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품(信誠品) 16장
대종경(大宗經)
제10 신성품(信誠品) 16장
정 석현(鄭石現)이 사뢰기를 [저는 환경에 고통스러울 일이 많사오나 법신불 전에 매일 심고 올리는 재미로 사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석현이가 법신불의 공덕과 위력을 알아서 진정한 재미를 붙였는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이 곧 고 가운데 낙을 발견하는 한 방법이니 이러한 방법으로 살아 간다면 고통스러울 환경에서도 낙을 수용(受用)할 수가 없지 아니하나니라. 내가 봉래산에 있을 때에 같이 있는 몇몇 사람은 그 험산 궁곡(險山窮谷)에서 거처와 음식이 기구하고 육신의 노력은 과중하여 모든 방면에 고생이 막심하였으되 오직 법을 듣고 나를 시봉하는 재미로 항상 낙도 생활을 하여왔고, 또는 영광에서 최초에 구인으로 말하더라도 본래 노동도 아니 하여 본 사람들로서 엄동 설한에 간석지(干潟地)를 막아 낼 때에 그 고생이 말할 수 없었건마는 조금도 불평과 불만이 없이 오직 이 회상을 창립하는 기쁨 가운데 모든 고생을 낙으로 돌렸으며 나의 하는 말이면 다 즐거이 감수 복종 하였나니, 그 때 그 사람들로 말하면 남 보기에는 못 이길 고생을 하는 것 같았으나 그 실은 마음 속에 낙이 진진하여 이 세상에서 바로 천상락을 수용하였나니라. 그런즉, 그대들도 기위 이 공부와 사업을 하기로 하면 먼저 굳은 신념과 원대한 희망으로 어떠한 천신 만고가 있을지라도, 이를 능히 초월하여 모든 경계를 항상 낙으로 돌리는 힘을 얻은 후에야 한 없는 세상에 길이 낙원의 생활을 계속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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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현[鄭石現]
본명 미상. 법호는 백타원(柏陀圓). 1879년 3월 3일 전북 익산군 북일면 신룡리에서 2녀 중 차녀로 출생했다. 천성이 강직하고 검박했고, 일찍이 최치문(崔致文)과 결혼하여 슬하에 딸 둘을 두고 단란하게 지냈으나 부군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고달픈 생활을 하게 되었다. 장녀 최상옥(覺陀圓崔尙玉)의 인도로 불문에 귀의하게 되었다. 최상옥은 29세 되던 1924년(원기9) 전음광의 집에서 소태산대종사를 뵙고 제자가 되었다. 1927년(원기12) 딸의 인도로 입교한 정석현은 비록 행상으로 생활을 꾸려가야 했으나 법신불 전에 매일 심고(心告) 올리는 재미로 살았다. 이처럼 독실한 신앙심으로 낙도생활을 하던 중 1947년(원기32) 4월 28일 세수 68세로 열반에 들었다.(원불교대사전)
법신불[法身佛]
[개요]
진리 그 자체로서의 불(佛). 싼스끄리뜨 다르마까야붓다(Dharma-kāya Buddha)의 의역으로, 법ㆍ보ㆍ화(法報化) 삼신불 중의 하나. 법불(法佛)ㆍ자성신(自性身)ㆍ법성신(法性身)ㆍ진여신(眞如身)ㆍ여여불(如如佛)ㆍ실불(實佛)이라고도 한다.
