…그 하나가 충실하지 못하고 어찌 완전한 세상이라 할 수 있으리요. 그러므로 내외 문명이 병진되는 시대라야 비로소 결함 없는 평화 안락한 세계가 될 것이니라”(《대종경》 교의품31).
또한 소태산대종사는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을 도학과 과학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우리가 건설할 회상은 과거에도 보지 못했고 미래에도 보기 어려운 큰 회상이라, 그러한 회상을 건설하자면 그 법을 제정할 때에 도학과 과학이 병진하여 참 문명 세계가 열리게 하며”(《대종경》 서품8)라고 했다.
② 신앙과 수행의 병진: 소태산은 신앙을 타력, 수행을 자력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 두 가지를 병진해야 원만한 종교인이 될 것으로 보았다. 예수교인인 금강산 여관의 주인의 예를 들면서 “그 사람은 아직 타력 신앙에 그치어 진리의 근본을 다 더위잡지 못했으나 그러한 생활을 하게 되었거든 하물며 자력신과 타력신을 병진하는 그대들로서 만일 파란곡절에 조금이라도 마음이 흘러간다면 그 어찌 바른 신앙이며 참다운 정성이라 하겠는가. 그대들은 같은 신앙 가운데에도 이 원만하고 사실다운 신앙처를 만났으니”(《대종경》 신성품12)라고 말하여 자타력을 병진하는 신앙을 제시하고 있다.
③ 사업 목표의 병진: 소태산은 “우리의 사업 목표는 교화ㆍ교육ㆍ자선의 세 가지니 앞으로 이를 늘 병진하여야 우리의 사업에 결함이 없으리라”(《대종경》 부촉품15)고 했다. 이를 다른 곳에서는 공부와 사업의 병진으로도 표현한다(《대종경》 서품8).(원불교대사전)
도학 과학의 병진[道學科學-竝進]
개인적으로 도학과 과학의 실력을 고루 갖추어 원만한 인격을 이루자는 것이며, 사회적으로는 도학문명과 과학문명을 균형 있게 발전시켜 가자는 것. 과학은 철학 이외의 학문을 총칭 또는 자연과학을 일컫는 말로 물질 기술문명을 일으킨 학문을 말하며, 도학은 도덕에 관한 학문으로 인간의 도리와 심성의 원리, 행위 규범 등을 연구하고 단련하는 학문을 말한다.
따라서 도학과 과학을 병진하자는 것은 과학문명을 발달시켜 물질적으로 편리하고 풍요로운 세상을 만들어감과 동시에 도학을 배워서 정신의 주체를 확립하고 과학문명의 이기를 선용할 능력을 갖추어 바람직한 이상세계를 만들어 가자는 목적으로 주장된 사상이다. 도학이라는 용어는 유학 특히 송대(宋代) 정주학파(程朱學派)의 학, 곧 심성이기(心性理氣)의 학을 도학 또는 심학이라고 부른 데서 비롯되었으며, 종교적으로는 도교사상을 도학이라 한다.(원불교대사전)
이사병행[理事並行]
[개요]
이치와 일을 아울러 수행하자는 것으로 이 표어는 《원불교교전》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처처불상 사사불공, 무시선 무처선, 동정일여 영육쌍전, 불법시생활 생활시불법 등의 교리표어의 뜻을 종합해서 표현한 개념이다.
[내용과 의미]
《대종경》에는 “큰 도는 원융하여 유와 무가 둘이 아니요, 이와 사가 둘이 아니며, 생과 사가 둘이 아니요. 동과 정이 둘이 아니니 둘 아닌 이 문에는 포함하지 아니 한 바가 없나니라”(《대종경》 성리품4)고 하여 원래 대도에는 이와 사가 둘이 아니요, 하나임을 명시했다. 이사병행에는 몇 가지 의미가 복합되어 있다.
첫째, 이는 공부를, 사는 사업을 의미한다.
공부는 주로 자신의 인격완성을 위한 구도의 노력을 의미한다면 사업은 이타적 행위, 사회와 교단과 세계를 위해 헌신하는 활동을 말한다. 이사병행은 공부심으로 사업을 하고 사업 속에서 공부를 찾아 동정간에 공부심을 놓지 않고 닦아 나가는 수행법으로 공부(工夫)와 사업(事業)을 병행하여 복(福)과 혜(慧)를 갖추자는 것이다. 공부는 지혜를 밝히는 것, 사업은 복덕을 쌓는 것에 역점이 있으므로 혜복쌍수의 뜻이 된다.
참 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공부와 사업의 어느 한 쪽에 치우쳐서는 안 되며 공부와 사업을 병행해야 하는 것이다. 전통 불교의 현상가운데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으로 나누어져 갈등을 일으킨 일이 있다. 이판은 고요한 가운데 수행에 매진하고 사판은 사원의 경영에 주력했으나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소태산대종사는 각 수행자가 공부와 사업을 병행하여야 혜복을 겸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교단제도에 있어서도 이사 양면을 두루 밝히고 교도의 원성적을 사정하는 것까지라도 공부등위와 사업등급을 합하여 정하도록 했다.
