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상의 법어(一圓相法語)
일원상의 법어(一圓相法語)
소태산 대종사가 일원상의 진리를 깨친 경지와, 그 진리를 일상생활 속에서 육근동작을 통하여 활용하는 표준을 제시한 법어.
일원상의 진리는 인간의 육근동작을 통해서 현실세계에 나타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육근동작을 통해서 현실생활에 활용하게 되는 것이다.
일원상의 진리를 깨친 사람의 육근동작은 다음과 같이 나타나는 것이다.
① 시방삼계가 다 오가(吾家)의 소유인 줄을 안다
일원상의 진리를 깨친 사람은 이 우주 전체가 다 나의 소유인 줄을 아는 것이다. 우주의 근본원리와 나의 본래성품이 하나인 것인 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따로이 「내 것」이라는 소유관념이 없다. 내 것 아닌 것이 있을 때 내 것이 따로 있다. 모두가 내 것일 때에는 내 것이 따로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출가 수행자는 무소유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무소유의 경지에 도달하면 내 것이라는 욕심이 없으면서도 내 것이 아닌 것도 없기 때문에 특별히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주 전체가 다 나의 소유이기 때문에 모두를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내 몸처럼 아끼게 되는 것이다.
② 우주 만물이 이름은 각각 다르나 둘이 아닌 줄을 안다
천태만상 형형색색으로 나누어 진 우주 만물의 이름이 각각 다른 것임을 아는 것은 곧 차별세계를 아는 것이다. 일원의 진리는 우주 만유의 본원이다. 그러므로 일원상의 진리를 깨치면 차별세계 뿐만 아니라 평등세계 까지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우주 만물이 내 몸과 하나인 경지를 알기 때문에 미물 곤충이나 금수초목까지라도 함부로 살생하거나 꺾지 않는다. 내 몸을 아끼고 생각하듯이 만물을 대하기 때문에 처처불상임을 알게 되고 사사불공의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③ 제불 조사와 범부 중생의 성품인 줄을 안다
일원상의 진리를 깨치고 보면, 일원상의 진리가 곧 제불 조사와 범부 중생의 성품인 줄을 알게 되며, 그렇기 때문에 제불 조사와 범부 중생의 성품이 하나인 줄을 알게 되는 것이다. 또한 나의 성품도 제불 조사의 성품과 같은 것인 줄을 알기 때문에 자성불의 본래 면목을 깨치고 자성 삼신불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성품이 곧 부처의 성품임을 알기 때문에 내 자신에 대한 불공을 게을리 하지 않고, 항상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게 되며, 내 마음을 함부로 죄악에 물들게 하거나 타락 시키지 않는다. 범부 중생의 성품도 나의 성품과 하나임을 알기 때문에 범부 중생이라고 해서 경멸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범부 중생도 부처가 될 수 있음을 알아서 항상 상불경(常不輕)의 정신으로 모든 사람을 공경하며 겸허하고 공손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④ 생로병사의 이치가 춘하추동과 같이 되는 줄을 안다
인간의 생로병사는 일회적인 것이 아니다. 영원한 세월에 끊임없이 돌고 도는 것이다. 춘하추동이 한 번 돌아가면 일년이 바뀔 뿐 이듬해가 되면 다시 춘하추동으로 돌고 도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원상의 진리를 깨치면 인간의 생로병사가 춘하추동과 같이 끊임없이 돌고 도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삶에 대한 애착도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이 담담하게 생사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와도 왔다 할 것이 없고 가도 갔다 할 것이 없는 가운데 생사 거래를 하고, 오고 감이 없는 가운데 오고 가기 때문에 생사에 해탈을 얻게 되는 것이다.
⑤ 인과보응의 이치가 음양상승과 같이 되는 줄을 안다
천지에는 음과 양의 두 기운이 있어서 음양상승하는 가운데 우주가 운행되는 것이다. 인간세계에 있어서 인과보응의 이치도 역시 음양상승의 이치와 같이 선행자는 상생의 과보를 받고 악행자는 상극의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원상의 진리를 깨치면 항상 상생 선연을 맺게 되고 상극 악연을 멀리 하게 되는 것이다. 상생선연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영원한 세상에 혜복이 구족하고 진급하게 되는 것이다.
⑥ 원만 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것인 줄을 안다
일원상의 진리는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진공묘유의 조화가 우주 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에 은현자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와 무가 끊임없이 돌고 돌아 구공이 되고 다시 구족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일원상의 진리는 유와 무를 총섭해서 모든 것을 다 갖추었기 때문에 없는 것이 없으며, 진리의 궁극처이기 때문에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원상의 진리를 깨친 사람은 곧 우주의 주인이요 무궁무진한 조화불인 것이다.
⑦ 육근동작을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사용한다
육근 동작은 본래성품의 작용이다. 그러므로 일원상의 진리를 깨친 사람은 성품 그대로 육근을 활용하기 때문에 육근동작은 곧 법이요 도요 진리인 것이다. 본래성품 그대로 보고 듣고 먹고 말하고 냄새맡고 움직이고 생각하기 때문에 육근동작은 진리의 활용 그대로라, 절도에 맞고 법에 계합하는 것이다. 육근동작이 잠시도 일원상의 진리를 떠나지 않고 천진불의 본래면목 그대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 원상(圓相)의 진리를 각(覺)하면 시방 삼계가 다 오가(吾家)의 소유인 줄을 알며, 또는 우주 만물이 이름은 각각 다르나 둘이 아닌 줄을 알며, 또는 제불.조사와 범부.중생의 성품인 줄을 알며, 또는 생.로.병.사의 이치가 춘.하.추.동과 같이 되는 줄을 알며, 인과 보응의 이치가 음양상승(陰陽相勝)과 같이 되는 줄을 알며, 또는 원만 구족한 것이며 지공 무사한 것인 줄을 알리로다.
이 원상은 눈을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 구족한 것이며 지공 무사한 것이로다.
이 원상은 귀를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 구족한 것이며 지공 무사한 것이로다.
이 원상은 코를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 구족한 것이며 지공 무사한 것이로다.
이 원상은 입을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 구족한 것이며 지공 무사한 것이로다.
이 원상은 몸을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 구족한 것이며 지공 무사한 것이로다.
이 원상은 마음을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 구족한 것이며 지공 무사한 것이로다.
이 원상의 진리를 깨달으면 ....
우리가 일원상법어를 공부할 때는 그 뜻을 새겨 보는데 의미를 두기보다는 얼마나 제대로 알고 실행하고 있는지 내 마음에 대조해 보려고 합니다. 일원상 법어를 받들 때마다 마음공부는 성불하기까지 쉬임 없이 해야 하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일원상법어 첫 구절에 “이 원상의 진리를 각(覺)하면”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 원상의 진리를 깨달으면’이란 뜻으로 내가 진실로 일원상 진리를 잘 아는가의 정도를 알 수 있는 표준을 밝혀 주신 법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마음공부 정도가 얼마나 순숙되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표준입니다.
