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법의 대요와 상시일기법
정전(正典)
제3 수행편(修行編)
제6장 일기법(日記法)
1. 일기법의 대요
재가·출가와 유무식을 막론하고 당일의 유무념 처리와 학습 상황과 계문에 범과 유무를 반성하기 위하여 상시 일기법을 제정하였으며, 학원이나 선원에서 훈련을 받는 공부인에게 당일내 작업한 시간 수와 당일의 수입·지출과 심신 작용의 처리건과 감각·감상을 기재시키기 위하여 정기 일기법을 제정하였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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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시 일기법]
<김제원 교무님 설법>
I. 들어가기 전에
오늘은 일기법 중 일기법의 개요와 상시 일기법에 대해 공부하겠습니다. 수행편에는 처음에 염불법, 좌선법, 의두요목이 나오고, 그 다음에 일기법이 나왔습니다. 염불, 좌선은 수양과목이고, 의두요목과 정기일기는 연구과목, 상시일기는 취사과목입니다. 이처럼 수양, 연구, 취사가 연결되어 있고, 그 다음에는 삼학을 종합한 무시선법이 이어집니다.
타종교를 다녀보신 분은 잘 아실 텐데, 저도 교회를 다녀 봤고, 불교 공부도 해봤지만 원불교처럼 이렇게 체계적으로 되어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특히 오늘 공부할 일기법을 보십시오. 종교가에서 일기법을 내 놓으신 것, 게다가 성자가 당대에 내 놓으신 것은 정말 특이한 경우입니다. 일반 사회에서는 프랭클린 다이어리 등 일기 기재법이 있긴 있는데, 우리는 좀 다릅니다. 사회에서도 일기를 수필식으로 많이 씁니다. 글재주가 있는 사람은 자랑도 하고, 또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쓰라고 하니까 쓰곤 합니다. 오늘 원불교에서 쓰는 일기와 그것들이 어떻게 다른지 공부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원불교 일기법의 역사>
우리 일기법에 대한 역사적인 스토리를 먼저 말하겠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구도 끝에 26세 때 대각을 하셨습니다. 대각을 하셨다니, 사람들이 막 모였는데, 그 중 거르고 걸러서 신심 있고, 공심있는 사람 여덟 분만 남겼습니다. 걸러진 사람들은 보통 사도(邪道), 신통묘술을 원하던 미(迷)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여덟분으로 하여금 교화단을 조직하셨고, 바로 저축조합을 만드셨습니다. 그 다음에 근검절약, 절약절식, 금주단연, 허례허식 폐지 등을 시키셨고, 제생의세 회상을 위한 자금준비와 함께, 그들의 신성, 단결력, 마음을 손보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단원들도 신심이 있는 것은 같은데, 아직도 마음에는 신통묘술이나 특별한 기틀을 원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서 하자, 천제의 말씀이라 하고 시키기도 하다가, 안되겠다 싶어서 먼저 법회(예회)를 열었습니다. 그때는 10일에 한 번 삼순일에 법회를 했습니다. (1일, 11일, 21일 이런 식으로) 바로 그때, 법회만 본 것이 아니고 숙제를 줬습니다. 한 주일 동안 신을 어긴 사람은 벌을 준다. 최초의 상시일기의 과제를 줬는데, 선계명시독이라고 하여 체크해 오도록 한 것이 있었습니다. 청홍백황흑 5가지 색으로 마음을 어떻게 썼느냐, 지켰느냐를 색칠하게 하여 점검했습니다. 거기에 잘 한사람도 있고, 거짓으로 한 사람도 있었는데, 대종사님이 귀신같이 알고 혼내셨다고 합니다.
당시 선진님들은 법회는 참 좋은데, 선계명시독 점검할 때는 벌벌 떨었다고 합니다. 우리 교도님들도 일기 내라고 하시면 잘 안하시죠? 그 당시에 일기를 안 쓰면 대종사를 속이는 것이고, 법계를 속이는 것이며, 법계를 속이면 큰 재앙에 떨어질 것이라고 하시면서 계속 챙기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일기법을 원기 2년에 바로 시작한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한글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어서, 흰콩, 검정콩으로 어떻게 마음을 썼느냐를 체크했습니다, 처음에는 화를 냈다하면 빨간색을 칠하고, 마음을 잘 썼다 하면 청색으로 칠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보게 하고, 챙기게 하고, 살펴보고 나서 점검하게 한 것입니다.
이 마음이라는 것이 희한합니다.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진공묘유입니다. 없을 때는 불생불멸이요, 있을 때는 인과응보입니다. 그 마음이란 챙기면 챙겨지지만, 또 놓으면 한정 없이 놓아지는 것입니다. 참 희한합니다.
<일기 ‘기재’>
유무념은 동(動)시에 체크하는 것입니다. 학습상황은 정(靜)시에 체크하는 것입니다. 계문은 동시에 했던 것을 저녁에 자기 전 정시에 체크하는 것입니다. 정기일기는 정시, 정기훈련 때에 하는 것이고, 상시일기는 평상 시 매일매일 당일당일 하는 것입니다.
