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재(Aid Perfection) 2014. 12. 26. 21:50

대종경(大宗經)

12 실시품(實示品) 33

이 동안이 열반하매 대종사 한참동안 묵념하신 후 눈물을 흘리시는 지라 제자들이 [너무 상심하지 마옵소서.] 하니,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마음까지 상하기야 하리요마는 내 이 사람과 갈리면서 눈물을 아니 흘릴 수 없도다. 이 사람은 초창 당시에 나의 뜻을 전적으로 받들어 신앙 줄을 바로 잡았으며, 그 후 모든 공사를 할 때에도 직위에 조금도 계교가 없었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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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안[李東安]

[주요약력]

본명은 형천(亨天). 법호는 도산(道山). 법훈은 대봉도. 18921222일에 전남 영광군 묘량면 신천리에서 부친 경현(景玄)과 모친 김남일화(金南日華)52녀 중 2남으로 출생. 1923(원기8) 101일 출가. 불법연구회 농업상조산업부장보화당(대표이사)수위단원 역임, 법랍 18.

[생애 및 활동]

이동안은 어려서부터 한문사숙에 입학하여 수학했으며 천성이 인자하고 세밀하여 타인의 세정을 잘 알아주었고 감화력과 포용력이 풍부했다. 누구보다도 사업역량이 뛰어났던 이동안은 농촌운동가로서 향리인 신흥마을에 야학을 실시하여 문맹퇴치에 힘썼다. 26세되던 1917(원기2)에 이동안은 8촌 형인 이재철(一山李載喆)의 인도로 영산에서 소태산대종사를 만나 사은에 관한 법설을 듣고 출가 수행할 뜻을 세웠다. 이동안은 1920(원기5) 3월에 소태산의 지시에 따라 신천리에 묘량 수신조합(守信組合)을 설립하고 신흥마을의 경제적 자립을 세우게 했다.

그리고 1923(원기8) 10월에 전무출신을 단행했다. 당시 교단은 생활대책이 없어 엿장사를 하게 되었다. 처음 당하는 일이라 부끄러운 생각이 나서 동리 아이들에게 먼저 엿을 몇 개 주고 엿 사시오를 대신 부르게 한 뒤 엿을 팔았던 일은 후일 감동 깊은 일화로 남아 있다. 그리고 서중안이 경영하는 김제의 한약방에서 한약방 운영의 실무를 익히기도 했다. 1927(원기12)에는 신천리 수신조합을 해체하여 총부재단에 편입시키고 총부건설에 온 힘을 다했다. 이동안은 1928(원기13)에 총부 서무부장으로 시작하여 농업부장상조부장육영부장보화당(대표이사)산업부장의 중책을 역임하면서 교단창립 과정에 있어서 사업계의 큰 공적을 남겼다.

1934(원기19) 8월에 창설된 보화당 한약방은 이동안의 노력이 절대적인 역할이 되었다. 보화당은 소자본으로 경영하게 되어 미미한 기업체였으나 나날이 발전하여 많은 이익을 내어 익산 군내에서 건재 약국으로는 단연 왕좌를 차지했다. 1937(원기22) 81일자 조선일보는 논평하기를 보화당에서는 1년 이상이 지난 일체의 약재를 버리고 항상 신선한 재료를 사용하여 치료에 백발백중할 뿐만 아니라 일반 빈민에게는 무료시술을 하기 때문에 발전하며 이는 45세된 이동안 대표(주무)의 공익을 위한 희생적 분투와 지덕이 겸비한 노력의 대가(代價)’라고 했다.

이동안은 빈약한 자본을 가지고도 근검절약과 용의주도한 경영으로 하는 일마다 번창했다. 1930(원기25)에는 산업부장으로 있으면서 삼례에 7만여 평의 기지를 확보하고 삼례과원(현 수계농원)을 만들었다. 산업부장으로 재직 시 일하러 온 인부들에게 그냥 일만 시키지 않았다. 그들의 근기에 맞게 법문을 쉽고 적절하게 이야기해주어 일하는 데 재미를 붙이게 했다. 사업상의 외교를 할 때에는 상대방을 오직 성실과 덕으로 감화시켰다. 근심과 괴로움을 가진 후진을 보면 새 힘과 용기가 나도록 격려했으며, 아랫사람을 적재적소에 잘 활용하여 쓸 줄 알았다.

