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일원상의 진리(一圓相-眞理)
정전(正典)
제2 교의편(敎義編)
제1장 일원상(一圓相)
제1절 일원상의 진리(一圓相-眞理)
일원(一圓)은 우주 만유의 본원이며, 제불 제성의 심인이며, 일체 중생의 본성이며, 대소 유무(大小有無)에 분별이 없는 자리며, 생멸 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며, 선악 업보가 끊어진 자리며, 언어 명상(言語名相)이 돈공(頓空)한 자리로서 공적 영지(空寂靈知)의 광명을 따라 대소 유무에 분별이 나타나서 선악 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며, 언어 명상이 완연하여 시방 삼계(十方三界)가 장중(掌中)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고, 진공 묘유의 조화는 우주 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無始曠劫)에 은현 자재(隱顯自在)하는 것이 곧 일원상의 진리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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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상의 진리[一圓相-眞理]
소태산대종사의 대각에 의하여 밝혀진 우주의 근본 원리와 인간의 본질 등에 관한 궁극적 진리. ‘교리도’에서는 이 일원상진리를 법신불이라 선언하고, 또한 이를 우주만유의 본원, 제불제성의 심인, 일체중생의 본성이라 단정했다. 원불교는 이 일원상의 진리를 최고의 종지로 삼아,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서 법신불일원상을 본존으로 받들어 모신다. 일원상의 진리는 진공ㆍ묘유의 양면성(兩面性) 또는 공ㆍ원ㆍ정(空ㆍ圓ㆍ正)의 삼속성(三屬性) 외에, 불생불멸과 인과보응, 변 불변 등 다양한 구조로 파악될 수 있다.
《정전》에서는 ‘일원상 진리’의 내용설명으로서 “우주만유의 본원, 제불제성의 심인(心印), 일체중생의 본성, 대소 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 생멸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 선악업보가 끊어진 자리, 언어명상이 돈공(頓空)한 자리이나,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대소유무에 분별이 나타나서 선악업보에 차별이 나타나고, 언어명상이 완연하여 시방삼계가 손바닥 위의 한 구슬처럼 드러나며, 진공묘유의 조화는 우주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에 은현자재(隱現自在)한다”고 명시했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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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상의 진리(一圓相-眞理)
일원상은 소태산 대종사가 깨친 인생과 우주의 궁극적 근본진리의 상징적 표현이다. 진리의 궁극처는 텅 비어 아무것도 없지만 무궁 무진한 조화를 부리어 우주 만물을 생성 변화시킨다. 궁극적 진리는 말로써 가히 설명할 수도 없고, 형상으로 어떻게 그릴 수도 없으나, 방편이나 말로써 설명하기도 하고, 형상으로 그리기도 한다. 소태산 대종사는 일원상의 진리를 「우주 만유의 본원, 제불 제성의 심인, 일체중생의 본성, 대소 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 생멸 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 선악 업보가 끊어진 자리, 언어 명상이 돈공한 자리로서 공적 영지의 광명을 따라 대소 유무에 분별이 나타나서 선악 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며, 언어 명상이 완연하여 시방 삼계가 장중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고, 진공 묘유의 조화는 무시 광겁에 은현 자재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① 우주 만유의 본원
우주 안에 있는 온갖 사물, 곧 삼라만상의 근원이라는 뜻이다. 천차 만별 형형 색색으로 나열되어 있는 우주 만물의 최초의 근원은 하나이며, 그 하나가 곧 일원상의 진리요, 따라서 우주 만물은 일원상의 진리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궁극적 진리를 부처님·하나님·태극·무극·도·법·마음 등등으로 설명하는 것은 곧 우주 만유의 근원이라는 뜻이다.
② 제불 제성의 심인
시방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일체 성현들이 깨친 본래마음 이라는 뜻이다. 제불 제성이 시대와 장소를 따라 각각 다른 모습으로 출현하여, 각각 다른 표현으로 진리를 말하지만, 결국은 한 마음을 깨친 것이요, 그 마음이 곧 일원상의 진리이며, 시절따라 인연따라 다르게 설명했을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제불 제성은 한결같이 깨친 마음의 경지를 중생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③ 일체중생의 본성
진리를 깨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의 본래 마음 이라는 뜻이다. 제불 제성의 심인과 일체 중생의 본성은 둘이 아니요 하나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생도 깨치면 부처가 되고, 부처도 어두워지면 중생이 된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마음은 보리심이요, 중생의 마음은 번뇌심이다. 그래서 번뇌가 곧 보리요, 보리가 곧 번뇌이며, 부처가 곧 중생이요, 중생이 곧 부처라고 하는 것이다.
④ 대소 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
일원상의 진리는 우리의 본래마음이기 때문에, 본래마음에는 일체의 분별이 없다는 뜻이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삼세의 분별도 없고, 대소 유무·선악 귀천·염정 미추·동서 남북·남녀 노소·청황 적백 등 일체의 분별이 없는 것이다. 천지가 나누어지기 이전의 세계요, 한 마음이 일어나기 이전의 소식이라 아무런 분별이 없는 것이다.
⑤ 생멸 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
불생불멸·영원무궁·여여자연한 경지라는 뜻이다. 하늘의 해가 한없이 오랜 세월에 걸쳐 아침에 뜨고 저녁에 지기를 되풀이 해도, 영원한 세월에 해는 오직 하나일 뿐이다. 그래서 와도 왔다 할 것이 없고, 가도 갔다 할 것이 없으며, 태어나는 것도 아니요 죽는 것도 아닌 여여자연한 것이다.
⑥ 선악 업보가 끊어진 자리
본래 마음은 분별도 없고 생멸 거래도 없기 때문에 선악 죄복도 없다는 뜻이다. 선도 없고 악도 없으며, 죄도 없고 복도 없으며, 극락도 없고 지옥도 없어,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 것이다.
⑦ 언어 명상이 돈공한 자리
본래 마음은 텅 비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언어 문자로도 설명할 수가 없고, 무어라고 이름 지을 수도 없으며, 어떻게 형상으로 그릴 수도 없다는 뜻이다. 여기 까지는 일원상의 진리의 본체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본체는 본체 그대로 머물러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궁 무진한 작용을 하는 것이다. 진리의 작용은 공적 영지의 광명을 따라 진공 묘유의 조화로 나타난다. 공적이나 진공은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진리의 본체를 설명하는 말이요, 영지나 묘유는 진리의 작용을 설명하는 말이다. 공적이 되면 영지의 광명이 나타나고, 진공이 되면 묘유의 조화가 나타나는 것이다.
⑧ 대소 유무에 분별이 나타나서 선악 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며
깨친 마음은 공적이 되고 공적이 되면 영지의 광명이 나타나서 우주 삼라만상이 천차 만별 형형 색색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천만 경계따라 선악 업보를 짓게되어 선악 죄복이 분명하게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⑨ 언어 명상이 완연하여 시방 삼계가 장중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고
삼라만상은 각각 언어 명상으로 나타나고 구별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만물은 다 모양이 각각이고 이름도 또한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⑩ 진공 묘유의 조화는 우주 만유를 통하여 무시 광겁에 은현 자재한다.