원불교에 입문하여 ‘기재’ 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기재’라는 것이 Write 인가요? Record 인가요? 일기는 장사꾼이 물건 판 내역을 장부에 그대로 기재하듯이, 그대로 기재하면 됩니다. 즉, Record 입니다. 그대로 내려 쓰면 됩니다. 이 일기법 본문에 무려 ‘기재’라는 말이 10번 나오고, ‘당일’이라는 말이 6번 나옵니다. 계문 대조 같은 것은 당일에 기재하면 오차가 약간 있더라도 거의 다 맞습니다. 그런데 깜박 잊고 자고 나서 다음날 쓰면, 어지간하면 그 체크숫자가 줄어들게 됩니다. 아직까지 그 숫자가 더 늘어난 사람 못 봤습니다. 바로 그것의 인간의 본성인 것입니다. 웬만하면 자기의 점수를 좀 높이 주게 됩니다. 그래야 살아가는 맛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기를 쓰기 전에는 내가 뭘 잘못할게 있나,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일기는 구체적으로 쓰게 됩니다. 그래서 무형의 마음을 어떻게 썼냐가 유형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프로펠러나 풍차가 도는 것을 보고 무형의 바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무형의 마음공부를 한다고는 하는데, 무형한 마음이 단지 무형한 것만이 아니라 분명히 있고, 그 마음을 쓸 때 그것을 어떻게 확인하고, 챙기고, 점검하고, 이 흔적을 내가 만질 수 있느냐를 알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기재’입니다. 무형의 마음을 기재하면 그대로 유형의 흔적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재’란 말이 중요합니다. 마음공부를 오해하는 사람은 그냥 마음만 챙기면 된다고 하는데, 기재하지 않으면 변화가 더디고, 결과적으로 실패합니다.
<일기를 쓰는 이유>
오늘 하루를 잘 사셨는데 그 중 허송시간 얼마나 됩니까? 수양시간, 책 읽는 시간은 얼마나 됩니까? 유무념은 얼마나 체크하셨습니까? 이러한 것들을 기재하지 않으면 막연합니다. 따라서 인격도 막연해집니다. 인생이 막연해집니다. 평생 막연하게 사시려면 일기를 쓰지 않으면 됩니다. 마음이 무형이라고 하는데 분명이 있습니다. 일기기재를 방심하면 그 사람은 큰 변화가 어렵습니다. 일기는 삼학의 총체입니다. 상시일기는 취사 중심의 삼학의 총체입니다. 삼학공부의 총체가 주의(注意) 공부요, 일심공부요, 유무념 공부입니다. 정시의 공부는 학습상황입니다. 좌선을 몇 시간 했고, 염불을 몇 시간 했고, 독서를 몇 분 했고, 씻는 것 몇 분 등등 이런 것들을 기재하지 않으면 생활에 빈틈과 누수가 많아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각박하다, 스스로를 옥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이야 말로 내가 나의 주인공으로 살 수 있는 방법입니다. 내가 내 삶의 주체로 살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하루 살면서 내가 내 삶의 주체로 못산다는 것은, 그냥 멍 때리고 퍼질러져 있든지, 한 없이 티비보고 있든지, 게임하고 있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삶의 주인으로 사는 것인지 돌이켜 보십시오. 그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길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일기란 내가 제생의세나 성불의 길로 갈 수 있겠는지를 계속 돌이켜 보는 것입니다.
일기라는 것은 대조하는 것이고 점검, 평가, 확인하는 것입니다. 발전하지 못하는 개인과 단체는 다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그 단체가 탐, 진, 치나 감정에 끌렸다거나 할 수 도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가 잘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 계획을 안 하고, 무작정 실행을 합니다. 둘째, 끝나고 반드시 평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제대로 되었는지 추후에 수정 보완할 것이 있는지, 업그레이드 할 것이 있는지 살펴야 하는데, 평가하는 자리에는 나오지 않아 버립니다. 그냥 막연하게 다음에 잘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은 잡았을 때, 크려면 대포무외요, 작으면 세입무내 라고 합니다. 작기로 하면 겨자씨보다 작은 것이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챙길 때는 철저하게 챙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거기서 은혜가 생산되고, 신뢰가 생산되고, 보은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니 신뢰가 깨치고, 누군가는 화가 나고, ‘다음부터 하는가 봐라.’하고 원망하게 됩니다. 그것은 모두 그 마음을 꼼꼼하게 평가를 안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고원회가 10년 전에 하던 것을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창립제나 행사가 끝났으면 내년에는 어떻게 더 잘 할 것인가 하고 기록하고 평가해야 하는데,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잘했으면 좋겠다.’하고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사회에서도 일기 쓸 때 ‘다음엔 잘해야겠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언제? 이런 것이 빠져있습니다. 막연합니다. 그러므로 막연한 인격으로밖에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기재 하지 않는 사람은 성공하기 쉽지 않습니다.
II. 일기법의 대요
1. 일기법의 대요
재가·출가와 유무식을 막론하고 당일의 유무념 처리와 학습 상황과 계문에 범과 유무를 반성하기 위하여 상시 일기법을 제정하였으며,
‘교무님은 출가자니까 하세요, 나는 먹고 살기 어렵소, 나는 무식해서 하기 어렵소.’ 하는 사람들은 여기서 ‘재가, 유무식’이란 말을 지우시면 됩니다. 대종사님께서는 깨닫고 나서, 무식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먼저 상시일기를 시작하셨듯이, 처음에는 보통급 십계문을 하면 좋습니다. 법회출석을 우습게 아는 사람들, 일기를 쓰지 않는 사람들, 교무를 가까이 하지 않는 교도들은 보통급, 특신급에서 10-20년을 머뭅니다. 법회 보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반성한다고 하는데, 매일 저녁에 일기를 쓰고, 경계를 대하고 나서 바로바로 반성을 하는 것, 그것이 상시일기입니다. 사람들은 법회 보러 가서, 교회에 가서 한 주일을 반성한다고 합니다. 참된 반성은 경계에 따라 매일 저녁 일기 기재를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여기에 추가된 것이 또 있습니다. 바로 조석심고입니다. 아침에는 다짐, 저녁에는 참회반조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일기는 저녁심고와 매칭 되어있습니다. 둘을 따로 보면 안 됩니다. 이것을 따로따로 생각하니까 원불교는 뭔가 할 게 많다고만 합니다.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만 잘 한다면 일기가 필요가 없습니까? 그럼 계문이 왜 필요하고, 솔성요론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반드시 성불제중 하겠다, 깨닫겠다, 원력을 이루겠다.’는 사람은 일기를 기재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성하고, 자신을 업그레이드하고,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 살겠다는 사람은 반드시 일기를 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사람들은 잠자기 전에 씻고, 밥을 안 먹었으면 먹고, 피부 관리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마음도 씻어야 합니다. 오늘 작업 취사했던 것,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사용했던 것을 씻어야 합니다. 마음을 씻으시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저녁에 잠을 못 잔다고 하는데, 낮 동안의 업이 너무 두꺼워서, 너무 힘들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일기를 기재하여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자면, 잠이 잘 옵니다. 법회가 재미있으려면 상시일기를 잘 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시선의 원리입니다. 낮에 잘 살아야 일기기재까지 편하고, 밤에 잘 잘 수 있고, 다음 날 아침에도 편합니다. 따로 놀고 싶다는 사람, 교회 다니는 사람이 교회 가서 마음만 챙기고, 밖에 나와서는 마음을 챙기지 못하는 사람, 원불교를 20-30년 다녀도 그대로인 사람, 법회도 출석도 잘 하지 않고, 교무에게 연락도 안하고, 일기도 잘 안 쓰는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인격이 쉽게 바뀌고, 도를 얻어 활용할 수 있겠습니까? 쉽게 바뀐다면 세상에 도인들이 무수히 많을 것입니다. 마음이란 챙기고 챙겨도 무너지고, 경계에 자꾸 넘어갑니다. 그래서 신심과 서원이 매우 중요합니다.