만약에 그 뜻을 잘 안다고 하면서도 마음 작용이 이대로 되지 않는 다면 그것은 제대로 아는 게 아니겠지요.
이 원상의 진리를 깨달으면 시방삼계가 다 오가의 소유인 줄 알며 -
시방삼계란 우주만물을 말합니다. 사은님을 말합니다. 우주만물이 다 내 집 소유인 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는 현실의 우주만물 뿐 아니라, 과거의 우주만물, 미래의 우주만물까지 다 포함됩니다. 이 이치를 알면 현실에서 내 것 아닌 것도 미래에 내 것이 될 줄 알고, 과거의 내 것도 현실에는 남의 것이 된 줄 알게 됩니다.
이것은 곧 어떤 마음을 말하는가 하면 내 것 아닌 것도 내 것 삼을 수 있는 너른 마음을 소유했는가? 동시에 내 것도 내 것 아닌 것으로 만들 줄 아는가? 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삼세로 윤회되는 인과의 이치를 바로 알아야 이 마음이 보전됩니다.
이 마음이 늘 유지되는 사람은 바로 시방삼계가 오가의 소유인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바로 마음 부자가 되는 것이지요.
저는 마음이 좁아질 때마다 대종경 불지품 17장 말씀을 받들어 보면 금세 마음이 부자가 됩니다.
어떤 사람이 전주와 이리 사이를 오가는 경편철도가 있는데 전라도 각지 부호들은 주식 출자로 경영하기에 그 경편차를 무료로 타고 다닌다고 부러워했습니다.
대종사께서 말씀하셨지요.
“그대는 참 가난하도다, 아직 그 차 하나를 그대 소유로 삼지 못했는가”
그 사람은 경편차 하나를 소유하려면 막대한 돈이 들어야 하는데 대종사께서 생각 밖의 말씀을 하시므로 으아해 했습니다. 그런 그를 보고 대종사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그대의 소유하는 방법과 나의 소유하는 방법이 다르다. 기차 하나를 소유하려면 거액의 자금이 일시에 들어야 하고, 운영하는 책임을 직접 담당하여 많은 괴로움을 받아야 할 것이나, 나의 소유하는 법은 그와 달라서 단번에 거액을 들이지도 아니하며, 모든 운영의 책임을 직접 지지도 아니하고, 다만 어디를 가게 되면 그 때마다 얼마씩의 요금만 지불하고 나의 마음대로 이용하는 것이니, 주야로 쉬지 않고 우리 차를 운전하며, 우리 철도를 수선하며, 우리 사무를 관리하여 주는 모든 일꾼들의 급료와 비용이 너무 싸지 아니한가.”
제가 총부에 있다 보니 전국으로 출장을 다닐 일이 참 잦습니다. 그때마다 대중교통을 많이 이용하는데 이 말씀을 진실로 체험하곤 합니다. 얼마나 고맙고 고마운지 모릅니다. 이 법문을 받들지 않았더라면 때로 차삯이 비싸다고 투덜댔을지도 모릅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일입니까. 나를 당장에 큰 부자로 만들어주셨으니 말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되지 않는 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눈앞에서 무엇이든 기어이 취해서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마음 말입니다. 그것은 비단 물건 뿐만이 아닙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든지 인간관계를 상생으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은 이 이치를 아는 사람이고, 상극으로 만드는 사람은 이 이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 원상의 진리를 깨달으면 우주만물이 이름은 각각 다르나 둘이 아닌 줄을 안다고 했습니다.
이따금 TV에서 동물의 세계나 바닷속 세계를 보면 우주만물이 얼마나 한이 없는지 실감하게 됩니다. 그것도 지금은 지구상에 사라지고 없는 공룡 등을 생각한다든지 과거의 우주만물과 미래의 우주만물까지의 범위를 생각해보시면 어느 정도 일까요. 아마 인간의 능력으로는 셀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경우를 일러 표현하기를 무수히 많다고 합니다. 수가 그 한도가 있긴 있는데 이루 다 셀 수 없다 하여 ‘없을 무’자를 써서 무수하다고 합니다.
또 무량하다고 합니다. 양이 그 한도가 있긴 있는데 이루 다 가늠할 수 없어서 ‘없을 무’자를 써서 무량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우주 만물이 이름은 각각 다른 줄 알겠는데 둘이 아니다 이것입니다.
둘이란 무엇입니까? 하나가 아닌 것은 둘입니다. 그 둘은 하나가 반쪽 나누어져 생기는 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분별하면 생기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만물은 하나로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금 내가 왼손으로 잡고 있는 사람이 옆 사람이지만 그 사람을 잇고 있으면 결국 누군가 내 오른손을 잡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지금 이 순간도 그렇게 연결되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대종사께서 대각하시고 처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만유가 한 체성이요” 그러셨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우주만물이 한 기운 한 몸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씀입니다.
정산종사께서도 이 하나를 말씀하셨습니다. 삼동윤리가 그것입니다.
한울안 한이치에 한집안 한권속이 한일터 한 일꾼으로 일원세계 건설하자
일원세계란 세계 모든 인류를 원불교 교도로 만들자는 세상이 아닙니다. 세계의 모든 종교와 사상, 종족, 국가, 인종 등이 서로 하나되어 살아가는 평화로운 세상을 말합니다. 원래 하나인 이치를 알면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지 않습니다. 내게 더 있으면 없는 이에게 나눠주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 하나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정산종사께서 한울안 한이치, 한집안 한권속 이라 하셨고 그 가르침을 따라 타종교인에 대해서 포용적인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당하고 보면 그 마음이 생각처럼 자연스럽게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아이가 어떤 종교를 신앙하든 저는 제 도리만 다 하면 될 일인데 그게 잘 안된 것입니다.
모든 번뇌의 시작도 알고 보면 그 이름은 각각 다르나 원래 하나인 그 이치를 모르기에 그렇습니다. 나와 너를 구별하는 마음, 나와 나 아닌 대상을 분별하는 마음, 그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어 거기에 달싹 들어붙어 주착하고 그 마음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나를 힘들게 합니다. 분별이란 원래 하나인 그것을 자꾸 나누는 마음입니다.
교도님들과 단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단촐한 점심공양을 마치고 과일을 들면서 젊은 교도 한 분이 자녀들이 말을 듣지 않아서 괴로운 일이며, 직장생활하는 남편이 일찍 들어오지 않아서 싫은 생각이 갈수록 심하게 든다는 등 가지가지 불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할머니 교도님 한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음에 정해 놓은 원칙이 많은 사람은 번뇌가 많은 법이여. 그것이 나를 괴롭게 하거든. 생각해 봐. 안 그런지.”