진리는 우주 만유를 통하여 한 없는 세월에 나타났다 숨었다 하면서 돌고돌며 영원 무궁하다는 뜻이다. 「일원상 게송」에서 「유는 무로 무는 유로/돌고 돌아 지극하면/유와 무가 구공이나/구공 역시 구족이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진리는 하나이며, 영원 무궁하고 불생 불멸하며, 순환 불궁하고 무시 무종하여 여여자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일원상의 진리를 깨쳐서 일원상의 진리와 함께 사는 사람은, 시방일가 사생일신이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무궁한 세월에 우주의 창조적 주인으로 살게되는 것이다.(원불교 용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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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상 진리의 인식(一圓相眞理―認識)
진리 그 자체는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어서, 볼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깨치면 눈으로 볼 수도 있고 손으로 붙잡을 수도 있으며, 육근 동작을 통하여 자기 마음대로 활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꽃이 피는 것을 보고 봄이 오는 줄을 알며,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가을이 오는 줄을 알게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주의 운행, 천지의 변화, 인간의 심신 작용을 통해서 일원상의 진리를 볼 수도 있고 알 수도 있는 것이다.
⑴ 공(空)·원(圓)·정(正)
공은 법신불, 원은 보신불, 정은 화신불이다. 공은 견성, 원은 양성, 정은 솔성이다. 인간의 심신 작용에 비추어보면, 유도 아니요 무도 아닌 유무를 초월한 경지를 볼 줄 알고, 언어도가 끊어지고 심행처가 멸한 경지를 알며, 모든 일에 무념행을 하는 것이 공이다. 마음이 천만 경계에 끌려다니지 않고, 지혜가 한 없이 밝아서 이무애 사무애의 능력이 있으며, 모든 일에 애착·탐착·집착·편착이 없이 텅 빈 마음으로 작용하는 것이 원이다. 마음이 어느 한 편에 기울어지지 않아서 공변되고, 모든 사물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판단할 줄을 알며, 모든 일에 공명 정대하게 중도행을 할 줄 아는 것이 정이다.
⑵ 도와 덕
도라는 것은 우주의 대기(大機)가 자동적으로 운행하는 것으로, 불생불멸의 진리와 인과보응의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경우에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길, 떳떳한 길, 당연한 길로서, 인의·자비·박애등을 말하는 것이다. 덕이라는 것은 도가 행해짐에 따라서 나타나는 결과로서 은혜를 말하는 것이다. 도는 진리의 근본 곧 체를 말하는 것이요, 덕은 진리의 활용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천지의 도를 체받아 그대로 활용하면 거기에 따라 큰 덕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천지의 도를 체받는다는 것은 천지와 같이 크게 텅 빈 마음이 된다는 것이요, 큰 덕이 나타난다는 것은 공변된 중도행을 한다는 것이다. 텅 빈 마음을 갖게되면 크게 공변된 마음으로 심신 작용을 하게되고, 그러한 행동은 그대로 덕으로 나타나서, 만물에게 은혜를 베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텅 빈 마음으로 은혜를 베푸는 사람의 심신 작용은 그대로 일원상의 진리와 하나의 경지가 되는 것이다.
⑶ 동(動)과 정(靜)
사람의 성품이 정(靜)할 때는 선도 없고 악도 없는 무선 무악이 된다. 그러나 성품이 경계따라 동(動)하게 되면 능히 선하기도 하고 능히 악하기도 한 능선 능악의 경지가 된다. 우주의 진리는 동과 정이 조화를 이룬 상태이다. 그러므로 사람도 동정일여의 수행, 곧 무시선 무처선으로 동하여도 분별에 착이 없고 정하여도 분별이 절도에 맞는 경지를 얻게되면, 우주의 동정과 내가 하나가 되고 일원상의 진리와 내가 합일되는 것이다.
⑷ 이(理)와 사(事)
이무애 사무애의 경지에 도달하면 육근동작이 다 일원상의 진리에 계합되는 것이다. 대소 유무의 이치, 생주이멸의 이치, 성주괴공의 이치, 춘하추동의 이치, 진급강급의 이치 등에 확철 대오하고, 인생의 생로병사·흥망성쇠·길흉화복·선악죄복·빈부귀천·시시비비 등 모든 일에 대해서 손바닥 위의 구슬처럼 꿰뚫어보는 것이 이무애 사무애이다. 이무애 사무애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정신의 수양력을 얻어 천만 경계에 치연히 작용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여여자연하게 되는 것이다. 본래 마음 그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걸음 걸음이 경전이요, 동작 동작이 성불 제중이 되는 것이다. 또한 사리의 연구력이 생겨나서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신통 불가사의한 재주를 얻게되는 것이다. 마음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시방 삼세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또한 작업의 취사력이 생겨나서 모든일에 중도행을 하게 되고 혜복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마음속에 아무런 두려움이나 불안이 없고, 생로병사 희로애락에도 끌려가지 않는 것이다. 가는 곳마다 세상의 주인이 되고, 하는 일마다 진실한 것이다.
⑸ 변과 불변
변은 변하는 진리 곧 인과보응의 이치를 말하고, 불변은 불변의 진리 곧 불생 불멸의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일원상의 진리는 스스로 조화 자재하고 조화 무궁하여 능히 영원불멸하기도 하고 변화무상하기도 하여, 불생 불멸의 진리와 인과 보응의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이루고, 무궁 무진·활살자재·대기대용의 천만 조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영원 불멸의 입장에서 보면 시공을 초월하여 여여자연한 것이요, 변화무상한 입장에서 보면 우주는 성주괴공·생주이멸로 변화하고 만물은 생로병사로 변화하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몇가지 입장에서 우주에 가득 찬 일원상의 진리를 느끼고 체험하며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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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상 진리의 활용(圓相眞理―活用)
일원상의 진리를 깨친다는 것은 성불의 첫걸음이므로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진리를 깨치는 일 못지않게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진리를 현실생활 속에서 체험하고 활용해야만 비로소 진리를 깨친 의미가 살아나기 때문이다. 진리는 인간이 깨치기 위하여 존재한다기 보다 오히려 체험하고 활용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진리를 활용하는 방법]
①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생활
일원상의 진리를 깨친 사람의 눈에는 이 세상은 처처불상의 세계이다. 삼라만상 어느것 하나도 부처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만물이 다 화신불인 것이다. 진리를 깨친 사람은 육신의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 지혜의 눈으로 사물을 본다. 그래서 시방 삼세는 부처님의 나라요 삼라만상은 화신불이다. 이 세계는 은혜의 세계요, 아름다운 세계이며, 즐거운 세계인 것이다. 세상 사람들도 다 삼세 제불로 보이는 것이다. 과거세의 부처님, 현재세의 부처님, 미래세의 부처님들이 사는 세상이라 항상 상불경 보살의 정신으로 모든 사람들을 부처님처럼 공경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진리를 깨친 사람의 눈에 이 세상은 처처불상이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불공의 생활이 되는 것이다.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걸음 걸음이 불공하는 생활이기 때문에 감사 보은의 생활이 된다. 복혜 증진으로 은생어해하고, 진급하는 생활로 영원한 세상에 생사 자유하게 되는 것이다.