일기 기재의 소요시간은 많이 걸려도 5분이면 끝납니다. TV는 그렇게 잘 보는데 일기 쓰는 5분은 왜 그렇게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내가 진짜 교도라고 인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정에 일원상 봉안 한 사람. 집에서 의식, 생일, 열반 등이 있을 때 원불교 의식으로 하는 사람. 이것들이 매우 중요합니다. 일기를 기재하는지, 법회를 빠지지 않고 출석하는지, 심고를 하는지, 헌공을 제대로 하는지도 중요합니다. 물론 마음에 따라 다릅니다. 원불교를 위해서 하지 말고 본인의 성불제중의 서원, 무량한 복과 혜를 위해서, 서원과 신심을 향해서 가면 됩니다. 이것이 가장 빠른 길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학원이나 선원에서 훈련을 받는 공부인에게 당일내 작업한 시간 수와 당일의 수입·지출과 심신 작용의 처리건과 감각·감상을 기재시키기 위하여 정기 일기법을 제정하였나니라.
이것은 정기일기이고, 다음 주에 자세하게 됩니다. 정기일기는 정기훈련 때나, 특별히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사람에게 해당이 되나, 상시에도 물론 할 수 있다. 수입지출, 작업시간 수, 감각감상 기재는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다.
III. 상시 일기법
2. 상시 일기법
1) 유념·무념은 모든 일을 당하여 유념으로 처리한 것과 무념으로 처리한 번수를 조사 기재하되, 하자는 조목과 말자는 조목에 취사하는 주의심을 가지고 한 것은 유념이라 하고, 취사하는 주의심이 없이 한 것은 무념이라 하나니, 처음에는 일이 잘 되었든지 못 되었든지 취사하는 주의심을 놓고 안 놓는 것으로 번수를 계산하나, 공부가 깊어가면 일이 잘되고 못된 것으로 번수를 계산하는 것이요,
유념과 무념에 대한 법문입니다. 보통 무념(無念)이라는 말이 두 가지로 쓰이는데, “무념공부”(상相 없는 공부)라고 하는 것은 “유념공부”와 같은 뜻이고, 여기 일기법의 무념은 방심(放心)의 무념입니다. 즉, 놓아버리는 마음입니다. “무념공부”라는 것은 무상무념, 상을 놓는 경지를 말합니다. 상시 일기법은 상시훈련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것입니다. 상시응용 주의사항을 제대로 실천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교당 내왕시 주의사항 까지 포함됩니다. 그것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체크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무형한 것이지만, 체크는 반드시 기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형의 마음을 그저 ‘잘해야지’하고 마음만으로 하는 사람은 생활에 큰 변화가 없습니다. 체크해서 일일이 확인해야 합니다. 마음은 무형이라 하지만 분명히 있습니다. 그 작용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심신작용 처리한 것을 기재하는 것입니다. 심신작용은 바로 마음이 들어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체가 없는 마음이라고 해서 작용이 없는 것이 아니고, 대충 ‘챙겨야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모든 일이 다 마음이 들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마음을 ‘유형화’하라는 것이 일기법입니다. 원불교 공부를 잘 못하면, 무형의 공부만 잘 하면 된다고 하는데, 유형화, 도식화, 데이터 뽑아 객관화하여 마음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마음공부입니다.
유무념을 정할 때, 주로 무엇을 정하십니까? 유무념은 ‘탐심을 내지 말며’ ‘치심을 내지 말며’와 같은 것 보다는, 가까운 데에서 할 만한 것으로 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약 3~6개월 안에 평떼기(땅따먹기에서 자기 땅을 확보해 가는 것)가 가능한 것으로 정해야 합니다. 이것을 하다 보면 재미가 붙고, 체험이 붙고, 힘이 붙고 진급해 갑니다. 상황과 여건에 맞게 유무념을 정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밥을 제때 먹기, 이빨을 3분 내에 닦기, 다리를 오그리고 앉기, 몇 시에 기상하기, 정해진 시간에 취침하기, 하루에 경전을 몇 분 읽기와 같은 유무념이나, 계문이나 솔성요론 중에 토를 떼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부터 유무념으로 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격은 참 바꾸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바꿀 수 있습니다. 원래 성격은 본래 원만구족 지공무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세생생 닦아오면서 길들인 대로, 쓰던 대로 삐뚤어져 있고, 자가당착으로 빠져있습니다. 예를 들어, 관계형 사람들은 자신이 따뜻한 사람이라 생각하며, 일을 꼼꼼히 하는 사람을 보면 냉정하다고 비인간적이라고 착각합니다. 원만하지 못한 생각입니다. 기질(습관)에 관련 된 것은 100일이면 변화가 가능합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은 가능합니다. 성격은 인생 내내 죽도록 해도 안 바뀌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황혼이혼이 많습니다. 그래서 결혼 할 때도 비슷한 성격과 하는 게 낫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이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혀 반대의 성격과 결혼을 하면, 천 번 만 번을 싸울 것입니다. 그래도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유무념 공부, 마음공부입니다. 차이를 참아가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공부입니다. 부부가 살아가면서 이혼을 생각 안 해본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물론 자기도 문제지만 피차가 성격을 서로 고치라고 아무리 말해줘도 잘 고쳐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습관이 들어서 그것이 고착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그것이 괜찮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가까운 생활의 습관을 고쳐나가면서 성격과 마음까지 고쳐나가야 합니다. 이 생에 전부는 안 되더라도, 무르게 하고 단단한 것을 조금씩 깨 놓아서 내생에라도 더 잘 하게 해야 합니다.
