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품(實示品) 25장
대종경(大宗經)
제12 실시품(實示品) 25장
양 하운(梁夏雲) 사모께서는 대종사께서 회상을 창립하시기까지 대종사의 사가 일을 전담하사 갖은 수고를 다 하셨으며, 회상 창립 후에도 논과 밭으로 다니시면서 갖은 고역을 다 하시는지라, 일반 교도가 이를 죄송히 생각하여 거교적으로 성금을 모아 그 고역을 면하시도록 하자는 의논이 도는지라, 대종사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 말도 예에는 그럴 듯하나 중지하라. 이만한 큰 회상을 창립하는데 그 사람도 직접 나서서 창립의 큰 인물은 못 될지언정 도리어 대중의 도움을 받아서야 되겠는가. 자력이 없어서 할 수 없는 처지라면 모르거니와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있다면 그것이 떳떳하고 행복한 생활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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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하운[梁夏雲]
[주요약력]
본명 미상. 법호는 십타원(十陀圓). 법훈은 대호법. 1890년 음력 12월 3일 전남 영광군 백수면 홍곡리에서 부친 하련(河蓮)과 모친 박현제화(朴玄濟華)의 딸로 출생. 소태산대종사의 정토, 원불교에서는 대사모(大師母)라 부른다. 소태산의 구도 당시 뒷바라지는 물론, 3남 1녀의 자녀 양육과 살림살이 등 사가일을 전담하여 소태산이 오롯이 새 회상 창업에 헌신할 수 있도록 내조하여 원불교 정토(正土) 제1호가 되었다.
“양하운 사모께서 회상을 창립하기까지 사가 일을 전담하사 갖은 수고를 다 했으며, 회상 창립 후에도 논과 밭으로 다니시면서 고역을 다 하시는지라, 일반 교도가 이를 죄송히 생각하여 거교적으로 성금을 모아 그 고역을 면하시도록 하자는 의논이 도는지라, 대종사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 말도 예에는 그럴 듯하나 중지하라. 이만한 큰 회상을 창립하는 데 그 사람도 직접 나서서 창립의 큰 인물은 못 될지언정 도리어 대중의 도움을 받아서야 되겠는가. 자력이 없어서 할 수 없는 처지라면 모르거니와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있다면 그것이 떳떳하고 행복한 생활이니라.’”(《대종경》 실시품25). 이러한 내용은 원불교의 창립기에 심신을 오로지 교단 발전을 위해 헌신 봉공하는 전무출신을 내조하는 권장부인 정토의 삶의 태도와 표준정신을 잘 나타낸다.
[생애와 활동]
양하운은 부덕(婦德)을 닦아오다가 16세에 소태산과 결혼했다. 소태산 대각 이전 구도생활을 위해 근실한 내조의 도를 다했다. 시부모 봉양은 물론 시동생(육산 박동국)의 성혼분가(成婚分家)며 선영제사 등을 책임졌다. 논밭일은 물론 산에 가서 땔감을 하고 길쌈도 했다. 방언공사 때에는 소태산의 제자들과 인부들의 식사수발에 조력했다. 1924년(원기9)부터는 정식 임원으로 발령을 받아 영산교당 식당 일을 2년여 동안 책임 맡기도 했다. 방언공사 당시 사재를 교중에 전부 내놓은 관계로 1926년(원기11) 임실 조갑종 가(家)로 이사하여 잠시 살다가 익산 송학리를 거쳐 1928년(원기13) 총부 근동으로 이사했다.
일정한 집이 없이 수차례 이사를 해야 하는 간고한 살림 속에서도 각지 동지들과 더불어 입선도 하며 공부심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생활 대책이 막연하여 총부의 세탁 바느질 등이며 남의 집 품삯으로 생계를 영위했다. “십타원 대사모가 집이 없이 남의 곁방을 떠돌며 사는 것을 보고 대중들이 여러 차례 대종사에게 대책을 거론했으나 그때마다 만류했고”(《대종경》 실시품25), 양하운 또한 “내가 전생에 남같이 큰 복을 짓지 못했는데 이생에 이 진리를 알고서 대중에게 빚질 수 없다”며 한사코 거절했다.
비로소 소태산의 사택을 장만한 것은 재가교도 진정리화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서울로 귀가하면서 희사한 초가 삼간집에 입주하게 되면서였다. 1935년(원기20) 당시 교단 언론지였던 《회보》에 소태산의 사가생활 곧 양하운의 생활 모습이 두 차례 소개된 바 있다. 당시 소태산의 시자였던 김형오가 1937년(원기22) 11월에 발행된 《회보》 제39호와 1940년(원기25) 3월에 발행된 《회보》 제64호에 발표했다. 제39호에는 ‘종사님의 사생활과 사모님의 실생활’이란 제하에 소개되었다.
“부인 양씨가 농사도 지으며 목축도 하고 혹은 회중 세탁도 하여 자신 생활과 자녀 양육과 회중사업을 하고 그 자녀는 삼남 일녀인데 일녀는 결혼하여 출가하고, 삼남은 아직 미혼으로 재학 중인데 그 학비는 본회의 인재를 양성하는 육영부에서 대 준다. 양씨는 당년 48세의 노령이나 자기로서 못할 일은 인부를 사용하고 그 외에는 세탁을 한다, 비료를 제작한다, 10리나 되는 논에 매일 내왕하며 물을 품거나, 밭을 매는 등 안하는 일이 없으나 마음에는 항상 평화한 생활을 하며 즐겨한다” 했고, 제64호에는 ‘기한(飢寒)을 이기시며 공사(公事)를 위하시는 우리 사모님 생활’이란 제하에 양하운과 그 자녀들의 간고한 생활을 소개한 후 이와 같이 적고 있다.