② 무시선 무처선의 생활
진리를 깨친 사람은 부귀 공명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천만 경계에도 마음이 끌려가지 않는 것이다. 오직 본래 마음 찾아가는 일이 가장 크고 급한 일이다. 본래 마음이 곧 깨친 마음이요, 깨친 마음이 곧 부처임을 알게되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를 깨친 사람은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항상 마음 찾는 공부를 하는 것이다. 곧 무시선 무처선의 수행을 하는 것이다. 진리를 깨친 사람은 일상생활 그대로가 선(禪) 수행인 것이다. 가고 오고, 일하고 놀고, 잠자고 노래하고, 밥먹고 물 마시는 일 모두가 선 수행인 것이다. 또한 이 세상 어디나 다 선방이 된다. 세속과 도량을 구별하지 않는다. 절간이라 좋아하고 시장바닥이라 싫어하지도 않는다. 가는 곳마다 부처님의 성지(聖地)요 하는 일마다 부처님의 사업인 것이다.
③ 동정일여 영육쌍전의 생활
진리를 깨친 사람은 항상 동정일여·동정상안(常安)의 생활을 하게된다. 일을 할 때에는 육근 동작이 법도에 맞고, 일이 없을 때에는 청정일심으로 편안한 생활을 하게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아무리 시끄럽고 혼란스러워도 마음이 언제나 편안하다. 세상의 유행 바람에도 휩쓸리지 않고, 세상의 풍조에도 물들지 않는 것이다. 동중정·정중동의 생활로 항상 진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다. 진리를 깨친 사람은 또한 영육쌍전의 생활을 하게 된다. 법신여래와 색신여래를 함께 발견하여 불공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정신과 건강한 육신으로 정신과 육체가 조화를 이루어 바람직한 인간이 되어 역사 창조의 주역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수행생활과 현실생활, 지혜와 복락, 이상과 현실, 도학과 과학, 공부와 사업을 병행하여 국가와 사회에 공헌하는 인물이 되는 것이다.
④ 이사병행의 생활
진리를 깨친 사람은 이사병행의 생활을 한다. 이(理)에 치우치거나 사(事)에 집착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이(理)는 정각이고 사(事)는 정행이 된다. 따라서 진리를 바르게 깨쳐, 그 진리를 일상생활 속에서 체험하고 활용하는 것이다. 이무애 사무애의 큰 힘을 얻게되는 것이다. 대소 유무의 이치에 걸리고 막힘이 없기 때문에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어느 것에도 구속받지 않고,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않는 것이다. 스스로 진리를 바르게 보고 사물을 바르게 판단하며 모든일을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것이다. 시비이해의 일에도 걸리고 막힐 것이 없기 때문에 항상 불의에 굴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인이라야 정의를 바르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정의의 이름으로 불의를 행하지도 않고 개인의 이익을 탐하지도 않는 것이다. 자유인이요 정의인이기 때문에 역사 창조의 주체자가 되는 것이다.
⑤ 대공심 대공심(大空心 大公心)의 생활
진리를 깨친 사람은 일체의 사량 분별이 끊어지고 마음이 텅비어 걸리고 막힐 것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미워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없다. 좋아하는 일과 싫어하는 일도 따로 없는 것이다. 좋은 경계와 나쁜 경계를 구별하지 않는다. 형상 있는 것에 집착하지도 않고 무기공에도 빠지지 않는다. 언제나 텅 빈 마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천지의 도에 합하고, 도에 합하기 때문에 큰 덕이 나타나는 것이다. 대공심(大公心)으로 천만사물을 화육(化育)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생활을 통해서 일원상의 진리를 잠시도 떠나지 않고 활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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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명상(言語名相)
언어는 언어문자, 명(名)은 귀에 들리는 것 곧 이름, 상(相)은 눈에 보이는 것, 곧 형상. 사물의 이름·모양과 그를 설명하는 언어 문자.
돈공(頓空)
⑴ 마음속에 일체의 분별 사량이 다 끊어져버려 텅 빈 마음(大空心)이 되는 것, 일원의 체성에 합한 마음, 한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마음, 천지가 나뉘기 이전의 소식. 곧 청정자성심을 말한다. ⑵ 일원의 진리의 체(體)를 표현하는 말. 공적(空寂)·진공(眞空)과 같은 뜻으로, 언어도단의 입정처요 선악업보가 끊어진 경지를 일컫는 말.
공적영지의 광명 (空寂靈知―光明)
텅 비고 고요하여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에서도 밝고 신령스럽게 나타나는 지혜의 작용. 공적(空寂)은 진리의 본체를 설명하는 말. 우주에 형상 있는 것이나 형상 없는 것이나 그 실체는 텅 비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도 그 본성은 언어명상·사량계교·분별시비가 텅 비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번뇌도 없고 집착도 없어 무아(無我)·무심(無心)이다. 공적은 우주의 본체인 동시에 인간의 본성이다. 공적이 되면 영지가 나오고, 영지가 나오면 광명이 발생한다. 공적 영지의 광명은 우주의 광명이요, 진리의 광명이요, 인간의 본래 마음의 광명이요, 일원상 진리의 광명이다. 우주는 공적하기 때문에 영지의 광명을 나타낸다. 지극히 밝고, 지극히 정성스럽고, 지극히 공정하고, 순리자연하고, 광대무량하고, 영원불멸하고, 길흉이 없고, 응용에 무념한 것이 우주의 공적영지의 광명이다. 인간도 공적하면(본성을 깨치면) 영지(반야의 지혜)의 광명이 나타나게 된다. 천만 사리를 걸림 없이 알게 되고, 시종여일하게 만사를 작용하게 되며, 희로애락과 원근친소에 끌림이 없이 중도행을 하게 되고, 불합리를 버리고 합리를 취하게 되며, 애착심·탐착심·집착심·편착심에서 벗어나게 되고, 생로병사와 육도 윤회에 해탈을 얻게 되며, 모든 일을 당해서 길흉화복에 끌리지 아니하고 동정간에 무념행을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염념보리심 처처안락국이 된다.
공공적적(空空寂寂)
⑴ 번뇌 망상이나 애착 탐착이 없어 무아 무심(無我無心)이 된 경지. ⑵ 우주에 형상 있는 것이나 형상 없는 것이나 모두 그 실체가 없어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분별하고 생각할 것이 없다는 뜻.
공적 (空寂)
⑴ 공공적적(空空寂寂)의 준 말. 우주 만물이 모두 실체가 없고, 상주(常住)하는 것이 없다는 말. 텅 비어 아무것도 없다는 뜻. ⑵ 마음이 텅 비어 고요한 것. 우주 만물이 모두 잠들어 고요한 것.
영지(靈知·智)
⑴ 영묘 불가사의한 지혜. 반야지.
⑵ 정신, 정신의 지혜.
