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교리공부(敎理工夫)

영육쌍전 이사병행의 정신

원재(Aid Perfection) 2014. 8. 11. 16:20

영육쌍전 이사병행의 정신

 

[9호] 1969년 10월 01일 (수) 박영식 webmaster@wonnews.co.kr

 

대종사님께서 큰 진리를 깨치신 후 일원종지와 삼학팔조 사은사요의 교리를 높이 천명하셨습니다.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정신개벽이 더욱 시급함을 느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회상 창립당시에 대종사님께서는 구인선사들과 함께 전남 영광군 백수면 길용리 해안에 간척공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이 공사로 말하면 교단건설을 위한 경제적 기초를 세우시려는 목적도 갖으셨습니다마는 그 내면에 있어서는 보다 더 깊은 뜻이 있으셨습니다. 당시에 대종사께서 가지고 계신바 포부를 말하자면 첫째로는 제자들의 신심 정도를 알려고 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에 이해 없는 이웃 사람들의 비방과 조소 가운데에서 영겁을 두고 내려온 바다 벌판을 막아서 논을 만들기로 할 때에 일찍이 이러한 경험 없는 제자들로 하여금 믿기 어려운 그 일을 믿도록 하실 때에 있어서 여러 가지 기적이 있었습니다.

 

시방삼계와 육도사생의 전체 생명을 나의 생명으로 알고 전체 행복을 나의 행복으로 아는 사무여한의 혈인서천이 있으셨습니다. 여기에 있어서 제자들의 참된 신심의 유무를 가히 알 수 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음은 사업의 역량을 알으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방언공사의 한 가지 일을 가지고 그 시종과 역량을 시험하는데 있어서 장차 일어나는 모든 사업을 발전 성취시키려고 할 때에 이 공사 하나로써 그 시종의 역량이 있는가 없는가를 알 수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셋째로는 복록의 유래를 알려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근검절약과 근로 작업으로써 이소성대와 자급자족하는 방법을 일러주시고 그에 따라 나타나는 결과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곧 잘 지으면 잘 받고, 못 지으면 못 받으며, 제가 지어서 제가 받는 이치를 알아 하셨으니 또한 복록이 어디로부터 오는가를 알려주시기 때문이었습니다.

 

넷째는 영육쌍전의 표본을 보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회상 건설에 있어서 먼저 경제토대부터 세운다는 것을 보여 주시고 앞으로는 수도인들이 직업 없이 놀고먹는 폐풍을 없게 하고 수행과 생활이 같이 아울러 나아가게 해야 할 것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사람의 생활상에는 먼저 의식주 세 가지가 문제입니다. 현금 사회의 경제문제도 일반이 아는 바와 같이 긴요한 일입니다. 서양말에도 「나에게 빵을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고 한 것처럼 의식주는 긴요합니다. 또한 의식주 보다 더 즐거움은 없다 하겠으니 이것은 일반 대중이 다같이 느끼는 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래로 성현은 그 대도를 즐거워함에 있어서 범부중생의 의식주 생각하는 것보다 이상 더 도를 즐거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자는 慕道要(모도요) 不慕食(불모식)이라고 말씀을 했으니 대인군자들은 의식주 기타 물질적인 것보다는 차라리 정신적인 문제에 중점을 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은 그와 같은 사상은 낡은 사상이라고 저버릴른지 모르지마는 물질만을 편중하고 금전만능으로 간다면 사회 국가는 다스려 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생은 행복 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정신 물질 어느 것에도 편벽 되어서는 아니 되지마는 마음이라 도라 하는 것을 토대로 삼고 그 위에다 물질적 경제시설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여기에 있어서 대종사께서 말씀하신 영육쌍전의 표어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는 바입니다.

다음에는 공부에 관하여 말씀을 드려 볼까 합니다.

일원은 법신불입니다.