“이와 같이 곤란하게 살아도 혹자는 종사님께 회원의 것을 걷어다가 자기와 처자가 호화로운 생활이나 하지 않는가 하는 의심을 가질 사람이 있는가 모르는데 더구나 편히 먹고 잘 입고 호강스럽게 살아보소. 천만인의 고혈을 빨아다가 자기 이욕만 채운다고 험악한 말이 많을 것일세. 하물며 내가 공사에 큰 보조는 못할지언정 공사에 전력하시는 종사님에게 추호라도 방해될 일을 해서야 되겠는가. 또는 내가 공중의 물건을 먹을 만한 자격과 가치가 없이 먹는 것은 그 이상 더 큰 죄가 없는 일이니 나는 종사님 공사하시는 데에 방해되지 않게 하고 또는 죄도 짓지 아니하고 차라리 삼순구식(三旬九食)을 할지라도 오직 내 힘으로 내 생활을 하여 가는 것이 이 이상 행복되고 양심상 편안한 일이 없네.”
또 “우리 전무출신들은 종사님의 공사를 위하사 헌신적 희생적으로 노력하시는 정신을 체받아야 할 것이며, 전무출신 가족들은 사모님께서 종사님이 공사하는 데에 방해되지 않도록 하시는 정신을 모범하여 전무출신 권장인의 의무를 다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총부 구내에 안주하게 되면서 양하운은 사가살림 외에도 총부 대중의 공동 작업이 있을 때에는 언제나 빠지지 않고 함께 했고 보통 사람의 배 이상의 작업을 해냈다.
이 무렵 교단에서는 인재양성단을 결성하여 매월 16일에 의견 교환과 단금(團金)을 내었는데 양하운도 단금 마련을 위해 남의 집 벼 베기며 벼 타작 등 품삯 일을 하여 의무 이행을 했다. 선(禪)중에는 강연ㆍ회화ㆍ의두 문답 등 시간에도 열심히 참석했다. 양하운은 남달리 해학적이어서 유머에 능했고 기운이 장하고 심량이 넓어 여장부다웠다. 아무리 가정에 어려운 일이 있을지라도 유머를 잃지 않았고 친족이나 동네 이웃간에 다투어 본 적이 없었다.
소태산 열반 후 교단은 한결같이 발전했고 자녀들이 학업을 마치고 교단과 사회에 봉사하는 것을 보면서 오직 낙도생활로 만년을 보내다가 84세를 일기로 1973년 1월 7일 열반했다. 장녀 박길선은 송도성과 결혼했고, 장남 박광전은 전무출신하여 수위단 중앙단원과 원광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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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무출신의 사가(私家) 대책]
<유법원 교무/평화교당>
이 법문의 요지는 자력이 없는 처지라면 몰라도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떳떳하고 행복한 생활이라는 말씀이다.
3남1녀의 어머니이면서 가장의 역할까지 도맡아 하시던 십타원 양하운 대사모님의 일상의 단면을 그림으로 보는 듯 하다. 그의 일상생활은 논매기 밭매기를 비롯하여 손수 거름을 쳐내고 돼지 막에서 두엄을 쳐내며 완전 자력 생활을 했다고 한다.
또 우리 원로원에 계시는 선진님들도 지난날을 돌아보면 감회가 새로우실 것이다.
대종사님 당시의 전무출신들의 사가 생활은 누구 한사람 유족하게 사는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공회당에서 대종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내가 도성이 사는 것을 보면 기가 차고 입장이 딱해서 사가 살림을 경영하라고 밖에 내 보내면 한문을 잘하고 글씨를 잘 쓰니 제 집 살림 하나는 잘 권사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공중을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니 우리가 봐 줘야 하지 않겠는가.”
이 말을 들은 송도성은 평소 꼿꼿하게 정좌하던 허리를 굽히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고 하니 얼마나 간고한 살림살이였을까!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그때의 살림살이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이런 모습을 보시고 그러셨을까? 대종사님께서는 교단품 15장에서 전무출신들의 사가에 대한 대책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전무출신이 사가 일에 끌리지 아니하고 공사에만 전력하게 하기 위하여 곤궁한 사가는 회중에서 보조하는 제도를 두면 어떠하겠는가’
대종사님 당대에 전무출신들이 사가에 마음을 뺏기지 않고 전무할 수 있도록 하셨지만 오늘날도 교화현장에 있는 전무출신들의 사가에 대한 대책은 아직도 완전히 서있지 못하고 있다.
요즘은 맞벌이를 해야 자녀를 교육 시킬 수 있다고 두 부부가 직업전선에 뛰어드는데 전무출신 우리 교무님들은 요즘 대학생들 한달 용돈에도 못미치는 용금에도 소리 없이 가정을 잘 꾸려가는 것을 보면 정토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할 것인지는 대개 짐작이 간다.
우리 일선 교당에서도 이제는 교무님들의 용금에 대한 현실화를 예산에 반영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을 읽으시는 교도님들 우리 교당에 봉직하고 있는 교무님들의 용금이 얼마인지 알고 계시는지….
얼마 전 출가 교화단에서 휴양림 근처의 절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곳의 한 스님이 “원불교 교무님들의 연봉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그중 누구도 그 스님의 말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는 엉겁결에 “스님들하고 같을 겁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필자는 스님들의 연봉이 얼마인지 짐작도 못한다. 그냥 내 자존심상 그랬을 뿐이다.
전무출신들이 각자의 터전에서 자신들의 역량과 능력을 충분히 창출하고 발휘할 수 있도록 용금의 현실화가 이뤄져야하고, 교단적 차원에서 정토님들의 행복한 생활을 위한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 또한 우리 교단의 당면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