진공묘유의 조화(眞空妙有―造化)
일원상의 진리를 설명할 때, 인성적(人性的) 측면에서 공적 영지의 광명이라 하고, 우주적 측면에서 진공묘유의 조화라 한다. 표현은 각각 다르지만 그 뜻은 같은 것이다. 우주의 모든 현상이 진공묘유의 조화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진리의 본체는 대소유무의 분별이 없다. 생멸 거래에 변함이 없고, 선악 업보가 끊어진 것이다. 그러나 텅 비어 아무 것도 없는 경지에만 그쳐 있는 것이 아니라, 진공묘유의 조화로 천차 만별의 차별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우주는 성주괴공으로 변화하고, 일월은 춘하추동과 주야로 운행한다. 만물은 형형색색 천차만별로 나타나고 생로병사로 변화한다. 우주와 인생의 본체는 텅 비어 아무 것도 없지만(眞空), 없는 것에 그쳐있지 않고 유(有)와 무(無)로 돌고 돌며(妙有), 무한히 변화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 우주의 삼라만상은 끊임없이 돌고 도는 것이다.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 있어지고, 이렇게 끝간데 없이 돌고 돌다보면,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거기가 곧 구공이요 진공이다. 그러나 구공은 곧 구족이라 모든 것을 다 갖추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구족의 진공은 묘유의 조화로 우주 만유를 통해서 무시광겁에 은현자재하는 것이다. 묘유의 조화는 유무의 변화(俱空 具足)로 은현자재하는 것이다. 은현자재 한다는 것은 능이성유상하고 능이성무상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능이성유상은 불변의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 영원불멸·불생불멸·상주불멸·여여자연한 것이다. 능이성무상은 변하는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 우주는 성주괴공으로 변화하고 만물은 생로병사로 변화하며, 사생은 심신작용을 따라 육도로 변화를 시켜 진급·강급으로 무량세계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일원상의 진리를 믿고 신앙하여 마침내 일원의 위력을 얻고 일원의 체성에 합하게 되는 사람은 공적영지의 광명이 나타나고 진공묘유의 조화를 부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이 곧 일원상의 진리를 깨친 사람이요, 삼대력을 얻은 사람인 것이다. 생로병사에 해탈을 얻은 사람이요, 선악죄복을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다. 공적영지의 광명은 일월보다 더 밝은 것이요, 진공묘유의 조화는 우주를 한 집안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적영지의 광명과 진공묘유의 조화야 말로 이 세상에서 큰 보물인 것이다.
진공(眞空)
⑴ 일원상의 진리의 체(體)를 나타내는 말. 어떠한 것에도 막히고 걸리거나 물들지 않고 지극히 청정하여 아무런 흔적도 없이 텅 빈 것. 일체의 색상(色相)을 떠나 참으로 텅 빈 것. 청정자성·본래성품을 말한다. 청정자성에는 일체의 번뇌 망상이나 미망이 다 끊어져버렸기 때문에 텅 비어 아무 것도 없다고 하여 진공이라 한다. ⑵ 일체의 망집을 떠나 사량 분별을 끊어버린 불가득의 반야를 말한다. ⑶ 소승의 열반. 거짓이 아니기 때문에 진(眞)이라 하고, 모양이 없기 때문에 공(空)이라 한다. ⑷ 공허한 공간.
진공묘유(眞空妙有)
진공은 일원상의 진리 그 자체, 묘유는 일원상의 진리의 작용. 진공은 진리의 체, 묘유는 진리의 용.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신묘불측하고 무궁 무진하여 불가사의한 진리의 작용을 말한다. 우주의 삼라만상은 진공묘유의 조화가 무시광겁에 은현자재하는 현상이다. 일원상의 진리는 진공묘유의 조화를 통하여 우주의 모든 현상을 전개시킨다.
무시(無始)
일체 세간의 중생과 법이 모두 처음 시작이 없다는 말. 금생은 전생의 인연을 좇아 존재하고, 전생은 또한 전 전생을 좇아 존재한다. 아무리 끝없이 전생을 거슬러 올라가 봐도 그 처음이 없는 것이다. 한없이 아득히 먼 과거라는 말.
무시광겁 (無始曠劫)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아득히 먼 시간. 한없이 오랜 세월. 무시란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 봐도 그 처음이 없다는 뜻. 광겁이란 지극히 오랜 세월이라는 뜻.
은현(隱顯·現)
숨었다 나타났다 하는 것. 진리는 항상 은현으로 변화한다. 사람이 사는 것을 나타나는 것이라 하고, 죽는 것을 숨는 것이라 한다. 진리의 체(體)는 숨는 것이요, 용(用)은 나타나는 것이다. 은과 현은 진리의 양면성이다.
은현자재 (隱顯自在)
⑴ 숨었다 나타났다 하는 진리가 자유자재하는 것. 곧 유무순환의 도를 말한다. 일원의 진리는 무시광겁에 무위이화 자동적으로 은현자재하면서 만물을 생성 발전시킨다. 우주는 성주괴공으로, 사시는 춘하추동으로, 만물은 생로병사로 변화하되, 자유 자재로 운행하기 때문에 은현자재라 한다. ⑵ 우주의 은현자재처럼 대기 대용으로 큰 능력을 가진 불보살도 은현자재한다. 나타나야 할 때 능히 나타나고, 숨어야 할 때 능히 숨는 것이다. 나아가야 할 때 나아가고, 물러가야 할 때 물러가는 것이 곧 은현자재이다.
★★★★★★★★★
"어렵다 생각 말고 자주 읽고 연마해야"
일원상진리는 무진장 보고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
대각개교절 봉축행사인 법잔치에서 김주원 교정원장은 '일원상의 진리'에 대해 교리강습을 실시했다. 23일 중앙총부 반백년기념관에서 그는 "교단에 들어와서 제1의 화두가 일원상이었고 앞으로 영생을 두고 화두가 될 것이다"고 강의를 시작했다.
그는 "대산종사께서 '우리 교법이 여래가 표준이다'고 하셨는데 처음 그 말씀을 받들고 이해도 어렵고 답답했다"며 "그 후 그것으로 연마를 하다 법신불일원상이 신앙의 대상이고 수행의 표본임을 알게 됐다" 고 당시를 회상했다.
즉 법신불 일원상 자리가 곧 여래위 자리며 대종사께서 여래위 자리를 표본으로 해서 모든 교리를 신앙·수행법으로 해 일원상의 신앙과 수행을 할 수 있도록 제도방편을 만들어 근기가 낮은 사람과 높은 사람도 모두 수월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일원상 신앙, 일원상 수행
김 교정원장은 "원불교 신앙을 하는데 있어 일원상을 모른다면 어떻게 일원상 신앙과 일원상 수행을 할 수 있느냐"고 물은 뒤 "대종사께서는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 수행의 표본으로 모시는 것이 저 대각여래위에 가서 하라는 것이 아니라 보통급도 들어오면 일원상 신앙, 수행을 하라고 하고 특신, 상전, 항마, 출가 여래위까지도 전부 일원상 신앙과 수행을 하라고 교법을 내주셨다"고 부연했다.
그는 "그 방법을 모두 〈정전〉 일원상장에 소상히 밝혀 놨는데도 우리는 진리라는 것을 굉장히 어려운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원상 진리에 대해 그는 "'일원은 일체중생의 본성이며~'까지를 1단락으로 해 일원상 진리를 총 4단락으로 나눠봤다"며 "일원상을 왜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았는지 진리와 나와의 관계를 나타낸 것으로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앞부분에서 밝혀 놓으셨다"고 설명했다.