중생들은 자신의 장점만 자꾸 살려 쓰는데, 성자는 절장보단(絶長保短) 한다고 합니다. 중생들은 장점만 생각하여 그것에 더욱 고착되어 갑니다. 반면에 다른 것에는 하자가 생깁니다. 그 하자가 무엇입니까? 호리병의 중간에 움푹 들어간 부분이 있죠? 이처럼 장점이 아무리 있어도 단점 때문에 결정적인 부분을 통과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유무념이 참 중요합니다. 그 단점을 보완해야 성위(聖位)에 올라갑니다. 장점은 사업을 하거나 부하직원 고용할 때나 좋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인격문제는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 원불교도 초입자가 이 유무념을 너무 챙겨도 곤란합니다. 사실 젊을 때는 그런 병도 한 번 걸려봐야 합니다. 제가 원불교학과 다닐 때, 이 마음을 제대로 챙겨보고 싶어서 온갖 마음을 다 챙겨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머리가 터져버리려고 했습니다. 저 같은 선진이 참 많으셨다고 합니다. 좌산 상사님도 대산종사님을 옆에서 모실 때 잠자는 순간까지 챙겨보셨다고 합니다. 그러다가서 병이 나서 오래 못 모셨다고 합니다. 마음은 탄력적으로 하되, 힘과 근기에 맞게 단계적으로 해야 합니다. 억지로 하지 말고 재미있게 해야 합니다. 땅따먹기에서 조금씩 내 땅을 따 먹는 것이 바로 평떼기입니다. 마음공부가 이것입니다. 발 떠는 것을 멈추겠다, 늦게 일어나는 것을 멈추겠다, 글씨를 잘 써야겠다, 날마다 샤워하겠다, 이렇게 쉬운 것부터 하나하나씩 잡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자동으로 됩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하게 되는데, 나중에는 자동이 됩니다. 유무념을 어느 정도 하다보면 하루에 4등분으로 나눠서 하기도 하고, 나이 먹어서 항마위, 출가위에 올라가면 하루에 2번 정도 나눠서 체크하면 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유무념 시계, 스마트폰 어플, 스마트 염주 등 방법이 많이 있으니 활용하면 됩니다. 머리에 일일이 기억할 필요 없이, 그 때마다 바로바로 체크하면 됩니다. 아니면 콩으로 세면서 하면 됩니다. 달력에다가 하나하나 체크해도 됩니다. 체크하는 그것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그 체크하는 것이 무서운 공부입니다. 하루에 단, 5분밖에 안 걸리는 것인데, 그 체크가 굉장히 무섭습니다. 이 작은 것이 나중에 엄청나게 차이가 납니다. 스스로 착각에서 벗어나게 만듭니다. 정확하게 데이터가 나옵니다. 저승의 재판문서가 일기라고 했습니다. 물론 객관적으로 해야겠지요. 무형의 마음을 번수를 기재함으로서 수치화하고, 시각화해서 점검하고 수정하도록 하는 것이 일기법입니다. 유무념은 바로 삼학 공부인데 동시(動時)의 삼학 공부입니다. 처음에는 일을 잘했나 못했나가 아니고, 취사하는 주의심을 놓았는지 놓지 않았는지,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는 주의를 했는지, 안 했는지 체크하라고 했습니다. 일의 처리는 아직 미흡하거나, 습관 자체는 바로 개선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중에 여기서 더 들어가면 내 행동이 주변에 은혜가 되었는가, 안 되었는가도 봐야 합니다. 나한테만 은혜가 되고, 남에게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유무념을 정할 때, 자기에게 가까운 것부터, 잘 할 수 있는 것부터 일과나 계문, 솔성요론 중에서 하나를 정하여 3~6개월 후에 토를 확 떼보십시오. 재미있게 하시고, 그것을 조석심고 때 한 번 더 다지십시오. 아침에는 ‘오늘 하루 이렇게 하겠다.’ 저녁에는 ‘오늘 이렇게 했습니다.’하고 참회하고, 일기까지 기재하셔야 합니다. 유념을 해도 재미가 있고 무념을 해도 재미가 있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예쁠 때가 있습니다. 마음의 원리를 모르면 ‘이 멍청한 놈아, 이것도 못하니.’ 하면서 스스로 자책합니다. 마음의 원리를 알면, 잘했어도 예쁘고 못했어도 예쁩니다. 잘 모르면 스스로 자책만 합니다. 그것은 습관과 업력의 위력, 마음의 원리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계문에 탐심, 진심, 치심을 ‘나지 말며’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밖으로 ‘내지 말며’ 라고 했습니다. 마음은 경계 따라 당연히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문, 유무념을 할 때도 자기의 기준이 어디까지인가에 대하여 사람마다 다릅니다. 체크는 똑같이 했더라도 어떤 사람은 덜 어기고, 어떤 사람은 더 어겼을 수도 있습니다. 뒤에, ‘하자는 조목과 말자는 조목’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게임 안하기, 하루에 한자 몇 개 외우기, 밥 먹을 때 소식하기, 하루에 미소를 몇 번 짓겠다, 약자를 위해서 몇 번 도움을 주겠다, 감사의 인사말을 몇 번 하겠다, 손톱 물어뜯지 않겠다, 방청소를 깨끗이 하겠다, 말할 때는 잠깐 멈춰서 하겠다, 운동을 30분 이상 하겠다, 사경이나 봉독을 하루에 몇 분 하겠다 등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자유를 억압한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정말로 스스로 억압되고 구속될 것입니다. 정당한 구속을 통해서만 참 자유가 열려 갑니다. 저는 일기를 쓰는 사람이 박수를 많이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청년들은 청년회 출신 선배 교도들이 주는 지원금으로 상시일기 시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냥 쓰라는 것이 아니고, 괜히 귀한 돈 주는 것이 아닙니다. 젊을 때 일기 챙기는 것을 체질화 하라, 습관화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원불교의 주인이 된다, 원불교를 만난 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뜻으로 주는 것입니다.