원불교가 수도하면서 일하는 교단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이동안과 같은 헌신적 봉공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동안은 1926(원기11) 35세시 박세철의 열반으로 인하여 정수위단원에 보선되었다. 평소 염불과 사색을 즐기며 대학(大學)반야심경(般若心經)을 애송했다. 이동안은 권위의식이나 상하의 차별이 없이 누구를 대해도 그 사람의 성격과 특기를 알아서 기국을 터서 열어주고 특성을 살려주었다. 그러므로 어떠한 어려운 사업도 능히 이루어졌고 모든 사람의 답답함을 풀어주는 포근한 자비의 화신이었다.

자비지혜용단지조가 겸비했던 이동안은 대하는 사람마다 감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전무출신의 가정이 잘 되어야 공사에 지장이 없을 것이라 하여 틈틈이 전무출신 사가를 보살펴 주었고 상담자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교단의 일은 막중하고 아직 앞길이 창창한 49세에 감기처럼 시작한 이동안의 병세는 깊어져 위독해졌다. 양방으로 치료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약의 효험을 보지 못하고 1941(원기26) 58일에 열반에 들었다. 그 유가족과 동지들의 통곡은 그칠 줄을 몰랐다.

이동안이 열반하매 대종사 한참동안 묵념하신 후 눈물을 흘리시는 지라 제자들이 너무 상심하지 마옵소서하니,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마음까지 상하기야 하리요마는 내 이 사람과 갈리면서 눈물을 아니 흘릴 수 없도다. 이 사람은 초창 당시에 나의 뜻을 전적으로 받들어 신앙 줄을 바로 잡았으며, 그 후 모든 공사를 할 때에도 직위에 조금도 계교가 없었나니라’”(대종경실시품33) 했다. 이처럼 이동안은 소태산의 사랑과 신임을 한 몸에 받은 인물이다.

소태산의 법문처럼 직위에 끌리는 일이 없어, 총부의 부장이나 지부의 부장이나 보화당이나 산업부의 일이나 기타 무엇이든지 시키는 대로 복종했으며, 시골이나 도회지나 지방의 좋고 나쁜 곳도 택하는 일이 없는 모범적인 전무출신이었다. 이동안은 당시의 여러 선진들처럼 문필을 통한 작품을 남긴 것도 별로 없고 각 교당을 순회하며 설교 강연을 많이 하지도 않았다. 오직 교단의 두 방향인 공부와 사업 중 사업발전에 일생을 바쳤으나 자신의 수행에도 철저했다.

이동안은 교단 초창기에 입참하여 견실한 신심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빛나는 업적을 쌓았다. 후일 친자녀인 정만, 광오, 성신, 철행이 전무출신했으며, 신천리 함평이씨 가운데 수십 명이 출가하여 교단 초석이 되는 바탕을 만들었다. 1964(원기49) 10월 제9회 수위단회에서는 이동안의 높은 공덕을 추모하면서 대봉도의 법훈을 추서키로 결의했다.(원불교대사전)

신앙[信仰]

[개요]

종교생활의 기본적인 태도. 궁극적 진리, 부처님, 하나님 같은 성스러운 절대자를 믿고 절대 복종하는 것. 일반적으로 종교적 절대자를 믿고 앙모(仰慕)하여 의지하려는 엄숙하고 경건한 태도를 말하고, 엄밀하게는 그 태도가 개인의 인격적인 신뢰에까지 이르렀을 경우를 말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 내지는 하느님의 섭리(攝理)에 대한 인간의 순종(신뢰)이라는 인격적 관계를 의미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신(神佛)과 같은 성스러운 존재에 대한 신뢰와 무조건 복종을 말하며, 불확실한 것을 주관적으로 확실하다고 믿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신앙에는 그리스도교와 같이 타력적인 구제를 구하는 형과 불교 특히 선종과 같이 자력적인 깨우침을 열려는 형, 신도(神道)와 같이 자연과의 관련을 강조하는 형이 있어 어느 것이나 지()()()의 세 가지 작용을 가진 태도이기 때문에 철학적으로 슐라이어마허가 감정과 동일시한다거나 칸트가 도덕과 동일시하고 이신론자(理神論者)가 철학과 동일시한 것은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신앙은 인간이 종교적 이상에 자기를 완전히 바치는 실천적인 태도를 말한다.