그는 나머지 뒷부분은 일반적인 3단락과 같은 공·원·정으로 해석된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그는 "일원의 진리가 우주만유의 본원이고 제불제성의 심인이고 일체중생의 본성인데 그 진리는 비고 밝고 조화로운 것이다"며 "그것을 바꿔 말하면 우주만유의 본원은 일원인데 일원은 비고 밝고 조화로운 것이고, 또 제불제성의 심인인 모든 부처님과 성자들의 마음이 일원인데 그 마음 역시 비고 밝고 조화롭게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일원은 일체중생의 본성이며 본성이 일원인데 일원은 비고 밝고 조화로운 것이기에 나의 본성도 비고 밝고 조화로운 것이며 그렇게 해석하니 어떤 분이 스승님이신가하면 바로 마음이 비고 밝고 조화로우신 그 분이 성자고 부처고 그게 심인이며 이렇게 보면 스승님이 다시 보이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원상 진리 공부에 있어 "우주만유의 본원, 제불제성의 심인은 그러신가보다 모든 부처님과 성자들의 마음, 대종사님, 정산종사, 과거성자의 마음이 그러시겠지 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과연 우리의 일체본성이 비고 밝고 조화롭다는 것이 이해가 쉽지 않다"며 "나의 본성, 각자의 본성(본래성질), 내 마음의 참모습이 과연 그렇게 생겼나 이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고 부연했다.
즉 성자들이 그렇다거나 우주의 진리가 그렇겠다는 것은 믿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가 쉬운데 과연 내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 이해의 정도보다 확실하게 알아지느냐고 참석자에게 물었다.
그는 "결국 우리들이 공부를 한다는 것은 그것을 밖에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본래 내가 가지고 있는 그것을 잘 계발시켜 내고 찾아서 쓰는 작업이다"며 "일원상 진리 자리가 무진장 보고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런 한량 없는 보배옥와 한량없는 보물 그것이 본래 나한테 갊아 있는지 이것을 머릿속 생각으로 지식으로 그렇다 생각하는 것과 내가 정말 그런 존재라고 인식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고 재차 강조했다.
우주만유의 본원을 전체로 느껴야
김 교정원장은 우주만유의 본원에 대해서도 "우리가 얼른 생각에 우주만유본원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을 가져 연마하고 궁글리고 만유의 본원을 찾고 알아질수록 살림살이의 폭이 넓어지고 마음이 여유로워진다"고 말한 뒤 본원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도 "본원을 대체로는 나무가 있으면 나무의 뿌리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게만 보면 우리의 사은신앙, 일원즉 사은과는 연결이 안되니 본원을 대상전체로 봐야한다"고 부연했다.
한그루의 나무가 있으면 나무뿌리도 있고, 줄기, 가지, 잎도 있듯이 여기서 만약 나무의 뿌리만 본원으로 생각한다면 뿌리를 제외한 다른 것은 본원이 아니라고 여기게 되어 함부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무 전체를 본원이라고 보면 잎사귀를 제외한 부분을 나무전체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이지 않는 진리세계만 있다고 인정하면 지금 내 옆에 있는 그 사람은 본원(진리)이 아니니까 함부로 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우주만유의 본원이라 할 때 사물전체를 우주만유의 본원인줄 알아야 한다"며 "그래야 비로소 사은 신앙법이 나오고 대종사님께서도 그것을 사은으로 우리한테 요령 잡아주신 것이니 사은을 펴서 말하면 우주만유 전체이고 일원즉 사은, 사은 즉 삼라만상이다"고 덧붙였다.
그는 "지리산 뱀사골 물을 보더라도 물의 족보를 추적해보면 그 물이 어디서 온 물인지 그 다음에 어떻게 내려가는지 보면 결국 온갖 물들이 함께 섞이고 흘러가면서 다시 넓은 바다로 흘러가는 것과 같이 우리 자신의 본원도 우주전체의 본원인 것을 알 수 있고 우주의 모든 것이 우리의 본원이며 그래야 우리는 모든 사물을 진리로 잘 모실 수 있다"고 제언했다.
그는 "예전 불교학 강의에서 '중중무진법계(重重無盡法界)'에서, 무거울 중자가 여기서는 거듭 겹친다는 의미로 해석되어 겹치고 겹쳐 무애(無碍), 즉 걸림이 없는 큰 법계로 이뤄져있다는 뜻으로 들었다. 이 때 예화로 맑은 유리구슬이 많이 모여 있는 데 하나의 유리구슬에 전체 구슬의 모습이 비쳐있고 또 다른 구슬 하나에 전체구슬의 모습이 비쳐있다고 하셨는데 그 때는 몰랐는데 우주만유의 본원을 가지고 연마를 했더니 중중무진법계의 의미와 티끌하나에도 우주가 들어있다는 의미가 이해가 되더라"고 경험담을 말했다.
제불제성의 심인에 대해서 "보통 우리는 진리는 진리니까 받들어야 되고 스승은 사람이니 받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며 "이것이 진리를 공부하면서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고 경계했다.
그는 "사람보다 진리가 위대하니 진리를 모시면 되지 왜 스승을 모시냐고 생각하는데 바꿔 생각하면 그 진리라는 것을 누가 어떻게 알며 혼자 생각해서 아는 진리, 내가 아는 진리가 정말 제대로 아는 것인지 누가 판정해주며 이것이 진리와 크게 오차가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고 주의를 줬다.
그는 끝으로 "일원상 진리를 평소 자주 읽고 생각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연마하다가 또 머리 아프면 놔뒀다가 또 연마해보라. 그러면 생활 따라 점점 진리가 깊어지고 새롭게 깨달아 질 것이다. 대종사님이 주세불이시고 우리교법이 주세불 교법이니 그것을 분명히 확인해 보시길 바란다"고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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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원상의 진리에 담긴 정서
소태산께서는 깨치신 진리를 일원상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일원상이 무엇이냐를 일컫기 전에 소태산께서 깨치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간략하게 짚어본다면 일원상의 진리에 대한 정서를 엿볼 수 있다. 깨치는데 무슨 정서가 있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깨달음의 경로도 여러 가지이고 정도의 차이도 여러 층을 이루기 때문이다.
좌선을 하면 대부분 정(定)에 드는 한 재가 수행자가, 며칠 전에 나직한 목소리로 묻는다. "영이 뜨려고 하는데 전에는 좀 불안하여 그만 두었지만 이제는 여행을 해보려고 합니다."
"정법을 모르고 하면 문제가 되지만, 알고 나서는 한번쯤 마음 내키는 대로 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별 거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마음먹은 대로 되고 어떤 때는 안 됩니다. 그 이유가 뭐죠?"
"잠재의식으로 자리할 때 됩니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잠재의식으로 자리할 정도로 진정성 있고 간절해야 한다. 이 발원에 따라 깨달음의 방향과 크기와 깊이가 다르게 나타난다.
소태산께서는 어릴 적부터 천지자연과 사람들의 삶에 의구심을 지녔다가, 청년기에 이르러서는 '장차 이 일을 어찌할꼬'라는 의구심으로 변하여 지속했다. 수행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기도와 화두로 일관된 수행이라 말할 수 있지만, 소태산으로서는 수행이란 단어가 사치스럽기까지 할 정도로 그저 치열한 몸부림이었을 뿐이었다.
소태산께서의 깨달음에는 삶이 들어있다. 진리로 삶을 읽어내는 것이 아니다. 삶에 따른 정서를 진리로 승화하여 영생으로 일관할 수 있게 했다.
고뇌에 찬 삶에서 진리성을 발견하고 마음공부로 영성을 진급케 함으로써, 진리의 힘을 얻고 합일하려는 염원을 지니기를 바랐다. 이것은 삶을 진리 수행의 중요한 과정으로 여김을 의미한다.