[내용]
석존이 열반에 들자 불제자들은 영원불멸의 불타를 추모하게 되었는데, 후에 점차 석존이 깨달은 불변의 진리, 곧 진여 그 자체가 불타의 참몸(眞身)이라 하는 법신불사상이 발달하게 된다. 법신은 원래 이지불이(理智不二)의 불신을 의미하지만, 삼신설을 확립한 유가행파에서는 이와 지를 나누어 전자를 법신, 후자를 보신이라 하기도 한다. 유가행파에 의하면 진여법신은 언어명상과 사려분별을 넘어선 평등일상으로서, 부증불감하고 불생불멸하며 보편평등한 무한절대의 진여체성인바, 그것은 제불여래의 근본 자성신이며, 나아가 일체법의 소의(所依)가 될 뿐만 아니라, 보신과 화신 또한 이에 의지한다고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만유의 본래 자성인 진여의 이(理) 그자체로서, 모든 유정에 본구되어 있는 보편적인 근본 불신이라고 한다, 이러한 법신의 본성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있는데 오분법신(五分法身)ㆍ진여(眞如)ㆍ법성(法性)ㆍ실상(實相)ㆍ무상(無相)ㆍ이(理)ㆍ사(事)ㆍ육대(六大) 등의 구별이 있으며, 이는 나아가 만유의 실상이 바로 법신이라고 하는 데에서 ‘일체중생 실유불성(悉有佛性)ㆍ여래장(如來藏)’이라는 내재불사상이 발달하게 된다.
[원불교적 의미]
원불교에서는 소태산대종사가 깨달은 일원상진리를 법신불이라 한다. 그러므로 원불교의 교리를 총체적으로 일목요연하게 도시(圖示)한 ‘교리도’에서는 상단에 일원상(◯)을 그려 놓고, 그 아래에 “일원은 법신불이니, 우주만유의 본원이며, 제불제성의 심인이며, 일체중생의 본성이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우선 ‘일원은 법신불’이라는 명제에서 볼 때 ‘일원(상)’은 소태산의 대각에 의하여 밝혀진 ‘일원상진리’를 상징화한 것으로서, 이를 원불교에서는 ‘법신불’이라 하고, 그 상징과 진리를 합칭하여 ‘법신불 일원상’이라 부른다.
이는 원불교의 법신불관을 이해하는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곧 이 근본명제에서 볼 때 원불교의 법신불인 ‘일원상진리’는 소태산 스스로의 깨달음에 의한 독자적 진리관일 뿐 아니라, 동시에 그것은 그 깨달음에 바탕하여 불교적 진리관의 정수를 조화적으로 계승 발전한 것이라 할 수 없다. 불교사상사 내지 신앙발달사를 살펴보면, ‘법신불’ 개념은 불교교리의 중심을 이루면서 초기불교로부터 대승말기의 밀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불타관과 불신론이 발전되어왔는데, 소태산은 그의 독자적인 깨달음에 바탕하여 이들 불타관 내지 불신론의 종교적 의미들을 종합 지양하여 미래의 인류사회를 이끌어나갈 이상적 불타관을 제시하고자 ‘법신불 일원상’을 주창했다.
이때의 ‘법신불일원’은 개별 현상이나 인격적 화신불을 넘어선 만유의 근원인 궁극적 진리 그 자체로서의 불(佛), 곧 법신불(Dharma-kāya Buddha)을 가리킨다, 그것은 법ㆍ보ㆍ화(法報化) 삼신불 중의 하나인 협의의 법신불뿐만 아니라 이ㆍ지ㆍ비(理智悲)가 충만한 광의의 법신불, 곧 진리의 체성은 물론 작용과 함께, 나아가서는 우리들의 마음까지도 동시에 포함한 포월자로서의 진여실상을 지칭한 것이다. 이러한 원불교의 법신불관에 대해 엄밀히 살펴보면, 광의의 의미뿐만 아니라 협의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삼신일체의 광의의 의미의 법신을 강조함과 동시에, 우주만유와 인간자아의 존재와 가치에 있어 절대적 의의를 지니고 있는 본원ㆍ본성으로서의 법신, 곧 본질로서의 협의의 의미의 법신 또한 철두철미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법신불일원’을 원불교에서는 심불ㆍ심인(心印)ㆍ자성ㆍ심지(心地)ㆍ성품ㆍ법신불ㆍ법신불사은ㆍ일원상진리ㆍ일원불(一圓佛)ㆍ법신불일원상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본원ㆍ본성ㆍ심인으로서의 법신불]
① ‘우주만유의 본원’이라는 명제는 ‘법신불일원’의 근원성ㆍ절대유일성ㆍ전체성 등의 의의를 강조한 것으로서, ‘법신불일원’이야말로 우주만유의 본원으로서, 만유는 그에 바탕하여 차원과 양상을 달리하면서 전개된 다양한 현상적 존재임을 밝힌 것이다. 이때 ‘우주만유’라는 개념에는 현상세계의 모든 사물은 물론, 정신적 심리적 존재들, 그리고 우리들의 인식과 상상을 넘어선 유형무형의 다양한 차원의 존재세계까지도 포함된다.