교도님들이 한결같이 수긍했지요.
마음에 정해 놓은 원칙이란 곧 분별심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요.
살아가면서 얻는 모든 고통의 근원은 분별하고 주착하는 데 있습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 중생이 정한 원칙이란 원만하지 못해서 두루 통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상대와 나를 구별한 상태에서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원칙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 원칙에 맞지 않으면 힘들고 괴롭고 그런 것입니다.
제불조사 범부중생의 성품인 줄 알며
이 원상의 진리를 깨달으면 제불,조사,범부,중생의 성품인 줄 안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본래 성품 자리에서 보면 진리를 깨달으신 모든 부처 성현들이나 그 법을 이어 받은 조사들이나 이 세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범부중생이 차별이 없습니다.
이 법문은 진리를 깨닫지 못한 중생들에게 무한한 희망을 주신 법문입니다.
이 진리에 근원하여 천도교에서는 인내천(人乃天) 즉 사람이 곧 하늘이라 했습니다.
그만큼 본래 부처 마음을 가진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너무 다릅니다. 강자는 약자를 무시하고 억압하며, 인종이 다르다고 차별하고, 남녀를 차별 합니다.
성가 가사에 이런 법문이 나옵니다.
부처는 누구이며 중생은 누구런가 부처나 중생이나 본래는 하나라네. 사랑과 미움이야 연잎에 이슬이라 한마음 깨고 보면 우리도 부처라네.
부처나 중생이나 본래 둘이 아닌 그 성품이 있다면 상대의 처지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 하나같이 평등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래야 제불,조사,범부,중생의 성품인 줄 바로 아는 것입니다.
지금은 원경고등학교 교감선생님으로 있는 박영훈 선생님이 서울에서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계실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
선생님 학급의 급훈은 “나는 원래 훌륭한 사람이다” 입니다.
이 급훈을 조회와 종례 때마다 소리 내어 암송한답니다.
하루는 반 아이들이 청소 중에 싸움이 벌어졌답니다. 좀 크게 벌어진 싸움이었는지 전교에 소문이 났습니다. 아이들은 종례 시간에 들어오신 선생님을 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나 죽었다’ 하고 눈치만 슬슬 살피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여느 때처럼 “나는 원래 훌륭한 사람이다”를 여러번 반복하게 하고 싸운 아이들을 상담실로 따로 불렀습니다.
한참동안 말없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한 학생의 이름을 부르며 물었습니다.
“너는 어떤 사람이지?”
학생이 기가 팍 죽어 기어가는 목소리로 “원래 훌륭한 사람이요.”
선생님이 책상을 탕 치며 “더 크게” 하자, 함께 있던 아이들이 엉겁결에 “나는 원래 훌륭한 사람입니다” 했습니다. “확실해” “예” “그럼 됐어. 가보거라.”
뒷통수를 긁적이며 상담실을 빠져 나온 아이들이 지금까지 날마다 외우던 “나는 원래 훌륭한 사람이다”의 뜻을 새삼스럽게 속 깊이 새겼을 것입니다.
그 학생 중에 성장하여 지금 교사가 된 사람이 있다면 아마 십중팔구 박 선생님의 교육방식대로 가르칠 것입니다.
다음에 이 원상의 진리를 깨달으면 생노병사의 이치가 춘하추동과 같이 되는 줄을 안다고 했습니다.
어릴 때를 생각해봅니다. 그때의 추위는 땅이 돌처럼 꽁꽁 얼어서 망치로 못을 박아도 들어가지 않던 그런 추위였습니다. 밖에서 몸이 꽁꽁 얼도록 놀다가 따뜻한 아랫목으로 몸을 던지며. “아이 추워. 아이구 추워” 하면 할머니가 제게 해주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조금만 참거라. 조금 있으면 봄이 올거야. 그리고 추운 겨울을 지내야 사람이나 모든 게 강해지는 법이란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야 할머니가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고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는 길고 긴 겨울이 지겹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태어나면 자라서 늙어서 병들고 죽는 이치가 마치 봄 여름 가을 겨울 돌고 도는 이치와 같습니다. 또한 죽은 뒤의 세상이 어떤 세상인 줄 모르는 사람은 죽음이 두렵지만 내생이 있는 줄 아는 사람은 살아서 준비도 많이 하려니와 임종을 당해 편안한 마음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적어도 이 이치를 깨닫지는 못했을 지라도 두 마음 없이 확신하는 정도만 되어도 마음은 편안해집니다. 이처럼 세상 이치를 아는 사람을 우리는 철이 든 사람이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철이 바뀌는 이치를 알아서 처세를 합니다.
그런데 나이만 먹었다고 철든 것일까요. TV나 신문을 통해 시시각각 전해 오는 불미스런 사건들을 보면 어른이 아이만도 못한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참으로 철이 든 사람이란 불생불멸 인과보응의 이치를 알아 그에 맞게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인과보응의 이치가 음양상승과 같이 되는 줄을 알며
이 원상의 진리를 깨달으면 인과보응의 이치가 음양상승과 같이 되는 줄을 안다고 했습니다.
내가 지은대로 내가 받는다는 인과보응의 이치는 바로 계절이 바뀌는 이치와 같다는 것입니다. 여름이 더운 양이 성한 때이나 그 가운데 있던 작은 음기운이 커 나서 가을이 오고, 겨울이 추운 음이 성한 때이나 그 가운데 있던 작은 양기운이 커나서 봄이 오듯 하는 이치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양기운과 음기운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 기운이 경계 따라 달리 작용되는데 그 작용하는 주체가 곧 나입니다. 바로 내 마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일체유심조라고 하는 것이지요.
경계를 당하여 취사를 함으로써 업을 지어갈 때, 내 마음 작용 따라 일어나는 기운을 어떻게 조절하여 어떤 기운이 이기게 할 것입니까?
사람의 기운을 보면 봄과 같이 푸근하고 만물을 살리는 기운을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름과 같이 늘 화기가 넘치는 사람이 있고, 가을처럼 정신 기운이 서늘하여 청정한 사람이 있고, 겨울처럼 냉랭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겉으로 나타난 모습이 그런 것이라 언제든지 마음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음양상승을 어떻게 시키느냐에 따른 것이지요.
결국 내가 지어서 내가 받을 죄업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내가 지어서 내가 받는 인과보응을 내 임의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치를 알면 죄복의 이치를 알아 죄복을 임의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이처럼, 인과보응의 이치가 음양상승과 같이 되는 이치, 그것은 곧 천지보은 조목에서 밝힌 ‘천지의 길흉없는 도를 체받아서 길한 일을 당할 때에 흉할 일을 발견하고, 흉한 일을 당할 때에 길할 일을 발견하여, 길흉에 끌리지 않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따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 이치를 아는 사람은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릴 줄 압니다.