소태산께서는 곳곳이 부처이니(處處佛像) 그일 그 일에 불공(事事佛供)하고, 언제 어디서나 성품을 여의지 않으면서 마음을 다함으로써(無時禪 無處禪), 동정이 한결같은(動靜一如) 경지에 이르기를 바랐다. 그러면 영성이 진급되며, 심신이 건강하고 보람있는 삶(靈肉雙全)으로 행복하리라 여겼다.
이런 삶은 생활하며 마음을 닦고(生活是佛法) 마음공부로 생활(佛法是生活)하는 모습이다.
소태산께서 내놓은 일원상의 진리는 생활 속에 있고, 생활 속에서 힘을 얻는 것이 참다운 힘이라 보았다.
그러나 이 힘은 인간으로서 잘 사는 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품격으로 법계에 이르러서도 지고한 존재로 자유자재할 수 있는 바탕이기 때문이다.<삼동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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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원은 일체중생의 본성
"이 세상은 대소 유무의 이치로써 건설되고 시비 이해의 일로써 운전해 가나니, 세상이 넓은 만큼 이치의 종류도 수가 없고, 인간이 많은 만큼 일의 종류도 한이 없나니라. 그러나 우리에게 우연히 돌아오는 고락이나 우리가 지어서 받는 고락은 각자의 육근(六根)을 운용하여 일을 짓는 결과이니, 이치의 대소 유무를 모르고 산다면 우연히 돌아오는 고락의 원인을 모를 것이며…."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당하면 거기에 끌리어 온전하고 참된 정신을 잃어버리고, 그 하기 싫은 일을 당하면 거기에 끌리어 인생의 본분을 잃어 버려서 정당한 공도를 밟지 못하고 번민과 고통을 스스로 취하게 됩니다. 그 괴로움이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에게 우연히 돌아오는 고락이나 우리가 지어서 받는 고락은 각자의 육근을 운용하여 일을 짓는 결과라 하셨습니다.
육근을 운용하는 주인은 내 마음이며 내 마음의 본성은 일원상의 진리입니다. 진리가 우리에게 똑같이 공급해 준 것이 '성품'이며 이 성품은 진리에 뿌리하고 있습니다. 진리에 뿌리한 성품은 우리에게 일체 생각, 앎, 감각, 감정, 정서, 의지 등 모든 분별심의 뿌리가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진리에 바탕하고 진리로부터 떠날 수 없는 관계임을 알게 됩니다.
경계를 따라 나타나는 마음도 내 마음이요, 경계 전의 청정한 성품도 내 마음입니다. 이 모든 마음이 일원상의 진리이며 내 자신이 본래 일원상입니다.
나의 육근을 작용하는 바가 다 그대로 일원상으로, 대소유무 이치를 따라 시비이해를 건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이 마음을 그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까닭은 이 마음을 순경과 역경에 빼앗겨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모든 생령들의 처절한 윤회의 삶의 모습입니다. 현실 세계는 우리의 마음을 떠나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계를 보는 눈은 그 마음이 현재 무엇을 경험하고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분별성과 주착심이라는 욕심의 구름에 가리어 있기 때문에 재색명리에 끌리고 탐심 진심 치심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분별성과 주착심이 바로 고통의 경계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품에는 본래 분별과 주착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욕과 탐욕에 젖어 삶을 살다보니 알게 모르게 분별성과 주착심으로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 분별성과 주착심의 뿌리도 가만히 살펴보면 결국 '나'라는 개체로 인하여 형성된 것입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지수화풍 사대로 모였다 흩어졌다 반복하는 육신을 '나'라고 할 수 있을까요?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 마음을 '나'라고 할 수 있을까요?
허망한 '나'를 놓아버리고 참된 성품자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거짓 '나'를 떨쳐내고 본래 분별과 주착이 없는 우리의 성품자리를 드러내는 것이 공부입니다. 한 마음을 밝혀 마음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은혜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성품 자리를 회복하기 위해 해탈의 심경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번뇌의 마음이요 또 하나는 보리의 마음입니다. 번뇌는 탐진치 삼독과 상에 뿌리하여 나오는 마음이요, 보리는 불성에 뿌리하여 나오는 마음입니다. 번뇌의 마음은 삼악도 윤회로 몰고 가는 중생의 삶이요, 보리는 깨달음과 해탈로 인도하는 부처의 삶입니다. 그러나 "성품 밖에 법이 없고 마음 밖에 부처가 없다"고 한 말씀과 같이 법을 찾되 성품에서 찾아야 하고 부처를 구하되 마음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 성품은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도 아니며 누구에게는 더 있고 누구에게는 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보살도 그 성품이고 중생도 그 성품이지만 불보살은 밝혀 빛낸 반면, 중생은 묵혀서 사장시켰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대종사께서는 "허공법계를 완전히 자기 소유로 이전 증명 낸 사람이 있느냐?" 물으시고 삼세의 모든 불보살들은 형상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허공법계를 다 자기 소유로 내는 데에 공을 들였으므로 형상 있는 천지만물도 자기 소유로 수용 한다" 하셨습니다.
삼세의 불보살들이 이전증명 낸 그 자리, 대소유무에 분별이 없는 성품자리, 우주만유가 이름은 각각 다르나 둘이 아닌 그 자리, 유정의 마음과 하나 되는 그 자리, 여래심을 자각하는 나를 만들어 가는 공부를 통해 마음의 본성을 회복하고 육도윤회에서 해탈을 얻어서 자유를 찾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해탈한다는 것은 꿈에서 깨어난다는 것입니다. 꿈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일체존재가 분별 사량이 다 끊어진 입정처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입정처를 깨닫는 것은 곧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너와 나의 분별이 허망한 것이며 집착 또한 허망한 것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마음이 더 이상 분별과 집착의 상을 그려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알고 보면 밖에 있는 게 아니고 내안에 다 갖춰져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해서 찾아 쓰느냐, 아니면 발견하지 못하고 쓰지 않느냐의 차이에 있으며, 본래 내 것이기 때문에 찾으면 됩니다. 찾아서 스스로 나를 믿어야 하고, 내 양심을 지켜가야 하고, 성불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대산종사께서는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는 자리에서 생과 멸이 있는 것이 성리자리이다. 성리에 토가 떨어져야 그 때부터 큰 공부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성리에 바탕하여 공부하면 크고 맑고 바르고 밝다. 또 탐진치가 일어난다 하여도 바로 비추어 녹여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없고 없고 또한 없는 것도 없는 그 자리, 아니고 아니고 또한 아닌 것도 아닌 그 자리에서 천상천하에 독존하기를 심축해 봅니다.
"생함도 멸함도 없는 자리에서 생과 멸이 있는 것이 성리 자리, 성리에 토가 떨어져야 큰 공부 시작돼“ ⓒ 원불교신문(http://www.wo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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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性理]
[개요]
우주만유의 본래 이치와 인간의 자성원리를 궁구하는 공부법으로 사리연구의 한 과목이다. 성리란 성리학의 성(性)과 이(理)에서 나온 말로, 성즉리(性卽理)라고 한다. 인성과 천리를 하나로 보아 마음의 성(性)과 심(心), 우주의 이(理)와 기(氣)를 논한다. 불교에는 마음의 근본을 불성(佛性) 또는 자성(自性)이라 하는데, 이를 선종에서는 화두를 간(看)하여 견성을 구하는 간화선(看話禪), 자성을 적묵영조(寂黙靈照)하여 적적성성(寂寂惺惺)한 경지에 이르게 하는 묵조선(黙照禪)이 발달했다. 원불교의 성리는 성리학과 선종의 가르침을 다 포함한다.
