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편(原理篇) 42장
정산종사법어(鼎山宗師法語)
제2부 법어(法語)
제5 원리편(原理篇) 42장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눈으로 보지 아니하여도 진리의 눈은 사람의 선악을 허공에 도장 찍나니 이 세상에 제일 무서운 것은 곧 진리니라. 인간 세상에서 지은 죄는 법망을 면할 수도 혹 있으나 진리의 보응은 무념 가운데 자연히 되는지라 속일 수도 피할 수도 없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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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眞理]
참된 이치. 참된 도리. 진리는 사실이 분명하게 맞아 떨어지는 명제, 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불변적인 사실 또는 참된 이치나 법칙을 뜻한다. 참, 진실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나 인정하고 보편적인 것이라 해도 그것이 항상 진리가 아닌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고대에는 사람들이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했고 바다 끝에 가면 떨어질 것으로 믿었다. 그 당시는 그것이 진리며 참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진리가 아니었다. 따라서 모두가 인정한다 해도 그것이 진리가 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더 정확한 뜻은 사람의 생각, 지식, 견해 등에 상관없이 언제나 변함없는 정확한 사실을 진리라 말할 수 있다.
진리에 대한 정의는 철학ㆍ논리학ㆍ수학에서 다양한 개념으로 쓰인다. 논리학에서는 명제가 사유법칙에 맞아서 오류가 없는 사고의 정당함을 일컫는다. 곧 명제가 사실에 정확하게 들어맞음, 또는 논리의 법칙에 모순되지 아니하는 바른 판단, 형식적 의미로 사유의 법칙에 맞는다는 의미에서의 사고의 정당함을 의미하며, 철학적으로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나 사실을 의미한다. 진리는 철학, 특히 서양철학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왔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 철학자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에서는 명확한 진리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특히, 데카르트는 분명하지 아니한 것들을 제거하여 가장 확실한 진리를 찾아 나서려고 했고, 결국 ‘사고하는 나’ 가 가장 확실하다고 하여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또한 니체는 그때까지 추구해 왔던 진리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내세우기도 했다. 불교에서 진리는 전통적인 불교 용어로 제(諦) 또는 성제(聖諦)라고 하는 데 진실한 도리(道理) 또는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事實)을 뜻하며, 보통 고제ㆍ집제ㆍ멸제ㆍ도제의 사성제(四聖諦)를 말한다. 원불교에서는 소태산대종사가 대각을 이루고 천명한 ‘생멸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이치’(《대종경》 서품1)를 근원적인 진리로 내세우며, 이를 ‘일원상의 진리’라고 이름하고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는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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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善惡]
[개요]
도덕실천상의 가치 개념으로 보통 ‘좋은 것’ ‘나쁜 것’이라는 의미, 또는 두 가지로 평가할 수 있는 대상은 사물이나 인간, 나아가 그 같은 의지(意), 행위(行), 제도(政) 등에까지 범위가 확대된다. 종교나 철학에서 대체로 선악을 판별한 수 있는 주체인 양심에 관해 선천적으로 주어진 신비로운 능력으로 생각했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양심의 소리라는 다이모니온(Daimonion)은 가치판단을 주관하는 어떤 영적 능력이 인간을 초월하여 실재한다는 생각을 나타내고 있다. 도덕성이 고양된 사람은 이 다이모니온의 음성과 가르침을 직접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맹자를 위시한 성선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그 근저에는 양심이 선천적 존재임을 긍정하고 있다.
[서양철학에서의 선악]
칸트는 “그것을 자주 생각하면 할수록, 오래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새로워지며 증대하는 감격과 경외심으로 마음을 채워주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속에 있는 도덕적 법칙이다”라고 했다. 이때의 도덕적 법칙을 양심의 작용으로 미루어 생각한다면 칸트에게 있어서 양심능력은 선천성을 지니는 것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다른 한편 양심에 관해 경험에서 얻어진 것이라는 관점도 있다. 양심이 작용되는 실례인 구체적 선악의 판단기준이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칼 융(C. G. Jung)은 선악의 가치관이란 대부분 사회집단의 가치관을 대변하는 것으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경우가 많다고 보았다. 이렇게 시대와 문화에 따라 서로 다를 수 있는 가치관을 도덕으로 보고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잠재해있는 근원적인 양심인 에토스와 구분한다.