2) 학습 상황 중 수양과 연구의 각 과목은 그 시간 수를 계산하여 기재하며, 예회와 입선은 참석 여부를 대조 기재하는 것이요,
상시응용 주의사항, 교당내왕시 주의사항은 상시 훈련법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체크하는 것이 상시일기입니다. 그 중에 정기일기가 있습니다. 학습상황은 상시일기 중의 정기 공부입니다. 수양을 얼마나 했는지 연구를 얼마나 했는지, 법회와 훈련을 참석 했는지 여부를 기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일기를 기재하지 않으면 삼학 공부의 한 편에 치우치는데, 그것을 치우친 줄도 모르게 치우쳐갑니다. 마음이란 잡으면 있어지고, 놓으면 없어진다고 하는데, 이 서원이라는 것은 텅 빈 곳을 향해 가겠다는 마음을 잡는 것입니다. 일기를 하지 않으면 마음이 풀려 버립니다. 신심도 그렇습니다. 매일매일 하는 것입니다. 매일 대종사님을 만나는 것, 스승님을 만나는 것, 매일 신심 서원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법회 때만 와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계도 놔두면 녹이 습니다. 우리의 정신도 단련하지 않으면 빛을 잃어가고, 연구력도 쓰지 않으면 어두워집니다. 취사력도 기질변화까지 되지 않으면 한 경계가 오면 과거와 습관의 업력이 몰려와서 바로 무너집니다. 교당에서 여러분들께 사경하고, 헌배하라고 책도 만들어 주고 좌복도 만들어 줬지만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잘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항마위 갈 사람인지 아닌지 다 지켜보고 있습니다. 마음에는 반드시 핑계가 나오게 됩니다. 자기가 자기 스스로에게 속습니다. 자기가 속은 줄도 모르게 말이죠. 그래서 솔성요론에 ‘일일 시시로 자기가 자기를 가르칠 것이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상시일기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가르친 사람은 법회 와서 설법이 정말 기쁘고 재밌습니다. 그런데 이를 하지 않는 사람은 법회에 잘 오지도 않지만, 와서 괜히 찔리고 무섭다고 합니다. 자기가 스스로 자기 관리를 안했기 때문입니다. 사종의무 중에서도 기초는 법회출석입니다. 다른 3가지(조석심고, 보은헌공. 입교연원)도 있지만, 법회출석을 안하면 다른 것은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3) 계문은 범과 유무를 대조하되 범과가 있을 때에는 해당 조목에 범한 번수를 기재하는 것이요,
계문을 범했는지 안했는지를 대조하는 것이 급도 나눠져서 나와 있습니다. 법마상전급 까지는 30개의 계문이 있고, 그 이상에는 심계가 있습니다. 심계라는 것은 항마위에 올라가면 소승이나, 안일에 떨어진다거나, 국한을 넓힌다거나, 신맥(信脈)을 넓힌다거나 하는 등의 심계가 있는데 아직 여러분들은 아니니까 괜찮습니다. 여러분들 계문 중에 잘 안 지켜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잡기나 게임, 직장 생활하는 사람은 타인의 과실 말하기 이런 것들일 것입니다. 신분검사 할 때 보면, ‘다른 사람의 과실을 말하는 것 까지도 말린다’가 특(特)입니다. 이 계문을 지킬 때도, 그럴 때는 어떻게 할까? 화제를 돌려버릴까? 이 자리에 빠져버릴까? 저 욕하는 사람을 혼내버릴까? 그 사람을 도리어 칭찬해 버릴까? 하면서 그 상황과 여건에 맞게 취사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계문을 지키는 데도 삼학공부가 필요합니다. 계문대조를 하면 헷갈리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상시일기로 하면서,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면서, 상시응용 주의사항을 하면 물어볼 것이 나옵니다. 그 모르는 것을 단장한테 물어 해결하고, 거기서 해결이 안 되면 교무에게 물어보고 감정 받고 그렇게 하는 과정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상시 일기를 기재하는 것은 계문을 대조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온 사람들은 보통급 계문이 원불교의 기초를 다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무에게 그렇게 말합니다. ‘온전한 생각으로 하면 되지 왜 계문을 두는가?’ 보통급을 두는 것은 기초를 닦는 것입니다. 보통급 계문부터 손을 봐서 업을 더 짓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업을 갚으려면, 그 업의 물을 빼려면 참 힘듭니다. 계문을 지킴으로서 다른 공부를 하는 기초가 향상이 됩니다. 원불교를 10~20년 다니면서 담배 못 끊는 사람은 보통급도 안 됩니다. 연고는 생사(生死)에 관련된 것입니다. 재생의세와 관련된 것입니다. 천지재변이 있어야 연고입니다. 오늘 야구 이겼으니까 한 잔, 날씨가 좋으니까 한 잔, 일찍 끝났으니까 한 잔 하는 것은, 연고가 아닙니다.