일원은 대종사께서 설하신 바이요, 생각하신 바요, 깨치신 바이요, 가르치신 바로서 별로 연원을 운위(云謂)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깨치신 바로서 그 깨치신 바를 교화하신 것입니다. 그 법 짜놓으신 바가 유무식이 한 가지로 이 법을 배우게 되어있고, 남녀노소가 다 같이 이 법을 알게 되어 있고, 선악귀천이 널리 제도를 받게 되어 있고, 재가출가가 아울러 다 같이 수행을 얻게 됨에 있어서 처서에도 구애됨이 없고 시간에도 구애됨이 없이 이 법으로써 수신도 하고, 이 법으로써 재가도 하고, 이 법으로써 국가도 다스리고, 이 법으로써 세계도 운전하여 중생을 제도하고 세상을 치료하는 천만작용이 오직 이 법 하나의 운용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대종사께서 말씀하신 바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써 물질을 사용하는 정신의 세력을 확장하여 가지고 날로 성하는 물질의 세력을 항복 받아서 파란고해에서 노예 생활하는 일체생령으로 하여금 광대무량한 낙원에 인도하려함이 창업의 동기인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재생의세의 이 사업은 세상의 모든 사업주에서 그 범위가 가장 광대하고 그 기한이 가장 장구함으로 거기에는 수많은 동지가 모여야 하는 것이며 대대로 성자가 이어 나와서 교화가 쉬지 아니하여야 될 것입니다. 이러한 중대한 시기에 회유하신 대종사께서 전무후무한 이 교법을 드러내시어 우리 대중에게 각자의 정신개벽과 쉬지 않는 교화로써 마음중생의 제도와 마음 세계의 치료에 끊임없는 정진의 기회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일심정력으로 국가와 세계에 널리 호소하여 우리가 다 같이 바라는 대자유세계 대평화세계 대문명세계를 건설하기 위하여 영육이 쌍전하고 이사가 병행하는 일대낙원에서 모든 동포와 함께 일심합력으로 다 같이 즐기는 시대가 하루 속히 이루어지기를 빌어 마지않는 바입니다. <순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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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理事)

⑴ 이(理)는 천조의 대소유무 곧, 우주 대자연의 모든 이치. 사(事)는 인생의 시비이해, 곧 인생의 모든 일. ⑵ 이(理)는 진리의 이체(理體), 곧 도리(道理). 사(事)는 진리의 용(用), 곧 사상(事相). ⑶ 이(理)는 진제(眞諦), 사(事)는 속제(俗諦).

 

이사병행 (理事竝行)

대소유무의 이치를 바르게 깨치고, 시비이해의 일을 정당하게 건설하여, 개인적으로는 이상적 인격을 이루는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이상세계를 건설하자는 뜻의 교리표어. 이 표어는 〈원불교 교전〉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처처불상 사사불공, 무시선 무처선, 동정일여 영육쌍전, 불법시생활 생활시불법 등의 교리표어의 뜻을 종합해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이사병행의 표어는 교단 초기부터 많이 사용되어 왔고, 교단 전반에 걸쳐 크게 강조되고 있다. 이사병행의 정신은 원불교 창립 당시의 종교현상이나, 인간의 가치관, 사회의식 등의 약점이나 모순점을 개선 보완하려는 데서부터 출발한 것이다.

 

⑴ 대소유무의 이치를 바르게 깨친다는 것은 정각(正覺)을 의미하고, 시비이해의 일을 정당하게 건설한다는 것은 정행(正行)을 의미한다. 정각 없는 정행은 있을 수 없고 정행 없는 정각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므로 정각 정행, 곧 이사병행의 도인이라야 참 도인이요 훌륭한 인격자인 것이다. 정각이나 정행, 어느 한 쪽에만 치우치면 절름발이 도인일 뿐이다. 이사병행의 수행을 정성껏 계속하면 누구나 궁극적으로 이무애 사무애의 큰 힘을 얻게 된다. 대소유무의 이치에 대해 조금도 막히고 걸림이 없는 것이 이무애요, 시비이해의 일에 대해 조금도 걸리고 막힘이 없는 것이 사무애이다. 이무애 사무애의 경지를 얻으면 마음에 아무런 두려움도 불안도 없다.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에 끌리지 않아 동정간에 언제나 마음이 편안하다. 그래서 일상삼매 일행삼매 동정 일여의 경지가 전개된다. 천지의 주인이 되어 하늘 이치 하늘 권세를 마음대로 부려쓰고, 활살자재 대기대용 신통묘용의 큰 힘을 얻는다. 현실세계의 가장 절실한 현장에서 중생제도 하기에 바쁘다.

