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재(Aid Perfection) 2014. 12. 24. 13:40

대종경(大宗經)

제11 요훈품(要訓品) 10장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큰 도에 발원한 사람은 짧은 시일에 속히 이루기를 바라지 말라. 잦은 걸음으로는 먼 길을 걷지 못하고, 조급한 마음으로는 큰 도를 이루기 어렵나니, 저 큰 나무도 작은 싹이 썩지 않고 여러 해 큰 결과요, 불보살도 처음 발원을 퇴전(退轉)하지 않고 오래오래 공을 쌓은 결과이니라.]

★★★★★★★★★★

불보살[佛菩薩]

(佛 부처 불, 일어날 발, 도울 필, 菩 보살 보, 향초 이름 배, 薩 보살 살)

부처와 보살을 합쳐서 부르는 말. 부처 또는 보살과 같은 인격자를 부르는 말. 천여래 만보살과 비슷한 의미. 진리를 깨쳐 생사고락과 선악인과에 해탈을 얻어 자신을 제도하고, 나아가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성인을 통칭하는 말이다. 원불교에서는 일원의 위력을 얻고 일원의 체성에 합한 위대한 인격자, 곧 무등등한 대각도인과 무상행의 대봉공인을 의미한다. 소태산대종사는 “불보살들은 행ㆍ주ㆍ좌ㆍ와ㆍ어ㆍ묵ㆍ동ㆍ정간에 무애자재하는 도가 있으므로, 능히 정할 때에 정하고 동할 때에 동하며, 능히 클 때에 크고 작을 때에 작으며, 능히 밝을 때에 밝고 어두울 때에 어두우며, 살 때에 살고 죽을 때에 죽어서, 오직 모든 사물과 모든 처소에 조금도 법도에 어그러지는 바가 없나니라”(《대종경》 불지품4)라고 했다.(원불교대사전)

발원[發願]

(1) 어떠한 일을 바라고 원하는 생각을 내는 것.

(2) 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고자 다짐하는 맹세, 또는 부처나 보살에게 소원을 비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곧 중생을 제도하려는 부처나 보살의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기원하는 것. 제생의세ㆍ성불제중의 서원을 세우는 것. 수행에 용맹 정진해서 반드시 큰 깨달음을 얻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일원세계ㆍ극락세계를 건설하여 일체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서원을 일으키는 것.(원불교대사전)

★★★★★★★★★★

[잦은걸음으로 먼 길 가기 어렵다.]

<송경호 교무/순천교당>

짧은 시일에 속히 이루어지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거나 값어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만일 속히 이루어진 일이 좋은 일이거나 중요한 일, 값어치 있는 일이라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공이 들었거나 또는 미처 우리가 그 공든 과정을 인식하지 못한 일일 것이다.

집을 짓는데 있어서도 큰 집을 지으려면 큰 만큼 기초를 튼튼히 해야하고 오래오래 다져야 한다.

장거리 마라톤을 하는 사람이 출발선에서 부터 빨리 달려 결승선까지 좋은 성적으로 도착하는 경우는 아주 드문 일이다. 처음부터 힘을 안배해 서서히 속도를 가속하여 거의 마지막 지점에서 올려채는 방법을 사용한다.

대기만성이라는 말처럼 큰 도를 이루는 것도 처음 발원한 서원을 정성스럽게 잘 키워 끊임없이 공을 들이는 결과로 오는 것이다.

큰 공부에 발심한 사람은 그 발심을 이루는데 방해될까봐 작은 욕심도 내지 않고 공을 들일 뿐이지 결코 빨리 이루려하지는 않는 것이다. 큰 공부에 뜻하고 큰 일을 착수한 사람은 작은 일부터 천천히 공을 쌓기 시작한다 하셨다.

대산종사께서도 “황소와 같이 뚜벅 뚜벅 가거라 영생을 통하여 할 일이고 실천할 법이니 미흡함이 있더라도 너무 성급히 하려말고 여유있게 하라” 하셨다.