4) 문자와 서식에 능하지 못한 사람을 위하여는 따로이 태조사(太調査) 법을 두어 유념 무념만을 대조하게 하나니, 취사하는 주의심을 가지고 한 것은 흰 콩으로 하고 취사하는 주의심이 없이 한 것은 검은 콩으로 하여, 유념·무념의 번수를 계산하게 하는 것이니라.
이 조목은 대종사님의 대자대비가 나타나 있습니다. 문자를 모르는 사람에게도 콩으로 조사하라고 하셨습니다. 원기 16년에 내놓으셨는데, 이것이야말로 극락 가는 비결이라고 표현해 주셨습니다. 태조사 자체가 비결이 아니고, 이를 통한 유무념이 비결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무식한 사람도 할 수 있습니다.
대산종사님께서 결혼을 하시고 나서, 이영훈 사모님이 종사님께서 무슨 가방을 항상 꼭꼭 잠그시길래 하도 궁금하여 몰래 가방을 열어 보셨다고 합니다. 보니 태조사를 하고 계셨답니다. 종법사님이 되시고 나서도 한 참 하시다가 상사가 되고 나서 좌산 종법사님께 그 주머니를 주셨다고 합니다. 대산 종사님께서 그 글씨라든지 글을 보시면, 유식중의 최고의 유식인데도 유무념 대조를 태조사로 하셨습니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에게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교과서 열심히 공부했다고 합니다. 바로 유무념을 오롯이 하면 설사 무식하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진급합니다. 박원허 청년이 탁구를 치면 항상 지고 갑니다. 그것은 기초가 형성이 안 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실수가 많고, 불안정합니다. 우리 원불교 공부도 우직하게 기초를 탄탄하게 해야 합니다. 바보같이 일기를 체크하고 유무념 대조하고, 허송시간, 책 본 시간까지 일일이 적어가며 하는 것이 결국에는 성공합니다. 그래프가 다릅니다. 우직하게 하는 것이 처음에는 늦어 보이지만, 처음부터 큰 것만 보고 하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빠를지 몰라도 강급합니다. 10~20년 지나고 나면 일기를 잘 체크하느냐 따라서 항마위에 올라가느냐 못 올라가느냐, 인격과 습관이 변화 하였는지 못했는지 판단이 섭니다. 정 안되면, 신심으로도 해보십시오. 대종사님께서 하라고 하셨으니까 해보세요. 여러분 모두 신심 있지요? 따라 해보십시오. ‘나는 신심이 있다, 고로 시킨 대로 하련다.’ 그러면 됩니다.
IV. 질의응답
질문(최법륜): 저는 ‘설법 듣고, 반드시 질문하기’를 유무념으로 삼고 있는데, 하다가 보면 질문을 해도 더 안 좋은 상황이 될 때도 있습니다. 질문을 하더라도 난감한 상황, 은혜가 안 되는 상황이 될 경우가 있고, 판단이 안 설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변: 좋은 질문입니다. 그런데 본인도 답을 알고 있지죠? 본인이 여건을 핑계 삼아서 안하려는 건지, 질문을 하는 것인지 돌이켜보세요. 양산 김중묵 선생님께서는, 만법귀일에 대해 일러보라고 대종사님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대종사님은 제자들이 답변을 해도 맞다 틀렸다는 말씀을 안 하시고 듣고만 계셨지요. 양산 종사님은 당신이 도리어 대종사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대종사님 질문의 의도를 계속 물었습니다. 한번은 대종사님께서 ‘내가 너한테 질문했는데 너는 왜 나한테 질문하느냐.’ 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중묵이가 공부 제일 잘 한다고 하셨습니다.’ 질문 하는 것이 바로 겸손한 마음입니다.
질문을 많이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상 없이 질문하고,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려고 하지 말고, 핵심만 질문하고, 연마해서 요령 있게 질문해야 하죠. 자기가 무슨 질문 했는지 기억 못할 정도의 질문은 하지 마세요.
대종사님 당대에도 얼마나 질문을 안했으면 그렇게 질문 하라고 하셨는지 몰라요. 오죽 했으면, 어떤 제자가 ‘여기가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 맞습니까?’라고 질문하니까 너 참 잘했다고 하셨다고 합니다.
절장보단[絶長補短]
(絶 : 끊을 절, 長 : 긴 장, 補 : 도울 보, 短 : 짧을 단)
장점이나 넉넉한 것으로 단점이나 부족한 것을 補充(보충)함.
장점으로 결점을 보충한다.
절(絶)은 절(截)과 통함. 출전 孟子(맹자) 滕文公上篇(등문공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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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어떻게 깨어 살 것인가.]
<조법전 교무>
"재가·출가와 유무식을 막론하고 당일의 유무념 처리와 학습 상황과 계문에 범과 유무를 반성하기 위하여 상시 일기법을 제정하였으며, 학원이나 선원에서 훈련을 받는 공부인에게 당일 내 작업한 시간 수와 당일의 수입·지출과 심신 작용의 처리건과 감각·감상을 기재시키기 위하여 정기 일기법을 제정 하였나니라." 이상은 〈정전〉에서 밝혀주신 일기법의 대요입니다.
