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산종사법어 무본편 33장
원기 99년 8월 26일(화요일)
정산종사법어 무본편 33장
말씀하시기를 [불보살은 함 없음에 근원하여 함 있음을 이루게 되고, 상 없는 자리에서 오롯한 상을 얻게 되며, 나를 잊은 자리에서 참된 나를 나타내고, 공을 위하는 데서 도리어 자기를 이루시나니라] 하시고, [有爲爲無爲(유위위무위) 無相相固全(무상상고전) 忘我眞我現(망아진아현) 爲公反自成(위공반자성)]이라 써 주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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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본편 (務本編)
<정산종사 법어>의 아홉째 편. 5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말(本末)·주종(主從)·선후(先後)·주객(主客) 등을 분석한 법문. 세상 모든 일에 본말·주종·선후·주객 등을 알아서 근본에 힘써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마음의 본말을 알고, 마음 닦는 법을 알며, 마음 쓰는 법을 잘 아는 것이 모든 지혜 중에서 제일 근본이 되는 지혜라고 밝히고 있다.
불보살(佛菩薩)
⑴ 일원의 위력을 얻고 일원의 체성에 합한 위대한 인격자, 곧 무등등한 대각도인과 무상행의 대봉공인, ⑵ 부처와 보살. 천여래 만보살. 진리를 깨쳐 생사고락과 선악인과에 해탈을 얻어 자신을 제도하고, 나아가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성인을 통칭하는 말. 〈대종경〉 불지품 4장에 「불보살들은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무애자재하는 도가 있으므로, 능히 정할 때에 정하고 동할 때에 동하며, 능히 클 때에 크고 작을 때에 작으며, 능히 밝을 때에 밝고 어두울 때에 어두우며, 살 때에 살고 죽을 때에 죽어서, 오직 모든 사물과 모든 처소에 조금도 법도에 어그러지는 바가 없나니라」 하였다.
체성(體性)
사물의 변하지 않는 근본 성질. 사물의 본질을 체라 하고, 그 체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을 성이라 한다.
유위 (有爲)
⑴ 위(爲)는 위작(僞作)·조작(造作)이라는 뜻. 인연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모든 현상. 이런 현상에는 반드시 생·주·이·멸의 형태가 있게 된다. ⑵ 능력이 있다, 쓸모가 있다는 뜻.
무위 (無爲)
⑴ 생멸 변화가 없는 모든 법의 진실체를 설명하는 말. 위(爲)는 위작(僞作)·조작(造作)이란 뜻. 인연에 의한 위작·조작을 떠나서 생주이멸의 변천이 없는 진리. 열반·진여·법성·실상과 같은 뜻. 인간이 지식과 욕심에 따라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면 오히려 세상에 대위(大僞)·대란(大亂)을 가져오게 되므로 될 수 있는 대로 무리하지 말고 자연법칙에 맡겨두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위야말로 인간의 이상적인 행위이며, 무위에서 완성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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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종사 법어 무본편 33장
(법회강연 원고)
主題에 들어가기 전에(疑頭要目에 대하여)
의두요목은 性理공부를 위한 주요 내용인 바 인간의 性稟과 心性氣理에 관하여 연마하고 실천하도록 하는 말씀들인데 우리 대종경 성리품에 많은 말씀들이 있고 또한 불교에서 전해오는 말씀과 역대 종사님들의 어록에도 많이 수록되어 있다.
이중에서 개교 백주년을 맞아 개인 聖業奉讚의 일환으로 몇가지 의두요목을 정하여 연마토록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자료조사를 하다보니 너무 문자의 뜻만 해석하는데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어 아쉬움을 느낀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 의두요목이 한자로 되어있어 뜻풀이가 어렵고 내용도 이해하기에 難澁하다는 데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않아도 성리란 어려운 공부요 그 대상도 성자들께서 깨치신 심오한 뜻을 담아 내리신 말씀이라 범부중생에게는 가히 짐작하기 힘든 내용들인 것이다.
성리품 11 장 말씀은 “이뜻을 알면 곧 도를 깨닫는 사람이라” 하셨고 강연 주제 법문은 “불보살은”로 시작하듯이 이를 이해하고 행하면 이미 불보살인 것이다. 그러니 깨친 분이면 몰라도 어찌 범부중생의 이해와 실행이 완벽할 수 있겠는가? 여기 저기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지만 우세관교무님의 글이 마음에 와닿아 많이 참고하였다. 심오한 진리말씀을 보통사람에게 해석하라면 글자 하나에도 여러 가지 뜻이 있는 것 같고 내용은 보는 시각, 마음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이러한 생각으로 들으시는 분이 이해하시리라 믿고 편안하게 아는대로 느끼는대로 말해보고자 한다.