그리고 타력생활을 자력생활로, 배울 줄 모르는 사람을 잘 배우는 사람으로, 가르칠 줄 모르는 사람을 잘 가르치는 사람으로, 공익심 없는 사람을 공익심 있는 사람으로 돌릴 줄 압니다.
지금 내 마음의 계절이 어느 때에 있는지 보아서 조절할 줄 아는 것, 그래서 죄업보다는 복을 지어, 만나는 인연마다 상생이 되게 하는 생활이 곧 인과보응의 이치가 음양상승과 같이 되는 줄 바로 아는 삶입니다. 나의 죄복을 내 임의로 할 수 있는 부처의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원만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한 것인 줄을 안다
이어서 이 원상의 진리를 깨달으면 원만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한 것인 줄을 안다고 했습니다.
진리는 본래 원만구족하며 지공무사합니다. 다시말해 그것은 일원의 본래 모습, 우주의 본체는 원만구족한 것이며, 그 작용하는 모습을 보면, 지공무사한 것과 같습니다.
원만구족이란 진리를 표현하는 말로써, 모자라거나 넘침이 없이 모든 것을 두루 갖춘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곧 내 본래 마음, 자성을 말합니다.
중생으로서 현실로 나타난 내 모습을 보면 원만하지 못하고 모자라거나 넘치기도 하지만, 부처 마음인 내 원래 마음은 원만구족하다는 말씀입니다.
지공무사란 지극히 공평하여 사사로움이 전혀 없는 것을 말합니다. 일원상 진리를 공원정으로 파악할 때 정(正)을 말합니다. 우리가 인과보응의 이치를 알고, 애욕과 탐착을 끊으며, 모든 일에 과불급이 없이 행동하는 것을 말하며 중용과 중도를 말합니다. 그것은 원만구족한데서 나온 결과입니다. 본래 모습이 원만구족하니 그 마음 그대로 사용하면 일거수 일투족이 지공무사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이 일원상은 법당 정면 한 가운데 모시고 숭배하는데 그치는 상징이 아닙니다.
바로 내 눈, 귀, 코, 입, 몸, 마음을 사용할 때 쓰는 것입니다.
내가 원래 원만구족하며 지공무사한 것이니 내 눈, 귀, 코, 입, 몸, 마음도 원만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한 것입니다. 이 원상은 내 눈, 귀, 코, 입, 몸, 마음의 본래 모습을 비춰 보는 진리 거울입니다.
오늘 나는 이 원상의 진리를 바로 깨닫고 있습니까?
이 원상은 눈을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한 것이로다.
일원상 법어에 눈을 제일 먼저 밝힌 뜻은 어디에 있을까요?
눈의 기능은 본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 보는 기능이라는 것이 하나는 안으로 참 나 즉, 본래의 내 마음을 관조한다는 의미의 기능이 있을 것이요, 다른 하나는 밖으로 사람과 사물 등 우주만물을 보는 기능이 있을 것입니다.
안으로 나를 본다는 의미에는 특별히 이런 의미가 있겠지요.
진리를 바로 깨닫는다는 견성(見性)의 견자도 볼견자요. 진리를 관조한다고 할 때는 쓰는 관자도 볼관(觀자)로서 역시 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깨달을 각(覺)자 역시 볼 견자가 부수로 들어 있습니다.
이렇듯 본다는 것은 곧 안다는 뜻입니다.
다음에 밖으로 눈이 하는 기능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장님을 제외하고 사람들이 육근 중 가장 많이 사용하는 기관은 다름 아닌 눈입니다. 눈이 소중한 줄 아는 때는 가까운 것을 잘 봐야 할 때 잘 보지 못하고, 먼 것을 잘 봐야 할 때, 잘 보지 못하는 경우이겠지요.
그런데 30계문 중에 눈이 직접 범과하는 계문은 없습니다. 그것은 30계문과 다 관련이 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눈이 제일 잘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시비이해를 밝히는 것입니다.
대종사께서 총부에 계실 때 하루는 불법연구회 사무실에 들르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신문을 보다가 시사(時事)에 대하여 가부 평론함이 분분했습니다.
쉽게 판가름이 날 것 같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대종사 가만히 듣고 계시다가 한 말씀 하셨습니다.
“그대들이 어찌 남의 일에 대하여 함부로 말을 하는가. 참된 소견을 가진 사람은 남의 시비를 가벼이 말하지 아니 하나니라. 신문을 본다 하여도 그 가운데에서 선악의 원인과 그 결과 여하를 자상히 살펴서 나의 앞 길에 거울을 삼는 것이 공부인의 떳떳한 행실이요, 참된 이익을 얻는 길이니, 이것이 곧 모든 법을 통해다가 한 마음을 밝히는 일이라, 이러한 정신으로 신문을 보는 사람은 신문이 곧 산 경전이 될 것이요, 혜복의 자료가 될 것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도리어 날카로운 소견과 가벼운 입을 놀려 사람의 시비 평론하는 재주만 늘어서 죄의 구렁에 빠지기 쉽나니 그대들은 이에 크게 주의하라.”
하루24시간, 한달 31일, 1년 열두달 동안 사람은 시비이해 속에 살아갑니다.
때로 피하면 피할 수도 있지만, 시비를 모르거나 불같이 일어나는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거나 철석같이 굳은 습관에 끌려 그렇게 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마음공부를 해서 어느 정도는 해야 시비이해를 마음대로 운전할 정도가 될까요? 참으로 시비이해에 밝은 사람은 어떤 사람을 두고 말할까요.
시비이해에 밝다는 것은 단순히 시비이해를 똑부러지게 잘 가려내는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니겠지요, 시비이해에 밝다는 것은 그릇된 것을 깨우쳐주되, 바르게 하도록 인도해주는 것이요, 해로운 것을 돌려 이롭게 하고,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는 정도가 자연스럽게 되는 정도이겠지요.
눈을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사용하는 공부. 참 중요한 공부입니다.
솔성요론에 이렇게 이르셨지요.
다른 사람의 그릇된 일을 견문하여 자기의 그름은 깨칠지언정 그 그름을 드러내지 말 것이요/다른 사람의 잘된 일을 견문하여 세상에다 포양하며 그 잘된 일을 잊어버리지 말 것이요,
대종사께서 말씀하셨듯이 다른 사람들의 그릇된 일이나 잘된 일이나 잘 보고 잘 들으면 복전이 되고 산 경전이 됩니다. 하지만, 시비를 모르거나 불같이 일어나는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거나 철석같이 굳은 습관에 끌려 잘못 보거나 잘못 들으면 시비 가운데 들어서 고통받거나 죄업을 지어갈 죄전이 됩니다.
오늘도 내일도 참 나를 찾아가는 공부, 마음공부 잘 합시다. 감사합니다.
이 원상은 귀를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한 것이로다.