부처님도 오백생을 닦으셨다 한다. 하물며 우리 중생이 도를 이루려 발원을 하고 속히 이루려 하는 것은 무엇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이다.

“사람으로 말하더라도 공부를 하는 것이 한두시간 좌선하는 것으로 과연 참다운 수양이 될 것인가 좌선을 할 때도 일정한 생각으로, 염불을 할 때도 일정한 생각으로, 밥을 먹을 때도 …, 말을 할 때도, 일을 할 때도 오래오래 계속 하면 박넝쿨이 점점 자라서 커지는 것처럼 수양 하는 것도 망념을 멀리 하고 일심으로 하루 이틀 한해 두해를 점진적으로 오래 오래 계속하면 망념은 물러가고 일심이 되고 무궁한 조화가 생겨나는 것이니라”(정산종사 법설)

깊은 병을 치료하려는 사람이 좋은 약이 있고 의술이 뛰어난 의사를 만나 신통한 효과를 봤다 하더라도 하루에 몇번씩 치료를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루 이틀, 사흘, 꾸준히 참고 기다리며 정성을 다해야 병이 낫는 것처럼 우리가 도를 이루는 것도 조급한 마음으로 속히 이루려 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공기를 마시는 것처럼 끊임없이 계속할 따름이다.

★★★★★★★★★★

분별심[分別心]

(分 나눌 분, 푼 푼, 別 나눌 별, 다를 별, 心 마음 심)

나누고 구별하는 마음. 사량계교(思量計較)하고 분별시비하며 망상에 사로잡혀서 모든 현상을 나누고 구분하는 마음. 본성을 잃지 않는 본래심에 대비해 현상을 대하면서 일어나는 중생심을 말한다. 현실세계에서 현상을 파악하는 데에는 분별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우주의 본체와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고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분별심을 놓아야 한다. 선종의 육조 혜능은 만유제법(萬有諸法)은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므로 분별심이 아닌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야 만유의 본체를 여실히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번뇌 곧 보리이기 때문에 분별심을 떠나서 본래심을 따로 찾으려 하는 것도 큰 망상이다. 또, 깨달은 사람은 법도에 맞는 분별을 내어서 육근 동작이 보리가 되도록 해야 한다.(원불교대사전)

주착심[住着心]

(住 살 주, 着 붙을 착, 나타날 저, 心 마음 심)

어느 한 곳에 치우쳐 집착하는 마음. 또는 한 곳에 집착하고 고집하여 다른 것을 용납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마음을 말하기도 한다. 원불교에서 말하는 ‘주착심’은 두렷하고 고요한 마음에 이르지 못한 상태를 의미한다 하겠다. 《정전》 ‘정신수양의 요지’에서는 정신을 ‘두렷하고 고요하여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경지’라고 규정하며, 이러한 분별성과 주착심을 없이 하며 밖으로 산란한 경계에 끌리지 않음을 수양이라 말하고 있다.

정신수양의 목적을 “자기에게 있는 권리와 기능과 무력을 다하여 욕심만 채우려 하다가 결국은 가패신망도 하며, 번민망상과 분심초려로 자포자기의 염세증도 나며, 혹은 신경쇠약자도 되며, 혹은 실신자도 되며, 혹은 극도에 들어가 자살하는 사람까지도 있게 되나니, 그런 고로 천지만엽으로 벌여가는 이 욕심을 제거하고 온전한 정신을 얻어 자주력을 양성하기 위해 수양을 하자는 것이니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분별성과 주착심의 원인을 ‘욕심’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산종사는 주착을 ‘상(相)이 있는 마음’으로 말하는 데 ‘조견’을 ‘어느 상에도 주착함이 없이 원만 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직관함’으로 보고(《정산종사법어》 경의편43), “상(相)에 주착한 공덕은 오히려 죄해의 근원이 되기 쉽다”(《정산종사법어》 무본편34)라고 했다.(원불교대사전)

삼독심[三毒心]

(三 석 삼, 毒 독 독, 거북 대, 心 마음 심)

[개요]

탐욕심(貪欲心)ㆍ진에심(瞋恚心)ㆍ우치심(愚癡心)의 세 가지 번뇌. 줄여서 탐ㆍ진ㆍ치 삼독심이라고 한다. 이 삼독심은 모든 죄악의 근본이 된다.