둘째, 이는 도학, 또는 정신문명을 의미하며 사란 과학, 또는 물질문명을 의미한다.
이사병행은 도학과 과학, 정신문명과 과학문명이 아울러 건전하게 발달하도록 하는 개교이념을 의미한다. 도학은 정신개벽의 길이요, 과학은 물질개벽의 길이다. 정신개벽과 물질개벽이 아울러서 이루어져야 마음낙원과 현실낙원의 이상적 낙원세계가 건설되는 것이다.
문명의 흐름을 살펴보면 정신문명을 고수하기 위해 과학문명에 등한한 감이 있었고, 현대에는 과학적 문명에 열중하는 가운데 정신문명에 등한한 경향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사상적으로 서로 이해와 융통이 없이 막히어 있었고 또 일방적으로 추구한 나머지 사람들은 정신과 육신에 균형을 유지하지 못했으며 세상은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여 우환과 고통을 면할 수 없었다. 소태산대종사는 이러한 큰 모순을 바로잡기 위해 이사(理事)가 둘이 아닌 원만한 대도를 드러내려고 한 것이다.
셋째, 개인의 생활에 있어 이는 수양ㆍ연구ㆍ취사의 삼학공부를 의미한다면 사는 의식주 등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노력을 의미한다.
이사병행이란 수양ㆍ연구ㆍ취사의 삼대력 증진과 의ㆍ식ㆍ주생활의 풍요를 함께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영육쌍전이라는 이념과 합치되는 의미이다. 삼학공부에 매진하여 삼대력을 얻었다 할지라도 의ㆍ식ㆍ주의 해결 없이는 행복한 삶이 되기 어려운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의ㆍ식ㆍ주의 생활이 풍요하다 할지라도 삼대력을 얻지 못하면 가치 있는 삶이 되기 어려운 것이다.
이 두 가지를 병행하여 수도와 생활이 조화롭게 이루어지도록 하자는 것이다. “새 세상의 종교는 수도와 생활이 둘이 아닌 산 종교라야 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제불조사 정전의 심인인 법신불 일원상의 진리와 수양ㆍ연구ㆍ취사의 삼학으로써 의ㆍ식ㆍ주를 얻고 의ㆍ식ㆍ주와 삼학으로써 그 진리를 얻어서 영육을 쌍전하여 개인ㆍ가정ㆍ사회ㆍ국가에 도움이 되게 하자는 것이니라”(《정전》 영육쌍전법).
넷째, 이는 대소유무의 이치, 곧 자연의 이법을 의미한다면 사는 인간사의 시비이해를 의미한다.
이사병행은 대소유무의 이치를 바르게 깨치고, 시비이해의 일을 정당하게 건설하여, 개인적으로는 이상적 인격을 이루는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이상세계를 건설하자는 뜻이다.
대소유무의 이치를 바르게 깨친다는 것은 정각(正覺)을 의미하고, 시비이해의 일을 정당하게 건설한다는 것은 정행(正行)을 의미한다. 정각 없는 정행은 있을 수 없고 정행 없는 정각은 무의미한 것이다. 이사병행의 수행을 정성껏 계속하면 누구나 궁극적으로 이치에도 걸림이 없고(理無碍) 일에도 걸림이 없는(事無碍) 큰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사병행은 이론과 실천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실천이 없는 이론은 공리공론에 떨어지기 쉽고, 이론 없는 실천은 방향 감각을 상실하기 쉽다. 이론과 실천의 일치라야 가치 있는 이론, 정당한 실천이 되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는 지행일치ㆍ각행일치의 뜻이 된다. 대소유무의 이치, 곧 자연의 이법의 증득이 바로 시비이해로 이루어진 인간사 건설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주체적인 통찰이 필요하다. 이에 소태산은 그 어려움을 이렇게 말한다. “우주의 진리를 잡아 인간의 육근동작에 둘러씌워 활용하는 사람이 곧 천인이요 성인이요 부처이다”(《대종경》 불지품12). 소태산은 이사병행의 이념에 바탕하여 제자들의 수행을 지도하고 교단창립에도 진력했다. 길룡리 간석지의 방언을 시작할 때 소태산은 이를 감역하며 이사병행의 방향을 명확히 했다.
“우리가 건설할 회상은 과거에도 보지 못했고 미래에도 보기 어려운 큰 회상이라 그러한 회상을 건설하자면 그 법을 제정할 때에 도학과 과학이 병진하여 참문명세계가 열리게 하며 동과 정이 골라 맞아서 공부와 사업이 병진되게 하고 모든 교법을 두루 통합하여 한 덩어리 한 집안을 만들어 서로 넘나들고 화하게 하여야 하므로 자연 이렇게 일이 많도다”(《대종경》 서품8).(원불교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