어떻게 귀를 쓰는 것이 원만구족하게 잘 쓰는 것일까요?
대종사께서 법회 때 대중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들이 법설이나 강연을 들을 때에는 반드시 큰 보화나 얻을 듯이 정신을 고누고 들어야 할 것이니, 법사(法師)나 강사(講師)가 아무리 유익한 말을 한다 하더라도 듣는 사람이 요령을 잡지 못하고 범연히 듣는다면 그 말이 다 실지 효과를 얻지 못하나니라. 그러므로, 무슨 말을 듣든지 내 공부와 내 경계에 대조하여 온전한 정신으로 마음에 새겨 듣는다면 그 얻음이 많아지는 동시에 실지 행사에 자연 반조가 되어 예회 공덕이 더욱 드러나게 되리라.
이렇듯 좋은 말은 금은보화를 구할 듯이 정성을 다해 들어야 합니다.
정신을 고누고 듣되, 내 공부와 내 경계에 대조하여 온전한 정신으로 들으라는 말씀입니다. 좋은 말이란 어떤 말입니까?
내 공부길을 열어 주고, 막힌 인연을 뚫어 주고, 절망에 빠진 사람은 건져 주고 죽은 인연을 살려 주는 말입니다.
그리고 좋은 말은 내게 충고를 해 주는 말입니다. 좋은 약은 입에 쓰고 내게 충고하는 말은 듣기에 거북합니다.
정산종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충고를 감수할 경지만 되어도 그 사람의 공부는 일취월장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에 귀를 원만구족하게 쓰려면 나쁜 말을 대할 때는 사자를 대한 듯 피해야 하겠지요.
나쁜 말이란 무슨 말입니까? 내 공부 길을 막고, 좋은 인연도 막히게 하고 잘 사는 사람도 죽게 하고 절망에 빠지게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참 이상한 게 있지요. 왜 이 귀는 남에 대해 좋은 말을 할 때보다는 나쁜 말을 할 때 귀가 번쩍 뜨이지요. 마음이란 게 참 묘한 것입니다.
정산종사께서 그러셨습니다.
내 마음공부 정도로 이겨낼 만한 경계가 아니면 피하라구요. 피경하라고 하셨거든요. 어느 선진님은 누가 좋지 않은 말을 할 때면 ‘독사다, 독사’하고 피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쁜 말을 마음이 끌려가는 것도 습관이 됩니다. 그래서 대종경 인도품 30장에 그러셨지요.
“사람의 큰 죄악이 처음에는 작은 허물로부터 시작되는 수가 많으니 그 허물이 쌓이고 쌓이면 큰 죄업을 저질러서 전도를 그르치게 된다고 하시면서 작은 허물이라도 발견되거든 고치라”구요.
그런데요 귀와 입은 서로 책임을 져야 하는 것 같습니다.
성인 성(聖)자가 귀 이자와 입구 자와 임금 왕자가 함께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묘하지요.
정전 솔성요론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다른 사람의 그릇된 일을 보고 들은 뒤에 자기의 그름은 깨칠지언정 그 그름을 드러내지 말 것이요,
- 다른 사람의 잘된 일을 보고 들은 뒤에 세상에다 널리 알리며 그 잘된 일을 잊어버리지 말 것이요 라구요.
귀를 잘 쓰는 것은 마음을 잘 쓰는 것의 출발입니다.
귀로 듣는 것은 본능적으로 시비이해에 밝은 것입니다. 또한 원근친소에도 잘 끌립니다.
귀와 입은 서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눈과 입도 마찬가지입니다.
귀로 들은 남의 허물을 입이 막아야 하고, 눈의 본 남의 허물을 입이 막아야 합니다.
물론 그 모든 것의 중심은 마음에 있겠지요. 오늘도 귀를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쓰시기를 기원합니다.
이 원상은 코를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한 것이로다.
이 원상은 코를 쓸 때도 역시 원만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한 것이라 하셨습니다. 가늠이 되시는가요?
먼저, 코를 생각할 때는 생명유지의 기능을 생각해봅니다.
하루 24시간, 마음 못지 않게 잠잘 때까지도 쉬지 않고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 호흡이지요. 그렇게 중요하기에 옛 선사의 선문답에 “생사가 어디에 달려 있습니까?” 하는 질문에 “네가 숨쉬는데 달려 있다”고 했지요.
대종사님께도 천도품 8장에 “사람의 생사는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하는 것과도 같다”고 했습니다.
그 모양이 잘 생겼든 못생겼든 태어나면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똑같이 갖고 태어나게 한 코. 그것은 다른 어느 육근보다도 공평한 듯 합니다. 귀가 멀고, 앞을 못보고, 말을 못하고, 사지가 성치 못하고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살아 있는 동안 코를 갖고 숨을 쉬게는 하거든요. 이생에 사람으로 태어난 데다 온전한 몸까지 받고 태어났다면 24시간 심신을 작용하는 조건은 똑같이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일원상 진리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똑같이 숨쉴 수 있게 해주는 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법신불 사은의 은혜를 똑같이 받아 숨을 쉬고 있으면서 나는 지금 이 순간도 복을 지으며 살고 있는가. 죄를 지으며 살고 있는가, 지혜를 닦으며 살고 있는가,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는지 반조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호흡이 참으로 가치 있는 호흡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요. 우리가 마음을 잘 쓰고 있는지 알려면 호흡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말을 안해도 화가 나 있는 사람은 씩씩거리며, 호흡이 빨라집니다. 수양이 된 사람은 누가 화나게 해도 마음이 온전하니 화나게 하는 경계가 있으나 없으나 그의 호흡은 한결같습니다. 화가 나는 일을 당해서 그 순간 한 마음 돌려야 한다는 인과의 이치를 아는 사람은 바로 무엇을 합니까? 잠깐 마음을 멈추고 심호흡을 합니다. 또 하나, 이렇게 숨을 잠시 멈춰보면 내 속이 보입니다.
X-ray검사를 할 때 그렇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멈추세요." 그리고는 찰칵 됐습니다. 누군가가 싫어질 때, 온통 생각이 나의 잘못은 없고 상대방에게만 모든 잘못이 있다고 보게 마련입니다. 그때 X-ray검사를 하듯 잠시 숨을 멈추시고 그러면서 분별주착심도 놓으시고 내면을 바라보시지요. 뭔가 달라지겠지요.
이 원상이 코를 사용할 때 원만구족하지 못하고 지공무사하지 못한 것은 코라는 기관을 사용하면서 생기는 욕심 때문이죠.