[삼독심의 의미]

《대승의장(大乘義章)》에 “삼독이 모두 삼계의 온갖 번뇌를 포섭하고, 번뇌가 중생을 해치는 것이 마치 독사(毒蛇)나 독룡(毒龍)과 같다”고 했다. 탐ㆍ진ㆍ치 곧 욕심ㆍ성냄ㆍ어리석음의 삼독심은 수행인에게 가장 큰 장애이다. 탐심(貪心)은 탐욕(貪欲)ㆍ탐애(貪愛)ㆍ탐착(貪着)이라고도 하며 자기의 뜻에 맞는 일이나 물건을 애착하여 탐내고 만족할 줄을 모르는 것을 말한다. 곧 세간의 색(色), 재물들을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을 뜻한다. 진심(瞋心)은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경계에 대하여 미워하고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을 편안치 못하게 하는 심리작용, 또는 마음을 덮어서 선한 마음을 내지 못하게 하는 성내는 마음을 말한다. 치심(癡心)은 현상과 도리에 어두워서 사물의 진상이나 이치를 바르게 보고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마음을 말한다.

[원불교에서 의미]

① 탐ㆍ진ㆍ치를 끊지 않고서는 죄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죄업의 근본은 탐ㆍ진ㆍ치라 아무리 참회를 한다 할지라도 후일에 또다시 악을 범하고 보면 죄도 또한 멸할 날이 없으며, 또는 악도에 떨어질 중죄를 지은 사람이 일시적 참회로써 약간의 복을 짓는다 할지라도 원래의 탐ㆍ진ㆍ치를 그대로 두고 보면 복은 복대로 받고 죄는 죄대로 남아 있게 되나니’(《정전》 참회문)라고 한다.

② 삼십계문에서 탐ㆍ진ㆍ치 삼독심을 끊는 공부가 법강항마위에 오르는 관문이 된다.

③ 생사 해탈과 영혼 천도에 있어서도 넘어서야 할 과제가 된다.

“탐ㆍ진ㆍ치에 끌린 영(靈)은 죽어갈 때에 착심(着心)에 묶인 바 되어 거래에 자유가 없고, 무명의 업력에 가리 워서 착심 있는 곳만 밝으므로 그곳으로 끌려가게 되며, 몸을 받을 때에도 보는 바가 모두 전도(顚倒)되어, 축생과 곤충 등이 아름답게도 보여서 색정(色情)으로 탁태(托胎)하되 꿈꾸는 것과 같이 저도 모르게 입태(入胎)하며, 인도 수생(受生)의 부모를 정할 때에도 색정으로 상대하여 탁태하게 되며, 혹 무슨 결정보(決定報)의 원을 세웠으나 사람 몸을 받지 못할 때에는 축생이나 곤충계에서 그 비슷한 보를 받게도 되어, 이와 같이 생사에 자유가 없고 육도 윤회에 쉴 날이 없이 무수한 고를 받으며, 십이인연에 끌려 다니나니라.

그러나 탐ㆍ진ㆍ치를 조복(調伏)받은 영은 죽어갈 때에 이 착심에 묶인 바가 없으므로 그 거래가 자유로우며,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여 정당한 곳과 부정당한 곳을 구분해서 업에 끌리지 않으며, 몸을 받을 때에도 태연자약하여 정당하게 몸을 받고, 태중(胎中)에 들어갈 때에도 그 부모를 은의(恩義)로 상대하여 탁태되며, 원을 세운대로 대소사 간에 결정보를 받게 되어, 오직 생사에 자유하고 육도 윤회에 끌리는 바가 없이 십이인연을 임의로 궁글리고 다니나니라”(《대종경》 천도품36). 이처럼 삼독심은 자유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수행자에게 결정적인 장애가 되는 어두운 마음이다.(원불교대사전)

★★★★★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