② ‘일체중생의 본성’이라는 명제는 우주만유의 본원으로서의 ‘법신불’은 동시에 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생명존재의 본성 그 자체임을 명시한 것이다. 이는 원불교의 심성론에 관한 문제로서, 진리의 내재성과 그에 따른 인간 스스로의 주체성과 자각성을 강조한 것이다. 곧 인간 자아의 본성이야말로 바로 ‘법신불’의 내재적 진리로서, 이를 자성불ㆍ심불ㆍ불성ㆍ성품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른다. 가치론적으로는 지고ㆍ지선ㆍ지복의 의미로도 파악할 수 있다. 현상적으로는 천차만별의 분별심에 의한 유위ㆍ유한의 상대적 유루(有漏)세계에 살고 있는 범부중생이라 할지라도, 근본 바탕은 어디까지나 무위ㆍ무한의 절대적 무루(無漏)본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③ ‘제불제성의 심인’이라는 명제는 ‘법신불일원’의 각증성(覺證性)ㆍ회통성(會通性)ㆍ귀일성(歸一性) 등의 의미를 강조함과 동시에, 무엇보다도 종교적 의미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명제이다. 곧 만유의 본원이요 자아의 본성으로서의 ‘법신불일원’은 상대적이고 일상적인 경험이나 논리 차원을 넘어선, 부처와 성자들의 심오한 종교체험에 의한 깨달음이나 계시의 차원에서 현시된 근원적 진리의 경지를 원불교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동시에 그러한 근원적 진리의 경지와 차원에서는 제종교의 진리관이 서로 만나게 되며, 모든 종교의 궁극적 지향점 또한 이를 향한다. 결국 ‘제불제성의 심인’으로서의 근원적 진리, 곧 본원ㆍ본성자리는 모든 종교의 알파요 오메가라 할 수 있다.
[법신불의 신앙ㆍ수행]
《정전》 ‘일원상의 진리’에서는 일체의 차별을 초월한 진공의 측면과 아울러, 진리의 작용이 소소영령한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차별세계로 나타나는 묘유의 측면으로 밝히고, 이러한 진공묘유의 조화가 우주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에 은현자재하는 것이 곧 ‘일원상진리’라 했다. 한편 ‘교리도’의 게송에서는 “유는 무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 지극하면, 유와 무가 구공이나, 구공 역시 구족이라”고 하여, 구공과 구족의 2대 속성으로 밝히고 있다. 진공과 묘유라고도 부르는 이 양면관은 원불교 교리전체에 대한 교상판석적 검토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대종경》 서품 1장의 대각일성에서 강조되는 불생불멸과 인과보응 또한 동일한 논리의 전개이다. 이와 같이 원불교의 법신불관은 진공과 묘유, 또는 진리의 체성뿐만 아니라 진리의 작용까지를 포함한 포괄적의미의 법신불관을 강조하고 있다. 소태산은 “불상은 부처님의 형체를 나타낸 것이요, 일원상은 부처님의 심체를 나타낸 것이므로, 형체라 하는 것은 한 인형에 불과한 것이요, 심체라 하는 것은 광대무량하여 능히 유와 무를 총섭하고 삼세를 관통했나니, 곧 천지만물의 본원이며 언어도단의 입정처라,…유가에서는 이를 일러 태극 또는 무극이라 하고, 선가에서는 이를 일러 자연 또는 도라 하고, 불가에서는 이를 일러 청정법신불이라 했으나, 원리에 있어서는 모두 같은 바로서”(《대종경》 교의품3)라고 했다.