[성리의 중요성]
《정전》 ‘정기훈련법’에서는 “성리란 우주만유의 본래 이치와 우리의 자성원리를 해결하여 알자 함이라”고 정의한다. 이의 중요성이 《대종경》에 성리품을 둔 데서도 나타나는데, 소태산대종사는 “종교의 문에 성리를 밝힌 바가 없으면 이는 원만한 도가 아니니 성리는 모든 법의 조종(祖宗)이 되고 모든 이치의 바탕이 되는 까닭이니라”(《대종경》 성리품9)고 하여, 모든 법의 근본과 모든 이치의 바탕이 성리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결국 근원적인 이치, 곧 일원상의 진리를 깨쳐서 활용해 가는 것이 성리를 궁구하는 목적이다. 소태산은 지금까지의 모든 종교 교리체계가 성리에 근거한 경우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으며, 성리에 근거한 경우에도 성품을 깨치는데 중심을 두고 성품을 활용하는 면이 부족한 면이 있다고 보았다. 불교는 성리의 혜(慧)에 근거를 했고, 성리학은 성리의 체(體)에 근거를 두었는데, 소태산은 이를 한 면에 치우친 것이라 보았다. 성리가 모든 법의 조종이라는 것은 모든 법의 근본이라는 뜻이므로, 기존의 장엄종교가 성리에 바탕한 절대적 진리의 종교로 거듭나야 한다고 했다.
[원불교의 성리]
소태산은 “근래에 왕왕이 성리를 다루는 사람들이 말 없는 것으로만 해결을 지으려고 하는 수가 많으나 그 것이 큰 병이라 참으로 아는 사람은 그 자리가 원래 두미(頭尾)가 없는 자리이지마는 두미를 분명하게 갈라 낼 줄도 알고 언어도(言語道)가 끊어진 자리지마는 능히 언어로 형언할 줄도 아나니”(《대종경》 성리품25)라고 했다. 성품은 원래 언어의 도가 끊어진 자리이지마는 분명하게 드러낼 줄도 알아야 한다. 과거의 성리가 주로 성품의 체를 밝힌 것이라면 소태산은 묘유의 용까지 밝혔다. 진공의 체와 묘유의 용을 하나로 밝힌 것이다.
공(空)의 체를 철저히 깨쳐 체험했을 때, 묘유의 용은 철저한 진공의 체험에서 나타나므로 성품의 체를 밝히는 데 머물지 않고 활용해야 한다. 묘유로 용을 삼으면 진공이 바로 묘유가 된다. 일원상의 진리를 언어도단의 입정처로 철저히 깨쳐서 유무초월의 생사문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소태산은 “사람의 성품이 정한즉 선도 없고 악도 없으며, 동한즉 능히 선하고 능히 악하나니라”(《대종경》 성리품2)고 했다. 불교에서는 성품을 선과 악이라 하지 않고 미(迷)와 오(悟)로 밝힌다. 미는 중생의 상태이며, 오는 부처의 상태이다. 성리학에서는 인성의 문제를 선악론으로 다루는데, 소태산이 성품을 지극히 고요하다고 한 것은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경지를 말한 것이며, 그러므로 선도 없고 악도 없다는 것이다.
이를 성론으로 표현하면 무선무악(無善無惡)이다. ‘성품이 정한즉, 동한즉’이란 성품을 ‘정한 면으로 보면, 동한 면으로 보면’이라는 의미이다. 성품을 체와 용으로 분리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체와 용은 성품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일 뿐이기 때문이다. ‘능선능악(能善能惡)’은 선과 악으로 나타나게 하는 성품의 작용을 말한다. 능선능악은 업력으로 지은 선과 악을 나타나게 하는 능동적인 작용이다. 성리학에서는 선과 악으로 나타난 상태를 유선유악(有善有惡)이라고 한다. 이(理)에서 받은 것은 순선무악(純善無惡)하지만 기(氣)의 청탁으로 나타난 것이 유선유악이다. 그러므로 원불교에서는 성리학의 순선무악ㆍ유선유악과 불교의 무선무악을 넘어선 능선능악을 말한다. 성품은 정한 면으로 보면 무선무악이며 동한 면으로 보면 능선능악인 것이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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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터치 ④} 일원상의 진리, 표본과 표준
'일원상'은 원불교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이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더위잡기가 쉽지 않은 단어 중 하나이다. 일원상은 '부처님의 심체'(교의품 3장)를 나타낸다. 일원은 곧 법신불이며(교리도), 법신불은 '부처님의 자성 진체'(경의편 46장)를 의미한다. 이처럼 '일원'과 '일원상'은 내용에 있어 큰 차이가 없지만, '일원상은 법신불(일원)의 상징'(원리편 1장) 또는 '진리 전체의 사진'이라 하여 '일원상 봉안' 등 '도형으로서의 일원상'의 용례에서는 구분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인과보응'과 '인과보응의 진리'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것처럼 '일원'과 '일원의 진리' 역시 대체로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이처럼 '일원', '일원상', '일원의 진리', '일원상의 진리'는 내용에 있어 큰 차이가 없고, 우리 교서에서도 대체로 혼용하고 있다.
'진공 묘유의 조화가 우주 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無始曠劫)에 은현자재(隱顯自在)하는 것'이 일원상의 진리이다. '진공(眞空)'은 상대가 끊어진 절대 자리로서 일원의 진리 가운데 제일 공한 것으로, '공적(空寂)' 혹은 '적적(寂寂)'이 이에 해당되고, '묘유(妙有)'는 적적한 가운데 영령함이 있는 것으로, '영지(靈知)' 또는 '성성(惺惺)으로 표현할 수 있다.
진공과 묘유는 둘이 아니다. 진공은 묘유의 바탕이고, 묘유는 진공의 작용이다. 묘유가 나타날 때에는 진공이 묘유 속에 있는 것이며, 진공으로 있을 때에는 묘유가 진공 속에 있는 것이다. 즉, 이러한 진리의 두 모습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양면성·동시성·전체성을 지닌다. 〈육조단경〉에서도, "먼저 정(진공)을 공부하면 혜(묘유)가 나타난다거나 먼저 혜를 닦아서 정이 나타난다는 등의 각각 다르다는 견해를 갖지 말지니, (莫言先定發慧하며 先慧發定이 各別이니)"라고 말하고 있다.
'진공 묘유'는 일원상 진리를 그대로 나타낸 말이다. '적적성성 성성적적(寂寂惺惺 惺惺寂寂)'은 일원상 진리를 선의 강령으로 잡아주신 말씀이고,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은 일원상 진리를 이와 같이 공부하라는 교훈이다. 모두 같은 말이다. 대종사님, 정산종사님 모두 일원상을 '견성성불의 화두'로 삼으라고 하셨다. 의두 성리 연마에 있어 일원상 진리를 가장 우선 순위에 두어야 한다.