욕심을 얘기할 때, 식욕 색욕 재물욕 수면욕 명예욕 그럽니다. 만물이 살아가려면 먹어야 하니 식욕이 제일 우선인 것이지요. 물론 사람이야 두말할 것 없을 것입니다. 식욕을 제일 먼저 느끼게 하는 기능을 코가 합니다. 음식점 골목을 한번 지나가 보시지요. 가짓수도 많지요. 하긴 인류 역사 이래 가장 오래된 문화가 먹는 문화이니까요. 내가 좋아하는 냄새가 나면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고개가 돌아갑니다. 그것은 냄새를 맡는 코의 책임이 아닙니다.
대종경 인도품 23장에 밝혀주셨지요.
어느 날 밤에 조실 문을 지키던 개가 무슨 인기척에 심히 짖자 한 제자가 일어나 개를 꾸짖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던 대종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개의 책임은 짖는데 있거늘 왜 그 책임 이행을 막는가. 이 세상에는 다 각각 책임이 있으며, 사람 하나에도 눈 귀 코 입 몸 마음이 각각 다 맡은 책임이 있나니. 상하와 귀천을 막론하고 그 책임만 이행한다면 이 세상은 질서가 서고 진보가 될 것이니라. 그런 즉 그대들은 각자의 책임이행도 잘 하려니와 또한 남의 책임 이행을 방해하지도 말라. 이 모든 책임 가운데에는 모든 책임을 지배하는 중추(中樞)의 책임이 있나니 사람은 그 마음이 중추의 책임 된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문제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오늘은 코 덕분에 마음공부를 하게 되어서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호흡하고 있는 내 코,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가요.
잠시 멈추어 관조해봅시다.
이 원상은 입을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한 것이로다.
이 원상을 입을 사용할 때 어떻게 쓰는 것이 원만구족하며 지공무사한 것인지 법문에 의지하여 새겨보고자 합니다. 먼저, 정각정행(正覺正行) 바로 깨닫고 바로 행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일원상법어에 비춰 입을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쓰는 길을 보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내가 일원상의 진리를 깨달았다면 말을 할 때나 입을 쓸 때 우주만물, 시방삼계가 다 나의 소유인 줄 알고 그 이치대로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일원상의 진리를 깨달았다면 말을 할 때나 입을 쓸 때 우주만물이 이름은 각각 다르지만 둘이 아닌 줄을 알고 그대로 실행해야 할 것입니다.
일원상의 진리를 깨달았다면 말을 할 때나 입을 쓸 때 제불조사 범부중생의 본래 성품이 한결같은 줄 알고 차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일원상의 진리를 깨달았으면 말을 할 때나 입을 쓸 때 생노병사의 이치가 봄 여름 가을 겨울과 같이 되는 줄 알아 생노병사에 해탈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일원상의 진리를 깨달으면 말을 할 때나 입을 쓸 때 인과보응의 이치가 음양상승과 같이 되는 줄 알아 시시때때로 선업만 짓고 악업은 짓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일원상의 진리를 깨달으면 말을 할 때나 입을 쓸 때 원만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한 것인 줄 알아 늘 대하는 인연들에게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건데, 어떻게 입을 쓰는 것이 원만구족하며 지공무사한 것입니까? 사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입이라는 기관이 마음의 작용을 따라 쓰여지는 것이지 입만 혼자서 제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정산종사께서 입은 곧 재앙과 복의 문이라, 구시화복문(口是禍福門)이라 하셨듯이 이 입을 통해서 복을 짓기도 하고 죄를 짓기도 합니다. 입으로 짓는 죄업이 가장 많기에 원불교에 입교해서 처음 보통급에 들면 보통급 10계를 받는데 그 중 입으로 짓는 범계 계문이 가장 많습니다.
대종사께서는 입을 잘 써야 한다는 가르침을 누누히 강조해주셨습니다.
대종경 인도품 21장 법문에 우리가 말하고 다니는 것을 나팔불고 다닌다는 속담에 비유해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입을 나팔에 비유한 것이지요.
대종사께서 “그대들은 모든 경계를 당하여 나팔을 불 때에, 항상 좋은 곡조로 천만 사람이 다 화하게 하며, 자기 일이나 공중의 일이 흥하게는 할지언정 서로 다투게 하고 망하게는 하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하시고 “그러면, 그 나팔이 한량없는 복을 장만하는 좋은 악기가 되려니와 그렇지 못하면 그 나팔이 한량없는 죄를 불러들이는 장본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남을 편안하게 하는 말, 남이 즐거워할 말, 서로 살려주고 화합하게 하는 말을 하고 사는 게 입을 원만구족하게 쓰는 것입니다.
대종사께서는 뱃속에 아기를 기르고 있는 산모에게까지 “모진 말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로 “태아(胎兒)가 모태 가운데 있을 때는 그 영식(靈識)이 어리는 때라, 그 부모의 마음과 말과 행동이 태아의 장래 성질에 영향을 주기 쉽나니 그 동안 태모의 근신이 극히 중요하다” 고 하신 것입니다.
다음에 대종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이 보지 않고 듣지 않는 곳에서라도 미워하고 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인과품 5장 말씀입니다.
그 연유로 “천지는 기운이 서로 통하고 있는지라 그 사람 모르게 미워하고 욕 한 번 한 일이라도 기운은 먼저 통하여 상극의 씨가 묻히고, 그 사람 모르게 좋게 여기고 칭찬 한 번 한 일이라도 기운은 먼저 통하여 상생의 씨가 묻히었다가 결국 그 연을 만나면 상생의 씨는 좋은 결실을 맺고 상극의 씨는 나쁜 결과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조선의 유명한 정승, 황희 정승이 민정을 살피기 위하여 어느 농촌을 지나다가 소 두 마리로 쟁기질 하는 농부를 보고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누렁 소와 검정 소 가운데 어떤 소가 더 쟁기질을 잘 하오?’
농부가 황희 정승 가까이 다가와서 가만히 귀에다 대고 대답했습니다.
‘검정 소가 더 잘합니다.’
황희 정승이 이상히 여겨 또 물었습니다.
‘거기서 대답해도 될 것을 여기까지 나와서 귀엣말로 하는 이유는 무엇이요?’
농부는 여전히 작은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아무리 짐승이지만 잘못한다 하면 섭섭하지 않겠습니까?’
황희 정승은 이에 느낀 바 있어 그 후로는 남의 잘못을 드러내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원래 원만구족합니다. 그 마음을 따라 입을 쓸 때 우리의 입은 원만구족한 것이며, 그 결과는 지공무사해지는 것입니다.
원래 원만구족하여 지공무사하게 쓰여질 수 있는 입.
그게 본래 부처인 나의 모습, 우리의 모습입니다.
내 입을 저 일원상처럼 원만하게 사용합시다.
이 원상은 몸을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한 것이로다.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생에 사람 몸을 받았고 지은 대로 받는 인과의 이치 속에 몸과 마음을 사용하기를 가운데 선업이 되었든 악업이 되었든 무수한 업을 짓고 삽니다.