 

⑵ 이사병행은 공부와 사업을 병행한다는 뜻이다. 공부는 지혜를 밝히는 것이요, 사업은 복덕을 쌓는 것이다. 그래서 복혜쌍수의 뜻이 된다. 참 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공부와 사업의 어느 한 쪽에 치우쳐서는 안된다. 공부와 사업을 병행해야 하는 것이다. 공부만 하고 사업을 하지 않으면, 지혜는 밝아지나 복이 부족해서 가난을 면하기 어렵다. 이와 반대로 사업만 하고 공부를 하지 않으면, 복은 많아도 지혜는 어두워지기 쉽다. 그래서 수행인은 복혜를 쌍수하는 것이다. 과거 불교의 경우에 이판승(理判僧)·사판승(事判僧)의 문제가 끊임없는 쟁점이 되어왔다. 이판승의 경우에는 대소유무의 이치를 깨치는 공부에 주력하고 시비이해의 일을 건설하는 사업에는 등한히 해온 경향이 있다. 사판승은 이와 반대로 현실의 일에만 급급하고 영생의 이치를 깨치려는 마음공부에는 소홀히 해온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판과 사판은 서로 갈등과 대립을 되풀이 해온 것이다. 이판과 사판은 서로 갈등과 대립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의 관계이다. 이판과 사판을 사람으로 구별하는 한 대립과 갈등은 해결되기 어렵다. 그래서 이사병행의 수행을 병행해야만 참 도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원불교에서 공부와 사업을 병행하기를 권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누구나 공부에 힘쓰면 지혜가 밝아지고, 사업에 힘쓰면 복덕을 쌓게 되어 복족족 혜족족, 곧 복혜쌍족·복혜증진하게 되는 것이다. 공부는 성불이고 제생이며, 사업은 제중이고 의세이다. 이사병행의 수행이라야 성불제중하고 제생의세할 수 있는 것이다.

 

⑶ 이사병행은 도학과 과학을 아울러 배우는 것이다. 도학 공부에 힘써서 도덕박사가 되고, 과학 공부에 힘써서 과학을 발전시켜야 이상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것이다. 도학 공부는 정신개벽의 길이요, 과학 공부는 물질개벽의 길이다. 정신개벽과 물질개벽이 아울러서 이루어져야 마음낙원과 현실낙원의 이상적 낙원세계가 건설되는 것이다. ⑷ 이사병행은 수양·연구·취사의 삼대력 증진과 의·식·주생활의 풍요를 함께 추구하는 것이다. 아무리 삼대력을 얻었다 할지라도 의·식·주의 해결 없이는 행복한 삶이 되기 어려운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의·식·주의 생활이 풍요하다 할지라도 삼대력을 얻지 못하면 가치 있는 삶이 되기 어려운 것이다.

 

⑸ 이사병행은 이론과 실천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실천이 없는 이론은 공리 공론에 떨어지기 쉽고, 이론 없는 실천은 방향 감각을 상실하기 쉽다. 이론과 실천의 일치라야 가치 있는 이론, 정당한 실천이 되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는 언행일치·지행일치·신행일치·각행일치·원행일치의 뜻이 된다. 이와 같이 이사병행의 수행은 참도인을 만들고, 이상세계를 건설하는 길이 된다. 이사병행의 수행자라야 사회의 참다운 지도자가 될 수 있고, 이사병행의 종교라야 사회발전에 공헌하는 미래지향적 종교가 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