주제의 大綱
주제는 네가지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기 항목에서 강조하는 것은 첫째는 無爲요, 둘째는 無相, 셋째는 無我, 넷째가 奉公이다. 하지만 모두가 마지막 봉공으로 귀결된다. 본인은 이 말씀이 보살행을 말씀하신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수도인이 행해야 할 것으로 “밖으로 무위의 성품에 바탕하여 안으로는 상이 없는 진정한 자세로 나마저 잊어 버리고 성심으로 봉공생활을 하라. 그리하면 불보살이 되리라” 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함 없음에 근원하여 함 있음을 이루게 되고 -무위행
무위론은 원래 老莊思想의 핵심이론인데 이는 당시 주로 정치와 인간생활의 관점에서 유래된 산물로 인위적인 有爲와의 대립이론으로 인위적인 제도나 행위들이 오히려 인간과 세상에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므로 순리에 의하여 운행되는 자연상태를 유지하고 그 도를 따르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無爲徒食의 무위와는 다르다. 그런데 이의 확립에는 일부 열반의 경지로 쓰이기도한 불교의 무위사상으로부터 기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주제의 말씀은 보다 더 불교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아무것도 하지않을 수는 없다. 그래서 무엇이든 하게 되면 하되(유위) 無爲에 근원하여 하자는 것이다 즉 의도적인 함이 아니라 순수한 자연의 진리에 바탕한 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함의 결과는 있으되 변함없는 자연스런 상태가 되어 흔적을 알 수가 없게 된다.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변함 없이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경험적 현실세계는 그 자체가 유위 즉 인위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 유위는 무위에 근원하여야 하고 그 무위는 단순히 자연의 질서와 理致만이 아니라 우리 본래 성품으로 이해하고 그 자리 즉 自性은 무엇인가를 알고 찾아야 한다고 본다. 자성의 경지 곧 무위는 空寂靈知다.
원래 왜곡된 인위는 貪瞋痴에서 오는 것. 마음에 탐진치가 가득하면 판단을 흐리게 하고 무리한 시도로 이어져 실패하거나 결과에 여러가지 오류와 부작용이 야기된다. 나 자신이나 주변에서 그런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먼저 탐진치를 버리고 자성에 근원하여 함을 행한다면 그것이 바로 진리에 입각한 흔적없는 無爲行이 된다는 것이다.
相 없는 자리에서 오롯한 상을 얻게 되고 - 바른 분별
이 말씀은 수도인의 유위생활에서의 내적 기준으로 많이 들어온 말씀으로 六根이 동작하되 안으로 항상 지켜야 할 덕목이며 지혜라 생각한다. “상만 떼도 반부처”라는 말을 여러번 들었지만 네가지 상을 하나라도 놓기가 練習으로도 힘들다. 그 상만 없다면 떳떳한 나요 인간다운 인간이요 열심히 사는 중생이며 대접받아 마땅한 高手가 될수 있다. 그렇게 되면 무대위의 배우가 아니라 실재하는 진면목 그대로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말이나 생각으로는 안된다. 나는 身上과 중대한 관련이 있는데도 참으로 어려웠던 경험이 있는데 상산종사님은 정말 道人이시다.
상을 가지고 하는 일은 分別이 바르지 않을 수 있다.
정산종사 법어 원리편 24장에서 상없는 분별로 진리를 증득하고 실천해야 원만한 도인이라 하셨다. 공동체의 일원임을 강조하면서 사리사욕을 우선하는 경우도 있고, 집에서 기르는 애완동물도 상이 있으면 단순 애완동물이고 상 없이 반려동물로 대하면 가족이 될 것이며, 수도에 발심하여 중생도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믿으면 더욱 분발할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농담삼아 “나이를 먹으니”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안 될 일이다.
이 강연은 교무님 엄명이라서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수양삼아 어려운 일을 하기로 큰 맘 먹었다. 국한없이 생각을 교류해보고 싶다.
나를 잊은 자리에서 참된 나를 나타내고 - 진짜 마음자리.
나를 잊은 자리는 我相을 버린 자리로 볼 수도 있고 내가 있되 자신의 실체를 의식하지 못하고 자연이나 일에 合一된 자리로 볼 수도 있으나 하여튼 분별이 제대로 된 마음자리만 있는 경지를 이르는 것으로 이해한다. 나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남과 和同하기 어려우며 이기심이 생기고 이기심은 욕심으로 더욱 커져 일을 그르치기 쉽다.
또 일념집중하여 일하는 모습은 누구나 평화롭고 진지하며 행복하다. 그래서 하는 일도 능률적이다. 그 모습은 꾸밈이 없기에 원래 그 사람의 모습이다. 하물며 애시당초 상없이 집중하는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또 그일은 무엇일까?