상시일기를 기재하게 된 동기
출가 전에 대산종사님을 모시고 완도 소남훈련원에서 받들었던 말씀이 있습니다. 모 교무님께서 당시 종법사님이셨던 대산종사께 "종법사님이 안계시면(열반하시면)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까요"하고 여쭈니 "아 ~ 상시응용6조가 있지! 상시훈련, 정기훈련법" 이라는 말씀을 하셨고 바로 옆에서 이 말씀을 받들었던 저는 뭔지는 몰라도 상시응용6조를 점검하는 상시일기를 무조건 기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상시일기를 기재해 보니
출가를 하고 수학과정을 거치며 교무가 되는 동안 상시일기를 기재해보니 학습상황과 계문 점검은 어렵게 생각되지 않았는데, 유무념 대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상시응용6조 가운데 제1조인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라는 조항에 유무념으로 공을 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경계 따라 멈추는, 온전함의 원천인 수양공부에 남다른 노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들어 조석좌선에 공을 들이기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생명에 지장이 없는 한 조석수양의 시간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공부를 하다 보니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한다는 것은 동할 때 삼학병진의 공부법이면서 곧 정심취사라는 방향이 잡혔고, 정심취사의 극치는 일원상법어의 원만구족 지공무사와 하나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간사시절 어느 날 교회 신자분이 제게 질문을 했습니다. "하루 신앙생활 중 어느 시간이 가장 즐겁습니까?" "좌선시간이요" 그랬더니 그 분은 성경 읽는 시간이라 답을 했습니다. 그랬던 제가 이제는 모든 시간이 좌선과 하나임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구슬이 세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되듯이 유무념은 하루의 경계 속에 취사하는 주의심의 반복으로 하루가 일념현전 하나로 꿰어지는 기쁨을 주었습니다.
일기는 수도인의 일과인 아침 수양정진의 시간, 낮 보은봉공의 시간, 밤 참회반성의 시간과 다름이 없으며,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어떻게 깨어 있는가의 현주소입니다. 그래서 좌산상사께서 하루일과로 득력하자 하셨으며, 공부인이라면 상시일기의 핵심인 유무념 대조에 스스로 인증할 수 있는 한 경지를 얻어야 합니다. 또한 일기는 대소유무의 감각감상과 주의라는 집중을 통해 점점 성리에 계합하는 공부이며, 반복을 통해 성리를 생활화하는 공부법이요, 좌선의 단계에서 나아가 종횡무진의 무시선으로 이어지게 하는 묘법인 것입니다.
일기는
1) 아침, 수양정진 시간
2) 낮, 보은봉공 시간
3) 밤, 참회반성 시간과 연결
신앙생활과 일기와의 관계
교당에서 이루어지는 신앙 수행의 생활은 크게 두 가지를 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하나는 일요예회요, 또 하나는 교화단회입니다. 예회는 타력에 바탕하여 법의 강론을 통해 배우고 지혜를 밝혀나간다고 할 수 있으며, 교화단회는 각자 상시일기에 바탕한 자율적 공부내용을 가지고 서로 회화하며 공부사업을 촉진합니다. 그러므로 교당 교도님들이 상시일기를 쓰는 분이 많아야 그만큼 속 깊은 공부인이 많다고 할 수 있는데, 대체적으로 상시일기를 쓰는 분이 많지가 않습니다. 또 요즘은 교화대불공 10분성업을 하는데 더 역점이 주어지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두 가지를 다 잘하시면 좋겠지만 그건 다수 교도님들께 무리라는 생각이 들고 원래 주체인 상시일기가 살아나 그 속에서 10분성업을 살려내야 내실 있고 근원 있는 공부가 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반면에 정기일기는 훈련원에서 비교적 그 형식을 잘 지키고 있으나 훈련의 단기성 때문에 교도님들이 자력있게 더욱 챙기어 공을 더 들여야 하겠습니다.
정기일기와 상시일기의 관계
교단적으로 반드시 살아나야 합니다. 상시일기 기재를 한 달 동안 다 채우지 못하더라도 몇 번이고 시도해보는 교도가 대종사님의 소수의 정예부대가 됨은 말이 필요치 않습니다.
정기일기는 사리연구과목이며 정해진 훈련기간에 기재하는 것이라면 상시일기는 작업취사과목이며 1년 내내 항상 쓰는 것입니다. 또한 상시일기의 유무념 내용을 기재하다보면 심신작용 처리건이 무수히 나오고 감각감상 또한 수없이 일어나며 바른 마음과 공정한 마음가짐이 마음공부의 1순위임을 확인하곤 합니다. 정기일기의 당일 내 작업 시간 수도 유무념의 일과 속에 둘이 아니게 들어있어 허송한 시간이 있고 보면 반드시 무념에 체크가 됨을 볼 수 있습니다. 정기·상시일기는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정기일기는 정해진 기간에 좀 더 구체적으로 한 건, 한 건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며 시비이해나 대소유무의 밝아지는 정도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공부입니다. 상시일기는 실제 현장에 투입이 되어 단련된 혜두에 바탕, 수시응변하는 취사가 주가 되어 죄고를 미연에 방지하고 하루를 되돌아보며 반성하여 경계에 물들지 않게 하는 공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불제중의 대업에 마침표 찍는 공부
요즘 TV에서 교통사고 블랙박스 영상물이 인기입니다. 사소한 신호위반과 부주의가 큰 사고로 이어지는 것을 보니 운전을 할 때 저절로 주의와 각성이 들었습니다. 작은 교통법규를 살피지 못하는 것도 이렇게 피해가 큰데 육도윤회의 세계와 인과의 세계, 진·강급의 세계를 보시며 법을 짜신 주세불대종사의 혜안에 우리가 주파수를 맞추지 못한다면 그 피해가 한생에 그치는 영상에 비하겠습니까? 불지라는 목적지를 향해 항해를 시작한 일원의 법자 여러분! 대종사께서 내놓으신 일기법을 잘 활용하여 성불제중의 대업에 마침표를 찍어봅시다.
★★★★★★★★★★
[복과 지혜를 장만하는 일기법]
<민성효 교무 / 원불교대학원대학교>
중학교시절 학교에서 내준 숙제의 하나로 매일 매일의 일상을 기록하고 그것에 대한 감상을 적는 정도의 소박한 일기를 쓰고 있던 나는 〈원불교교전〉에서 처음 일기법을 보고 매우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종교는 영혼이나 정신의 문제에 대해 공부하는 곳으로만 알았는데 종교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일기법이 나로 하여금 원불교는 실용적이고 매력적인 종교라는 생각을 갖게 한 계기가 되었다.