[불교에서의 선악]
초기불교에서는 인간본성에 관한 명확한 규정은 피하는 편이다. 대신 무명과 애착에 따르는 고를 벗어나 지혜와 해탈을 내용으로 하는 열반의 상태를 추구하는 실천적 가르침에 역점이 두고 있다. 불교가 추구하는 깨달음은 선악을 초월한 체험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대승초기에서도 인간본성은 선악에 의한 규정보다는 선악을 벗어난 공(空)의 상태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열반경(涅槃經)》을 비롯하여 불성론을 견지하는 대승사상에서는 본래청정하고 순수지선(純粹至善)한 본성을, 지혜덕상이 갖추어져있는 본래의 불성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본래의 진여각성(眞如覺性)이 지닌 밝음, 또는 더러움이 없는 본래청정한 자성을 강조하는 혜능(慧能) 이후의 선불교의 입장은 본래 갖추어진 지선(至善)의 본성에 대한 확신에 바탕해 있다.
[유교에서의 선악]
《중용(中庸)》에서는 인성(人性)에 관해 천명(天命)으로 주어진 것이다(天命之謂性)라고 보았다. 《주역(周易)》에서는 음양의 조화에 따라 만물이 생성변화하는 것이 도(一陰一陽之謂道), 도가 작용하여 화육의 공을 나타내는 것이 선(繼之者善), 이 가운데 만물이 품부 받아 갖추고 있는 것이 성(成之者性)이라고 보았다(《주역》 계사상). 곧 선의 근원을 우주자연의 무궁한 생성작용에서 찾고 이를 계승하여 발현시키는 것이 선한 행위라고 생각했다. 유가에서 선악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학자로 맹자를 들 수 있다. 맹자는 “하고자 할 만한 것이 선이다(可欲之謂善)”라고 했다. 바람직한 의미에서 ‘할 만한 것’이 선이라고 하겠다.
곧 ‘순수 의욕’을 뜻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사람의 상정이다. 여기에는 마땅히 그러함(應當)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성리학적 관점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에서 성(性)은 이(理)로서 체(體)가 되고 심(心)으로부터 유출된 정(情)은 기(氣)로서 용(用)이 된다. 정은 악으로도 선으로도 표출될 수 있다. 사람의 본연의 성은 선하나 다만 기질의 청탁이 다르다는 것이다. 기질에 따라 성이 온전히 발현되면 선정이 되고 기질에 끌리면 악정이 된다. 이이(李珥)는 인성의 자연스러운 발현이 선이며 심중에서 비교 계산하여 사사로움에 기울어진 것이 악이라 했다.
곧 심이 본성대로 곧게 작용된 것이 선이며 심이 정에 끌리어 성이 곧게 작용되지 못한 것이 악이다. 이러한 선악은 현실로 드러날 때 중(中)과 과불급(過不及)으로 나타난다. 그는 “선과 악의 구별은 다만 중과 과불급에 있을 뿐이다. 조금이라도 중에서 벗어나면 모두 불선한 정이라고 한다”(《율곡전서》 권31). 희로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의 칠정이 발할 때 선은 중도에 맞는 것이며 악은 과불급한 것이다. “마땅히 기뻐할 것은 기뻐하고 마땅히 화낼 것은 화내는 것은 정의 선한 것이요, 마땅히 기뻐하지 않을 것을 기뻐하거나 마땅히 화내지 않을 것을 화내는 것은 정의 불선한 것이다”(《율곡전서》 권20).
[원불교에서의 선악]
원불교 사상에서 선악의 실마리는 마음에서 찾고 있다. “한 마음이 선하면 모든 선이 이에 따라 나타나고 한 마음이 악하면 모든 악이 이에 따라 일어나나니 그러므로 마음은 모든 선악의 근본이 된다”(《대종경》 요훈품3). 선악의 근원이 스스로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보는 점은 불교적 전통과 흐름을 같이 한다. 사람의 성품은 선악을 초월하나 마음의 발함에 따라 선악이 드러난다. “사람의 성품이 정(靜)하면 선도 없고 악도 없으나 동(動)하면 능히 선하고 능히 악하다”(《대종경》 성리품2)고 한다. 본래 선도 없고 악도 없다는 것은 지선(至善)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의 본성을 불성, 자성으로 부르는데서 알 수 있다.
다만 마음이 발할 때 여러 여건에 따라 상대적 선악으로 분화된다. “우리의 성품은 원래 청정하나 경계를 따라 그 성품에서 순하게 발하면 선이 되고 거슬려 발하면 악이 되나니 이것이 선악의 분기점이니라”(《정산종사법어》 원리편16). 여기에서 선악의 기준에 대한 실마리를 볼 수 있다. 순하게 발한다는 것은 중절(中節)로, 거슬려 발한다는 것은 부중절(不中節)로 표현된다. 마음의 중절한 발현은 기본적으로 자기실현의 삶을 지향한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으로 천지의 도를 주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책임과 권능을 지닌 존재이다. 따라서 삶을 완성해 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선이며 이에 어긋나는 삶을 악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다시 보은(報恩)의 삶과 배은(背恩)의 삶이라 보기도 한다.
(원불교대사전, 원불교100년기념성업회)
★★★★★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