무아는 다음의 봉공을 더욱 빛나게 하는 필요불가결한 덕목이기도하다. 그러기에 여기서 無자가 아닌 忘자로 적극적인 의미를 강조하지 않는가 생각해본다. 바른 생각으로 자신을 不顧하고 하는 일은 그르칠 수가 없고 그 모습은 성자의 모습이다. 진정한 내 모습은 내가 볼 수 없다. 범부중생인 내 모습이 어떤 모습일지 그려본다.
公을 위하는 데서 도리어 자기를 이룬다 - 모두 이룬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이는 哲人이 한 말씀이지만 조금만 식견이 들면 다 아는 말이다. 오히려 현대 인류생활에서 더 절실히 알 수 있다. 완전한 자연인은 존재할 수 없다. 우리의 사회적 활동은 모두 공동체로 영위된다. 우리는 각양각색의 공동체의 일원이며 그 공동체의 활동에 참여한다.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이 없다면 살아가면서 어떤 도움도 받을 수가 없으며 내가 할 일도 또한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共生하고 있음이다.
그래서 공동체에 참여하는 道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국민을 위한다면서 공명심이나 자신의 특별한 목적을 달성하려는 정치지도자들이 있는가 하면 힘없는 사람을 위해서 일한다면서 오히려 이들을 이용하고 致富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한편으로는 기여는 하지않으면서 바라기만 하는 사람들도 있다. 현대적 민주주의는 개인의 발전과 국가의 발전을 함께 이룬다고 들었다.
이 33장 말씀은 모든 공생의 도를 포괄하는 간명하나 최상의 도를 제시해주신 말씀이다. 앞의 세가지 덕목에 입각하여 공중을 위해 일한다면(봉공) 그 일은 잘못 될 수가 없고 전체의 발전과 함께 나에게 도움이 되고 종국에는 내가 하고싶은 일을 이루게 될 것이다. 곧 불보살이 된다는 말씀이다. 이리 되는 所以를 알면 주위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고 보은하며 봉공하는 생활을 할 것이다.
한편으로 인간은 다른 동식물로부터 얻고 받고 자연을 이용하고 자연에 버리는데 종교적 관점에서 공동체라는 의미의 演繹을 거기까지 확장하면 안되는가??? 자연의 훼손은 물론 먹거리를 비롯한 자원의 오염과 고갈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모두 성리공부에 정진하시어 봉공하고 성업봉찬의 큰 탑 쌓아 성불하시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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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좋아하는 법문 말씀 가운데 하나인 유위위무위(有爲爲無爲) 법문, 즉 함 없음에 근원하여 함 있음을 이루게 된다는 말씀을 생각해 본다.
중생들은 유위법으로 무엇을 이루고자 하나 오히려 뜻대로 되지 않고, 불보살들은 무위법에 바탕 하여 만사를 성공시켜 나간다는 말씀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동안 직장생활과 교당생활을 통하여 그리고 교구와 교단의 일에 참여하면서 세월이 흐를수록 가슴에 더욱 간절함과 새로움으로 다가오는 법문이다.
가령, 어떤 조직에서든지 무슨 일을 할 때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이나 또는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일을 한다면 결코 상하간이나 동료들로부터 도무지 인정받을 수 없고 자신의 입지도 확보되기 힘들게 된다.
아무런 사심 없이 맡은 바 일을 합리에 표준 하여 꾸준히 해나가다 보면 그 결과로 주위로부터 인정이나 보상은 자연스럽게 따르기 마련이다.
자신의 견해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도 사심이다. 합리에 바탕 한다는 것은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수준으로 전체를 쉽게 단정해 버리는 우치에서 벗어나 당사자 협의나 이해관계자와의 논의 등 실질적인 절차를 존중하는 가운데 지자본위로 널리 자문을 구하고 정보수집과 분석을 면밀히 하는 한편 원근친소에 우선하여 객관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경남교구에는 교구청 불사가 진행되고 있다. 여기서도 무위법의 성공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교당불사와 교구불사가 겹쳐있는데도 불구하고 대의를 분명하게 세우고 아무런 핑계나 사심 없이 교구청불사에도 합력하고 아울러 교당불사도 순서 있게 진행해 나가는 교당들이 있다. 이런 교당들의 경우 교무님들이 한결같이 지도력과 교화력을 두루 갖춘 분들이며 실제로 교화활성화로 이어지고 있다.
한편, 국가와 국민을 앞세우며 당리당략을 추구하는 정치인들을 보면 또한 이러한 생각이 든다. 진정으로 사심 없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한다면 저절로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되어 당리당략은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는 소식을 전해주면 어떨까.
앞으로 교단 백년을 앞두고 국내외 각 교구와 교단에는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아무쪼록 정산종사법어 무본편 33장의 말씀에 바탕하여 함 없음에 근원하고 아울러 사심없이 공을 위하는 데에서 도리어 자기를 이룬다고 하신 위공반자성(爲公反自成)의 법문을 새기고 실천하는 재가 출가가 많이 배출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