내게 나의 죄복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권능이 있다고 했는데 그렇게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바로 몸을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몸을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쓰는 공부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대종사께서 하루는 제자 김남천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일전에 어떤 사람이 소를 타고 가는 것을 보니, 사람의 권리대로 소를 끌지 못하고 소의 권리에 사람이 끌려가는데, 그 소가 가시밭이나 구렁으로 들어가면 가시밭이나 구렁으로 끌려 들어가고 산이나 들로 가면 산이나 들로 끌려가서 자빠지고 엎어지니 의복은 찢어지고 몸은 상하여 차마 볼 수 없더라. 내가 그 광경을 보다가 그에게 말하기를 그 소를 단단히 잡아서 함부로 가지 못하게 하고 꼭 길로만 몰아 가면 그런 봉변이 없을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그러하면 오죽 좋으리요마는 제가 무식하여 이 소를 길들이지 못하고 모든 권리를 소에게 맡겼더니 저은 점점 늙어지고 소는 차차 거칠어져서 이제는 어거할 능력이 없다 하더라. 오늘 그대가 오는 것을 보니 역시 소를 타고 오니 그 소는 어디 있는가.”
남천이 “방금 타고 있나이다.”하고 답했습니다.
대종사 다시 물었습니다. “그 소의 모양은 어떻게 생겼는가.”
남천이 답하기를 “키는 한 길이요, 빛은 누른빛이요, 신은 삼으로 만든 신이오며, 수염은 혹 검고 혹 희게 났나이다.”
대종사 웃으시며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소의 모양은 알았거니와 그러면 그대의 소은 그대의 하자는 대로 잘 하는가 그대도 역시 소에게 끌려 다니게 되는가.”
남천이 사뢰기를 “소가 대체로 저의 하자는 대로 합니다. 만일 정당한 일에 소가 게으름을 부리오면 호령하여 아무쪼록 그 일을 하게 하오며, 부당한 일에 소가 동하려 하오면 또한 호령하여 그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나이다.”
대종사께서 남천에게 당부하시기를 “그대가 소를 이미 발견하였고, 길들이는 법을 또한 알았으며, 더욱 힘을 써서 모든 일을 다 자유자재하도록 길을 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대종경 수행품54장> 말씀입니다.
대종사께서 김남천에 물었던 질문을 내 스스로에게 던져 보고 답해 보실까요.
혹 자기 소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사는 것은 아닌지. 알고는 있지만 내게 그 소를 이길 힘이 없어 마음대로 못하는 처지는 아닌지.
몸은 이렇게 소중합니다. 그래서 몸을 만사만리의 근본이며, 사은의 공물이라 했습니다. 사은의 공물이라 함은 ‘이 몸이 비록 내 몸이지만 내 한 몸에 그치지 않는다’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내 몸은 의식주를 해결하는 도구로서 가깝게는 한 가정을 지키는 든든한 버팀목으로서 역할도 하지만, 우리가 이 회상 만나 이 법으로 삼대력을 얻어 부처를 이루고 중생을 제도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인연이기도 합니다. 바로 영육쌍전이라는 수레의 두바퀴에서 빠뜨릴 수 없는 한바퀴입니다. 그래서 대종사께서는 심성수양만 강조하지 않고 기질수양도 아울러서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반면, 몸에 너무 집착하면 마음의 자유를 얻지 못합니다. 몸이 복을 짓고 지혜를 얻게 하는 소중한 도구임에는 분명하지만, 자칫하면 생사의 자유를 얻지 못하게 합니다. 또한 죄복을 임의로 할 수 있는 능력을 소진시키고 오히려 속박하게 됩니다. 부모님에 인연하여 세상에 태어난 이 몸은 생명을 부지하고 살아있는 동안 법신불사은님께 이름 석자를 적어놓고 임대해서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일생동안 임대해서 쓰는 만큼, 이생에 인연을 다하여 되 갚을 때는 원금과 이자를 갚고도 남을 정도는 돼야 하겠지요. 그런데 다 갚고도 남은 게 있다고 해서 그것을 못 잊어 이름 석자인 나를 놓지 못하고 산다면 이 몸이 ‘참 나’인 줄 알고 집착하여 해탈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몸을 소중하게 여겨 불공하면서도 중도에 맞게 사용하는 것, 그래서 무한한 은혜와 복과 지혜를 창출하는 것 그것이 바로 몸을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쓰는 공부입니다.
이 원상은 마음을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한 것이로다.’ 라고 하셨습니다.
일원상은 눈, 귀, 코, 입 몸을 사용할 때 쓰는 것이라 하시더니 마지막에 역시 마음을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무슨 연유가 있을까요?
대종경 인도품 23장 법문을 받들어 봅니다.
어느 날 밤에 조실 문을 지키던 개가 무슨 인기척에 심히 짖는지라, 한 제자 일어나서 개를 꾸짖었습니다. 대종사께서 그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개의 책임은 짖는 데에 있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그 책임 이행하는 것을 막는가. 이 세상에는 모든 사람과 모든 물건이 다 각각 책임이 있으며, 사람 하나에도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 각각 다 맡은 책임이 있나니, 상하와 귀천을 막론하고 다 그 책임만 이행한다면 이 세상은 질서가 서고 진보가 될 것이니라. 그런즉, 그대들은 각자의 책임 이행도 잘 하려니와 또한 남의 책임 이행을 방해하지도 말라. 그런데, 이 모든 책임 가운데에는 모든 책임을 지배하는 중추(中樞)의 책임이 또한 있나니, 사람은 그 마음이 중추의 책임이 되고, 사회 국가는 모든 지도자가 그 중추의 책임이 되어 모든 기관을 운영하고 조종하게 되나니라. 그러므로, 중추의 책임을 가진 사람으로서 조금이라도 그 책임에 등한하다면 거기에 따른 모든 책임 분야가 다 같이 누그러져서 그 기관은 자연 질서를 잃게 되나니 그대들은 각자의 처지를 살펴보아서 어떠한 책임이든지 그 이행에 정성을 다할 것이며, 모든 책임의 중추가 되는 마음의 운용에 주의하여 자신의 운명과 대중의 전도에 지장이 없도록 하라."
결국 마음이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진리에 어두운 중생에게도 있고, 진리를 깨달은 불보살에게도 있습니다.
물론 그 마음을 보아다가 사용할 때에 본래 마음에 합일하여 쓰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습관과 업력에 끌려서 사용하는가의 차이에 따라 다르겠지요.
이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나를 신이나 남이 나를 어떻게 하고, 내게 돌아오는 죄업도 그렇게 되는 것인 줄 알지만, 일체가 다 마음이 짓는 이치를 아는 사람은 마음공부에 정성을 다하는 것이지요. 마음을 모르는 사람은 욕심과 습관대로 살아갑니다. 즉 내게 있어서 마음이 주인이 아니라, 욕심과 습관이 주인이 되어 이 몸은 노예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대종경 요훈품에서 마음에 대한 법문 말씀을 받들어 봅니다.
