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재(Aid Perfection) 2015. 1. 23. 15:02

정산종사법어(鼎山宗師法語)

제2부 법어(法語)

제5 원리편(原理篇) 53장

이 정은(李正恩)이 묻기를 [무엇이 선근 종자가 되겠나이까.] 말씀하시기를 [선을 좋아하는 습관이 선근 종자가 되나니, 과거의 습관은 현재의 종자가 되고 현재의 습관은 미래의 종자가 되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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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李正恩]

본명은 정복(正福). 법호는 정타원(靜陀圓). 법훈은 종사. 1923년(원기8) 12월 21일 전남 영광군 묘량면 신천리 신흥에서 부친 완철(應山李完喆)과 모친 유화윤옥(劉華潤玉)의 1남 4녀 중 3녀로 출생했다. 할아버지 장운(向山李壯運)은 우애 제일을 강조하며 6촌들과도 친형제처럼 살라 가르쳤고, 서로 헤어지지 말고 한 울안에서 살면서 장차 큰 인물들이 되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 꿈은 소태산대종사의 불법연구회로 인하여 깨어지고 말았다. 이재철ㆍ이완철을 비롯하여 문중의 남자들이 차례로 불법연구회로 떠났기 때문이다. 그녀도 일찍부터 마음속으로 “여자나이 20세가 되면 시집을 가는데 나도 마찬가지로 시집을 보낼 것이다. 그러니 집안일을 열심히 거들고 스물이 되기 전에 전무출신으로 나가자”는 생각뿐이었다. 1927년(원기12) 신흥교당이 창설되었고, 수신조합을 경영하면서 새생활운동을 전개하는 등 차츰 모범부락으로 발전해갔다.

19세 되던 6월 큰 언니인 이태연의 뒤를 이어 영산학원으로 들어가 3개월간 공부했으며, 1년 먼저 전무출신한 이성신을 따라 총부에 오게 되었다. 몇 달간 총부 학원에서 공부하다 여사무원이 되어 4년간 사무를 보았다. 이때 이공주의 지도로 분명한 일처리와 정확한 시간생활을 배웠다. 그러면서 3년간 종두(鐘頭) 역할도 했다. 그 당시는 신호로 북을 쳤는데 한 번도 시간을 어긴 일이 없을 만큼 정확했고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교단의 규칙을 철저히 지키는 일이 생활화되었다.

유일학림 졸업 후 첫 교화 장소는 경남교당(현 부산교당)이었다. 그곳에서 한국전쟁과 제1대 성업봉찬대회를 맞았고 이어서 산동ㆍ이리ㆍ서울ㆍ마산 등지에서 봉직했다. 1956년(원기41)부터 15년간은 이리교당 교화의 황금기였다. 부임당시의 교당은 흉가라고 소문난 집이었지만 1년에 두 차례씩 나는 강습을 통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경제가 안정되자 열심히 저축하여 당시 이리에서 제일 좋다는 양옥집을 구하여 봉불했다. 당시 이리교당은 교화가 번창하여 내왕하는 교도도 5백여명으로 불어났다.

해마다 백일기도를 결제하여 9년을 계속할 때 교도들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빠짐없이 참여하여 마음의 힘을 모으며 신심과 공부심도 커졌다. 그렇게 뭉쳐진 기운은 동이리ㆍ임피ㆍ강경ㆍ익산 교당을 창설했고 남중동 교당 설립기반을 다져주었다. 1971년(원기56) 5월 서울교당에 부임했다. 교화가 기반이 잡히자 연원교당 불리기에 주력했다. 1973년(원기58) 4월 구로교당을 시작으로 마포ㆍ성남ㆍ개봉ㆍ대방교당을 설립했으며 충주와 소록교당의 설립기반을 닦았다. 교당을 세울 때마다 교당 비품은 교도들이 서로 나누어 준비해 주기도 했다.

1977년(원기62) 5월 마산교구장으로 부임해서는 의창ㆍ신창원ㆍ동마산ㆍ산청을 창설하고 수양원도 마련했으며, 1986년(원기71) 2월부터는 대구교구장에 봉직했다. 교화개척과 전무출신 인재양성을 위해 온통 바친 생애였다. 1988년(원기73) 대봉도의 법훈을 서훈했고, 2010년(원기95) 3월 11일 열반했다. 1991년(원기76) 법위는 출가위로 승급했고, 법훈은 종사로 서훈되었다.(원불교대사전)

★★★★★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