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품(實示品) 45장
대종경(大宗經)
제12 실시품(實示品) 45장
안 도산(安島山)이 찾아온지라, 대종사 친히 영접하사 민족을 위한 그의 수고를 위로하시니, 도산이 말하기를 [나의 일은 판국이 좁고 솜씨가 또한 충분하지 못하여, 민족에게 큰 이익은 주지 못하고 도리어 나로 인하여 관헌들의 압박을 받는 동지까지 적지 아니하온데, 선생께서는 그 일의 판국이 넓고 운용하시는 방편이 능란하시어, 안으로 동포 대중에게 공헌함은 많으시면서도, 직접으로 큰 구속과 압박은 받지 아니하시니 선생의 역량은 참으로 장하옵니다.]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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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산[安島山]
[주요약력]
이름은 창호(昌浩), 도산(島山)은 호이다.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로 독립협회(獨立協會)ㆍ신민회(新民會)ㆍ흥사단(興士團) 등에서 활발하게 독립운동활동을 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생애 및 활동]
안도산은 평남 강서에서 흥국(興國)의 3째 아들로 태어났다. 8세까지 가정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9세에서 14세까지 김현진(金鉉鎭)에게 한학을 배웠다. 이때 서당 선배인 필대은(畢大殷)과 교류하면서 민족주의사상을 형성했다. 1895년 청일전쟁을 목격하면서 국력배양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상경하여 구세학당에 입학했다. 1897년에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필대은과 함께 평양의 관서지부조직을 맡았다. 평양지회 결성식이 열린 평양의 쾌재정(快哉亭)에서 18조목의 쾌재(快哉)와 18조목의 부재(不哉)를 들어 정부와 관리를 비판하고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연설을 함으로써 대중의 명성을 얻었다.
1899년에 고향 강서에 우리나라 최초로 남녀 공학의 점진학교를 세웠고, 황무지 개척사업을 전개했다. 1900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대한인공립협회(大韓人共立協會)를 설립했다. 여기에서 야학을 개설, 회원들을 교육시키고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행하여 교포들의 생활향상 및 의식계몽에 힘썼다. 1905년 11월의 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1906년에 귀국하여 이갑ㆍ양기탁ㆍ신채호 등과 함께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07년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고 평양과 대구에 출판기관인 태극회관(太極會館)을 건립했으며, 평양에 도자기회사를 설립했다. 1910년에 신민회 간부들과 함께 개성 헌병대에서 3개월간 곤욕을 치르고 ‘거국가(去國歌)’를 남긴 채 위해 북경ㆍ청도ㆍ상해 등지로 망명을 떠났다. 1911년에는 시베리아ㆍ독일ㆍ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1913년에는 미국 로스앤젤리스에서 ‘흥사단’을 결성하여 활약했고, 1919년 3ㆍ1운동 후 상해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직을 맡아 독립운동방략 작성, 연통제(聯通制) 수립, 각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상해 소집 등을 실행했다.
1932년 상해에서 윤봉길 의사의 폭탄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에 소환, 약 3년간 대전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1937년 6월,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흥사단 동지들과 함께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해 12월에 병보석되었으나, 이듬해 3월 휴양 중 사망했다. 안도산의 유해는 로스앤젤리스에 있던 부인 이혜련(李惠鍊)의 유해와 함께 서울 도산공원으로 이장, 안장되었다. 1962년 3월 정부에서는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중장(重章)을 추서 했다.
[안도산과 원불교의 인연]
1935년 2월, 대전 감옥에서 출옥 후 전국을 순회 중에 중앙총부를 방문하여 소태산대종사와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소태산은 안도산을 친히 영접하면서 그의 민족을 위한 헌신 봉공을 높이 평가했다. 소태산과 안도산은 조국의 독립운동 방법에 있어서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는 것에서 공통점이 있다.
안도산의 점진주의(漸進主義)는 급속하고 과격한 수단과 방법을 피하고 순서에 따라 서서히 발전하려는 사상으로 소태산의 이소성대(以小成大)의 정신과 맥을 같이한다. 안도산의 기본사상은 《민족개조론》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무실역행(務實力行)을 주장하는 그의 흥사단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계승되고 있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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