사람은 종교적 체험이나 의례(儀禮)를 되풀이함으로써 인격의 내부에 차츰 일정한 신앙적 자세가 형성되어 가는 것을 뚜렷이 자각하게 된다. 이 심적인 태도가 바로 신앙이라는 것인데, 신앙은 개인생활을 통일하는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편, 신앙의 표현인 신조조직제도를 가진 공동체의 생활을 통일하는 중심이 되기도 한다.

[신념과의 구별]

인간은 지성(知性)을 통해 직접적인 경험이나 타인의 경험에 의해 얻어진 지식의 범위 안에서 사물을 생각하고 행동을 결정한다. 지식은 학문적 연구에 따라 무한히 변하면서 진보하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생각할 때 지식의 확실성은 항상 불완전하다. 그러나 불확실하고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지식이라도, 하나의 가설로 인정되거나 주관적으로 완전하다고 긍정되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전적으로 지적인 근거에만 의거하여 생각이나 행동을 결정하는 심적 태도가 신념이라는 것이다.

한편 신앙은 정의(情意)의 면까지를 기능적으로 통일하면서 실존적 상황에서 생사를 걸고 초월적 존재와 전인격적 관계를 갖는다. 따라서 신념은 합리적 경험의 범주에 그치는 사고형식을 갖는데 비해, 신앙은 지의의 경험 전체에 관련될 뿐 아니라 경험을 초월한 영역에까지도 관련되기 때문에, 기성의 사고형식을 넘어선 새로운 것을 낳을 가능성을 내포한다. 과학이 진보하면 신앙은 불필요해진다는 사고방식은 신앙과 신념을 혼동한 데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앙의 변화]

신앙의 대상과 신앙하는 사람의 심적 태도 곧 신앙의 형태는 사회나 문화의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다르게 나타난다. 인간형성의 과정에 있어서도 유년기에서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신앙은 변화한다. 특히 청년기에는 종교문제에 관심이 많아지기 때문에 입신(入信)이나 개종(改宗)이라는 회심(回心)현상이 많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은 점차 깊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의 신앙이 지향하는 가치에 따라 신앙의 여러 형태로 구별되기도 하는데, 이상적인 종교적 인격을 갖춘 가치를 성자성(聖者性) 또는 성숙한 생산적 종교 정조(情操)라고 말한다.

[원불교의 신앙]

정전개교의 동기에서는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 정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물질의 세력을 항복받아 파란고해의 일체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려 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진리적 종교의 신앙이란 신앙의 대상이 진리적이어야 하며, 신앙의 방법이 사실적이어야 한다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소태산대종사는 금강산을 유람하던 중 만난 그리스도교 신자의 독실한 신앙심을 확인하고 제자들에게 그 사람은 아직 타력신앙에 그치어 진리의 근본을 다 더위잡지 못했으나 그러한 생활을 하게 되었거든 하물며 자력신과 타력신을 병진하는 그대들로서 만일 파란곡절에 조금이라도 마음이 흘러간다면 그 어찌 바른 신앙이며 참다운 정신이라 하겠는가”(대종경신성품12)라고 하여 자타력병진신앙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일찍이 소태산이 구도와 대각 과정을 말하면서 자력으로 구하는 중 사은의 도움”(원불교교사1편 제3)이라고 한 것과 같은 의미라 할 수 있다.(원불교대사전)

계교[計較]

비교하여 서로 대어봄. 요리조리 생각하여 낸 꾀, 계교(計巧). 사물이나 사람에 대해 의심하고 저울질하여 비교하는 것. 경계를 당하여 욕심에 끌려서 이익과 손해, 좋고 나쁠 것을 따져보는 것.(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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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육쌍전 실천의 화신불]

<이도전 교무/상임 논설위원>

새 회상 창업기에 보화당 등을 설립하여 교단 경제의 기반을 튼튼히 한 교단 사업계의 주역. 고매한 인품과 신성을 겸전하여 영육쌍전의 모범을 보인 도산 이동안(道山 李東安,1892~1941) 대봉도.