소태산대종사께서 일기법을 밝혀주신 까닭은 무엇일까? 대개 사람들은 복을 받고 싶어 하고 죄받기는 싫어하지만, 복과 죄가 어디로부터 오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복 받을 만한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복받기를 원하므로 복은 더 멀어지고 오히려 죄고로 빠지기도 한다. 노력하지 않고 복받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밥을 먹지 않고 배부르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허망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복을 받을 수 있을까? 대종사님은 삼대력 공부를 잘해서 수양, 연구, 취사의 삼대력을 얻고 보면 혜복이 쌓여 영원무궁토록 복락을 수용하게 된다고 하셨다. 삼대력을 얻으려면 상시응용주의사항 6조와 교당내왕시주의사항 6조와 계문 이행 등 일기법을 실행함이 빠른 길이니, 일기법은 삼대력을 얻도록 촉진시키는 공부법이다.
일기법의 형성과정을 보면 신성의 진퇴와 행실의 선악을 대조하고 대종사께서 직접 조사하고 감정했던 성계명시독, 각 항목에 대하여 갑을병정무불의 6단계로 조사했던 단원성적조사법, 흰콩과 검정콩으로 유무념 대조공부의 기원이 되었던 태조사법, 상시일기법과 정기일기법의 대요를 구체화한 일기법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일기법은 교법을 실천하는 것이 목적이며, 이를 위해서는 생활에 대조하여 조사하고 평가하는 방법이 필요한데, 일기법이 바로 교리실천 정도를 대조하고 조사하여 평가하는 아주 좋은 방법이다. 지도자인 단장에게 교화단 조직을 통해 지도를 받아서 생활을 변화시키고 사람을 성숙시키는 것이 원불교에서 일기를 기재하는 목적이다.
일기는 누구에게 제출하여 평가받기 위함이 아니며 아름다운 글쓰기도 아니므로 있는 그대로 기재하기에 노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일기는 우리의 교리와 제도와 의식을 철저히 알아서 실천하고 있는가의 여부를 조사해야 하며, 자신의 잘못된 전생 습관과 금생의 허물을 고쳐서 복 짓고 지혜 닦는 생활로 일관하리라는 굳은 결심으로 물샐 틈 없이 탄탄한 새 생활을 계획하고 실천하는데 활용해야 한다. 일기기재를 통해 하루하루를 좀 더 값지고 알차게 공부하면서 보은하자는 데 큰 뜻이 있으며, 허송시간을 줄이고, 순간순간을 마음공부에 공을 들이며 악습을 고치고 선행을 촉진하여 빈틈없고 원만한 진리적 새 생활을 하여 진급이 되고 은혜를 장만하는 공부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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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급하고 복짓는 유무념 대조 공부]
<민성효 교무 / 원불교대학원대학교>
원불교 일기법은 일반적인 생활일기와는 달리 마음공부와 죄복결산의 결과를 기재하여 매일 매일 진급하고 은혜로운 생활을 하게 하는 공부법이다. 재가 출가교도들을 고루 훈련시키기 위하여 제정한 일기법에는 상시일기와 정기일기가 있고, 상시일기는 유무념과 학습상황과 계문의 범과 유무를 기재한다.
유무념 대조법에서 유념은 육근을 작용할 때 취사하는 주의심을 놓지 아니하고 실행하는 것을 말하고, 무념은 육근을 작용할 때 취사하는 주의심 없이 하고 싶은데 끌리고 하기 싫은데 흔들려서 되는대로 하는 것을 말한다. 유무념의 수를 기재할 때는 유념으로 처리한 경계수와 무념으로 처리한 경계수를 기재하는데, 일기를 처음 하는 사람은 일이 잘 되고 잘못된 것에 관계없이 마음을 챙긴 횟수가 절반 이상이면 유념으로 하고 절반 미만이면 무념으로 처리하였지만, 공부가 깊어 가면 마음을 챙긴 횟수에 관계없이 일이 잘 되고 잘못된 것으로 유념과 무념을 구분하였다. 예를 들면 30계문에 진심을 내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역경을 당할 때 생각없이 진심을 낸 것은 무념이요, 취사를 하여 진심을 내지 않은 것은 유념으로 처리하는 것이다. 유무념을 대조시키는 뜻은 잘된 일은 복이 되고 잘못된 일은 죄가 되므로, 매일 육근을 작용할 때 죄는 짓지 않고 복만 짓게 하는 방법이다.
이 공부를 하려면 먼저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해야 할 일은 일원상 진리의 신앙과 수행, 삼학팔조와 사은사요를 실천하는 것, 솔성요론과 일상수행의 요법을 수시로 대조하고 실행하자는 것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불신과 탐욕과 게으름과 어리석음을 비롯하여 30계문을 범하지 않는 것이다.
대산종사는 유무념 대조를 하는 데도 단계가 있다고 하셨다. 1단계는 자신의 습관을 유무념 표준으로 하는 단계로 자기가 길들이거나 없애야할 습관을 유무념의 항목으로 정하는 것인데, 유무념공부를 처음으로 하는 사람들이 요령을 잡는데 매우 유익하고, 이미 여러 곳에서 실행하여 많은 효과를 보고 있다. 2단계는 주의심을 표준으로 하는 단계로 모든 일을 취사하는데 일단 멈추어 생각하는 주의심을 챙기며 취사하는 것을 유념으로 하고, 주의심이 없이 하는 것을 무념으로 하는 단계이다. 경계를 알아차려서 경계에 속지 않고 본래마음을 회복하는 것이다. 3단계는 일의 결과를 표준으로 하는 단계이다. 주의심으로 실행하여 성공한 결과까지를 보고 유념으로 하는 단계이다. 4단계는 일심상태의 지속여부를 표준으로 하는 단계로 한 단위의 일이나 한 단위의 일과에 일심상태가 지속됨을 유념으로 표준 잡는 것이다.
대산종사는 언제나 작은 가방속에 상시일기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챙기지 않아도 저절로 되실 것 같은데 여전히 공부를 하신 것이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