야외 행사 등에서 사람이나 의자 등의 기준 열이 틀리면 전체 모습은 엉망이 되고 만다. 표준을 잘못 잡고 공부해도 마찬가지이다. 일원상 진리는 원불교 수행의 '표본'이다. 교의품 첫머리에 나오는 일원상의 진리를 가장 먼저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이유이다.
대종사님께서는 일원상 진리에 근원하지 않으면 사도(邪道)라고 하셨다.(교의품 3장) 이처럼'일원상 진리'는 원불교의 알파요 오메가이다.<오렌지카운티교당>ⓒ 원불교신문(http://www.wonnews.co.kr/)
★★★★★★★★★
거룩하다 일원상의 진리여!
신앙 수행, 텅빈 입정처로부터 시작
신령스럽게 밝은 묘유의 원리 깨쳐야
소소영령한 인과의 작용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일체 만물이 존재하고 살아가는 원리가 있습니다. 일체 성인과 부처가 성인되고 부처가 된 원리가 있습니다. 일체 인류가 존재하고 숨쉬는 원리가 있습니다.
일체 만사가 성사되고 성공하는 원리가 있습니다. 모든 인류가 끊임없이 구하고 찾는 평화·행복·기쁨·은혜가 샘솟는 원리가 있습니다. 무궁한 조화, 무궁한 보물, 무궁한 묘리가 솟아나는 원리가 있습니다.
우주 만유와 제불 제성과 일체 중생의 삶을 총섭하는 원리! 그것을 대종사께서는 '일원상의 진리'로 밝혀 주셨습니다. 때문에 이 일원상의 진리를 모른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신앙을 할 수 없고, 진정으로 수행도 할 수 없으며, 깨달음도 얻을 수 없고, 행복하게 잘 살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부인이 다른 것이 시급한 것이 아니요, 이 일원상의 진리를 알고 믿고 깨닫고 본받아서 무량세계 무량겁을 통하여 한량 없는 복락과 한량 없는 지혜를 구하는 첩경의 길로 삼아야 할 것이요, 대도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를 몇가지로 정리해 보면 첫째, 일원상의 진리는 텅 빔의 원리로 되어 있습니다.
텅 빔의 원리는 바로 언어도단의 입정처입니다. 우리가 늘 보고 듣고 숨 쉬고 먹고 일하고 노는 것이 다 이 이치요, 한 순간도 이것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무 자각없이 무지의 세계에서 사는 이유는 바로 그 '입정처'가 되지 못해서입니다. 이 입정처가 되려면 일원상의 진리에서 밝힌 본원의 눈으로, 심인의 눈으로, 본성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허공은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만물이 그 안에서 살 수 있는 근원처가 됩니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으며,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숨쉬고 살 수 있으며,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먹을 수도 있고,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신경의 회로가 원활하게 순환하여 지는 것이요, 정신도 텅 비고 맑을수록 건강한 사람인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대자연의 나무도, 거대한 바위 덩어리도, 천근같은 강철도 소립자의 극미한 세계에서 보면 텅 비어 있다고 합니다.
때문에 우리 주변에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의 대부분은 마음을 비우지 못해서 생기는 병입니다. 마음은 허공과 똑 같습니다. 허공이 오염되면 그 공기를 마시는 사람은 당연히 전이될 것이며 마음이 오염되면 마음에 병이 발생할 것이요 자연 몸에 이상이 생기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도 수행도 불공도 텅 빈 입정처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새벽 시간은 텅 빔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입니다.
자성의 정·혜·계로 일상을 시작하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중생의 삶에서 부처의 삶으로 전환하는 삶이 이 새벽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부처는 텅 비어 부처가 되었으며, 중생은 텅 비우지 못하기 때문에 중생입니다.
둘째, 일원상의 진리는 신령스럽게 밝은 묘유의 원리로 되어 있습니다.
일본의 에모토 마사루가 쓴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을 통해서 물이 무정물이 아니라 우리가 물에게 감사하다 하고, 아름답다 하고, 멋들어진 음악을 틀어주면 물은 금방 아름답고 멋진 결정체로 변화하고, 물 옆에 '너는 나쁜 놈' 또는 쿵쾅거리는 음악이나 이별의 음악을 틀어주면 결정체가 심하게 찌그러드는 결정체로 변화하며, 한국에서 물에게 나쁜 인상을 심어 준 사람은 멀리 외국에 갔다 할지라도 물은 기억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알고 보면 물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무도 공기도 땅도 허공도 일체 만물이 다 그런 것입니다. 일체 삶의 굽이굽이 구곡로에 석립청수성(九曲路 石立聽水聲)인 것입니다.
우주는 거대한 진리의 신경망 조직체로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 몸의 말단에 조그마한 가시만 찔려도 온 몸이 전율할 정도로 아는 것 같이 진리의 신경망도 똑같은 것입니다.
때문에 이 원리를 알고 믿고 깨달아야 무한한 지혜가 생성되는 것이요, 진여실상의 진체가 눈 앞에 확연한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는 길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길을 찾아 들어가야 합니다. 정신을 똑바로 고누고 맑고 생생한 기운으로 우리 눈 앞에 전개된 진리의 세계를 완연하게 비춰 보아야 합니다. 밤에서 새벽으로, 겨울에서 봄으로 변화하는 허공의 모습이 우리 앞에 완연하게 다가오고 펼쳐지듯이 우리의 마음도 똑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셋째, 일원상의 진리는 소소영령한 인과의 작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봄에 씨앗을 심지 않고 가을에 결실을 거두는 법은 없습니다. 현재의 모습으로 나타난 나의 형상, 주위 환경의 모든 현실이 소소영령한 인과의 작용으로 나타난 형상인 것입니다.
일체 선악 미추 죄복의 현상이 진공 묘유의 조화를 통하여 무시광겁에 숨었다 나타났다 하면서 무량한 현실 세계를 전개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어리석은 중생은 인(因)을 심을 때 과(果)를 못보고 과가 드러나면 인을 못보는 것이요, 공부인은 인을 심을 때 과를 보고 과가 들어나면 인의 연유를 알므로 죽기로써 정의를 실천하고 선업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봄에 씨앗을 심는 농부가 한 알의 씨앗에서 가을에 수백개의 곡식을 거두듯 인과의 작용이 참으로 묘하고 확연할 뿐입니다.
일원상 진리에서 밝혀주신 진공 묘유 인과는 우리 삶의 무한동력의 발전소요, 풍요로운 삶의 보고이며, 행복한 삶의 근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원상의 진리를 정산 종사께서는 '진공', '묘유', '인과'로 요약하여 주셨습니다.
일원상의 진리에서는 이 우주의 진리를 진공, 묘유, 인과로 확연히 밝혀주셨으며, 우리들 자신은 바로 진공, 묘유, 인과의 생성자이며, 일체 경전은 진공, 묘유, 인과의 안내판이요 이정표며, 우리 삶 자체는 진공, 묘유, 인과의 바다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산종사께서는 "진리를 구하는 이가 이 외에 다시 구할 곳이 없고 도를 찾는 이가 이 외에 다시 찾을 길이 없으며 그 밖에 일체 만법이 이 외에 다시 한 법도 없나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원불교신문(http://www.wo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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