그는 영광군 묘량면 신천리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함평이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인자하고 세밀하며 세정을 잘 알아주는 포용력이 있었다. 원불교와의 인연은 일산 이재철 대봉도의 인도로 원기3년 대종사를 친견하고 사은 법문을 받들고 환희심을 냈다. 이후 대종사의 지도로 원기5'묘량수신조합'을 설립해 신흥 마을의 경제적 자립을 세우는 역할을 했다. 초기에는 영광의 저축조합을 본받아 소비절약과 근검저축으로 생활개선과 자립운동으로 시작했다. 자금이 확보되자 저리융자, 농사방법개량, 황무지 개간, 신정예법을 통한 생활개선과 도덕운동을 펼쳤다. 또한 조합 회실을 이용해 야학을 실시해 배움의 기회를 넓혀갔다.

원기 8년에 출가를 단행했다. 당시 가정은 5남매를 두고 상처를 해 출가가 어려웠으나 아우에게 식구들을 부탁하고 전무출신의 길을 택했다. 출가한 해 구간도실이 좁고 습해서 영산원을 신축하는 일을 도왔다. 대종사는 불법연구회 창립을 준비 중이었다. 원기 961일 익산소재 보광사에서 열린 창립총회에 영광지역 대표로 참여했다.

이후 대종사의 명에 따라 김제에서 추산 서중안 대호법이 경영하는 인화당 한약방 실무를 보는 한편 익산 송학동에 소재한 동양척식회사의 임대전답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원기104월에 정수위단 1차 보결 및 대리단원을 조직할 때 손방단원에 임명됐다. 또한 육영부 창립 발기인이 되어 인재양성을 위한 육영부 창립자금 확립운동을 전개했다.

원기12년에 서무부장, 상조부장에 이어 원기15년부터는 영산지부장을 겸임했고, 원기17년부터는 농업상조사업장으로 일했다. 원기19년엔 공익육영장으로 인재양성에 참여했다. 원기20년에 이리보화당한약방을 설립해 전무이사로 봉직하며 교단경제의 토대를 세웠다. 원기25년부터 열반 전까지 산업부장을 역임했다. 이때 수농, 전작, 축산 등 3부를 두어 양돈, 양계를 장려하고 수계농원의 근간인 삼례과원을 만들었다. 한때 모든 부원이 장티푸스에 걸렸다. 그의 병세는 더 심해서 위독할 정도였다. 대종사는 매일 산업부에 들러서 "우리 동안이를 살려줄 의사만 있다면 불법연구회 절반을 주겠다"할 정도로 지극히 아끼는 제자였다.

이처럼 사업계에서 주로 봉직하며 실천한 사업정신과 인간상은 후진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첫째는 신의를 소중히 여겼다. 둘째는 공중사를 중히 여기고 박리다매(薄利多賣)의 원칙을 지켰다. 셋째는 사업을 하면서도 교화와 교육을 위한 일환으로 영육쌍전의 정신을 실행했다. 이러한 실천아래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 이소성대(以小成大)는 천리의 원칙이란 표준으로 공부와 사업을 했다.

그가 열반하자 산업부원들은 인자한 인격, 철저한 신앙, 지극한 공심을 가진 인화의 주인공으로 새겼다. 원기26년 교단의 중진으로 한참 일할 나이에 49세를 일기로 열반에 들자 대종사께서는 눈물을 흘리며 "초창 당시 나의 뜻을 따라 신앙 줄을 바로 잡았으며, 모든 공사를 할 때 직위에 조금도 계교가 없었다"며 애통해했다.

★★★★★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