"한 마음이 선하면 모든 선이 이에 따라 일어나고, 한 마음이 악하면 모든 악이 이에 따라 일어나나니, 그러므로 마음은 모든 선악의 근본이 되나니라."
"마음이 바르지 못한 사람이 돈이나 지식이나 권리가 많으면 그것이 도리어 죄악을 짓게 하는 근본이 되나니, 마음이 바른 뒤에야 돈과 지식과 권리가 다 영원한 복으로 화하나니라."<대종경 요훈품 4>
"자기 마음 가운데 악한 기운과 독한 기운이 풀어진 사람이라야 다른 사람의 악한 기운과 독한 기운을 풀어 줄 수 있나니라."<대종경 요훈품 30>
"상극의 마음이 화(禍)를 불러 들이는 근본이 되고, 상생의 마음이 복을 불러 들이는 근본이 되나니라."<대종경 요훈품 31>
마음작용의 힘이 이렇게 큽니다.
대종사께서는 이 마음을 잘 사용하는 이치를 일러 마음밭 즉 심전 계발이라 이르셨지요. 다음은 <대종경 요훈품 제 59장> 법문입니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본래에 분별과 주착이 없는 우리의 성품(性稟)에서 선악간 마음 발하는 것이 마치 저 밭에서 여러 가지 농작물과 잡초가 나오는 것 같다 하여 우리의 마음 바탕을 심전(心田)이라 하고 묵은 밭을 잘 개척하여 좋은 밭을 만들 듯이 우리의 마음 바탕을 잘 단련하여 혜복을 갖추어 얻자는 뜻에서 심전 계발(啓發)이라는 말이 있게 되었나니라. 그러므로, 심전을 잘 계발하는 사람은 저 농사 잘 짓는 사람이 밭에 잡초가 나면 매고 또 매어 잡초는 없애고 농작물만 골라 가꾸어 가을에 많은 수확을 얻는 것 같이, 선악간에 마음 발하는 것을 잘 조사하고 또 조사하여 악심이 나면 제거하고 또 제거해서 악심은 없애고 양심만 양성하므로 혜복이 항상 넉넉할 것이요, 심전 계발을 잘못 하는 사람은 저 농사 잘못 짓는 사람이 밭에 잡초가 나도 내버려두고 농작물이 나도 그대로 두어서 밭을 다 묵히어 가을에 수확할 것이 없는 것 같이, 악한 마음이 나도 그대로 행하고 선한 마음이 나도 그대로 행하여 자행 자지하는지라 당하는 것이 고뿐이요, 혜복의 길은 더욱 멀어지나니라. 그러므로, 우리의 천만 죄복이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이 심전 계발을 잘하고 못하는 데에 있나니, 이 일을 어찌 등한히 하리요."
우리의 원래 마음은 본래에 분별과 주착이 없고 원만구족합니다. 그 원래의 마음이 성품 곧 심전입니다.
이 심전계발을 잘 하는 사람은 마음을 사용할 때에 이 원상을 지공무사하게 쓰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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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상 (圓相)
⑴ 법신불 일원상의 준 말. 원불교에서 말하는 우주와 인생의 궁극적 진리. 모든 것을 다 갖춘 진리로서, 말로는 「일원상」이라 하고 형상으로는 「○」으로 표현한다. ⑵ 중생의 마음은 빛깔도 없고 형상도 없어서 어떻게 그 모양을 나타낼 수 없으나, 마음이 원만 평등한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동그라미로 표상(表象)한 것. ⑶ 선승이 선의 요체를 간결하게 나타내는 방편으로 그린 원. 위앙종의 앙산혜적이 제자들을 지도하기 위하여 수단으로 원을 즐겨 그렸다.
각 (覺)
⑴ 진리를 깨쳐 사리에 통달하는 것. 일원상의 진리를 깨달아 사은 사요의 신앙과 삼학 팔조의 수행으로 혜복을 닦아가는 것. ⑵ 부처의 깨달음. 곧 정등각(正等覺). 정(正)은 사곡(邪曲)에 대한 중정(中正), 등(等)은 편파에 대한 평등·보편. 각찰(覺察)과 각오(覺悟)의 두가지 뜻이 있다. 각찰은 번뇌·마장이 나쁜 것임을 깨쳐 아는 것, 각오는 무명 혼침의 마음에서 지혜를 밝혀 진리를 크게 깨치는 것.
시방삼계 (十方三界)
삼계는 욕계·색계·무색계, 또는 천계(天界)·지계(地界)·인계(人界). 시방과 시방속에 사는 전체생명. 우주 전체를 표현하는 말. 시방은 우주의 공간적인 표현.
음양상승 (陰陽相勝)
음과 양의 두 기운이 서로 밀고 밀어서 순환하는 것. 음양의 두 기운이 서로 조화하고 서로 밀어서(相推) 순환불궁 하는 것. 소태산 대종사는 「인과보응의 이치가 음양상승과 같이 되고」, 「음양상승의 도를 따라 선행자는 후일에 상생의 과보를 받고 악행자는 후일에 상극의 과보를 받으며」, 「우주에 음양상승하는 도를 따라 인간에 선악인과의 보응이 있게된다」하였다. 이처럼 음양상승은 인과보응의 이치와 같이 음양의 두 기운이 두레박처럼 돌고 도는 것을 말한다. 두레박 하나가 위로 올라가면 하나는 내려오고, 다시 내려온 것이 올라가면 올라 간 것은 내려오게 된다. 이와같이 음양의 두 기운이 서로 순환불궁하는 것이 음양상승이다.
원만구족 (圓滿具足)
⑴ 진리를 표현하는 말. 모자라거나 결함이 없이 모든 것을 두루 갖추어 있다는 뜻. 곧 일원상의 진리를 설명하는 말. ⑵ 원만구족한 일원상의 진리를 체받아 일상생활에 그대로 활용하는 불보살의 인격. 일원의 위력을 얻고 일원의 체성에 합한 경지. ⑶ 육근 동작이 법도에 맞다는 뜻. 일원의 진리는 인간의 육근동작을 통해서 현실로 나타난다.
지공무사 (至公無私)
⑴ 지극히 공평하여 사사로움이 전혀 없는 것. ⑵ 일원상의 진리의 한 측면. 곧 일원상의 진리를 공·원·정(空圓正)으로 파악할 때의 정(正). 인과보응의 이치를 알고, 애욕과 탐착을 끊으며, 모든 일에 과 불급이 없이 행동하는 것. ⑶ 중용·
상불경 (常不輕) : 항상 남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공경하는 것. 우주만물이 다 부처요, 모든 사람이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진리를 믿고,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