이처럼 유와 무를 총섭하고 삼세를 관통한 진리를 ‘법신불’이라 하고 있다. 정산종사는 만법의 근원인 진리불을 법신불이라 의미지었다(《정산종사법어》 원리편5). 이와 같이 원불교의 법신불관은 진리의 체성과 작용, 또는 진공과 묘유를 모두 포함하는 의미를 지닌다. 나아가 그것은 우주만유의 근본과 우리들 마음의 본성을 하나로 보는 이지불이(理智不二)의 의미를 지닌 불신관이다. 이는 유가행파에서 총상(總相)법신과 별상(別相)법신으로 나누고, 총상법신이야말로 이와 지를 겸한 법신, 곧 소조(所照)의 진여와 능조(能照)의 진각(眞覺)을 합쳐 이지불이의 법신이라 함과 상통한다.
이에 비해 별상법신은 청정법계의 진여 자체만을 법신으로 본다. 원불교에서는 본원ㆍ본성ㆍ심인으로서의 법신불(일원)을 본존으로 모시고, 이를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아 종교적 실천으로서의 신앙ㆍ수행의 양문을 열어 놓고 있다. 이를 타력신앙과 자력신앙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원불교의 신앙문과 수행문은 바로 앞에서 언급한 ‘법신불일원’의 진리적 구조, 곧 진공ㆍ묘유의 양면관, 또는 공ㆍ원ㆍ정의 3속성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인과보응의 신앙문’으로 표현되는 ‘법신불ㆍ사은신앙’에는 주로 진공묘유의 진리구조를, 그리고 이에 비해 진공묘유의 수행문으로 표현되는 ‘자성불 삼대력수행’에는 진공묘유는 물론, 공ㆍ원ㆍ정의 진리구조가 두루 적용되고 있다.
[원불교 법신불신앙의 특징]
원불교의 법신불 신앙이 지니는 의의와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원불교의 신앙은 법신불 중심의 신앙이다. 〈원불교교헌〉에는 “본교는 법신불 일원상을 본존으로 한다”고 명시하여, 사상적으로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의례에서 조차 일체의 인격적 불상이나 존상을 모시지 않고 법신불 그 자체를 직접 신앙의 대상으로 모신다. 이와 같이 ‘법신불일원’을 본존으로 모시고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는 원불교의 기본입장은, 미륵불과 용화회상에 대하여 “미륵불이라 함은 법신불의 진리가 크게 드러나는 것이요, 용화회상이라 함은 크게 밝은 세상이 되는 것이니,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대의가 널리 행해지는 것이다”(《대종경》 전망품16)라고 한 소태산의 법문에도 그 취지가 잘 드러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원불교의 주불은 바로 법신불이며, 회상 또한 본질적으로 법신불의 회상이다.
② 원불교의 법신불신앙은 범재불론(汎在佛論)적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의미를 지닌다. 이와 같은 법신불 중심의 신앙은 삼신을 구별하여 보는 협의의 법신이라기보다는, 삼신일체 내지 우주불론(宇宙佛論)ㆍ우주신론적 광의의 법신불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는 우주전체를 그대로 광대무량한 불격으로 보는 화엄의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사상임은 물론, 우주전체가 그대로 대일여래의 6대ㆍ4만ㆍ3밀에 의한 구체적이고 상황적인 현현 아님이 없다고 보는 밀교의 ‘대일여래’사상과도 상통한다.
③ 원불교의 법신불신앙은 범은론(汎恩論)적 무량은혜불의 의미를 지닌다. 이와 같은 법신불 내지 그 응화신으로서의 만유불은 우리와 관계에서 볼 때, 무엇보다도 우리를 살리고 구제하기 위한 무한 자비의 은혜덕상을 지닌 무량은혜불로서, 이른바 우주만유 전체를 그대로 자비 법신불의 은적 현현으로 보는 범은론적 성격을 지닌다. 이는 마치 우주전체 그대로를 대자비불이라고 보는 일부 학자들의 아미타불관(宇井伯壽, 《불교범론(佛敎汎論)》)과도 상통한다. 더욱이 법신불의 구체적 은혜덕상으로서의 사은을 강조하고 있음은 밀교의 5지여래(五智如來) 또는 4종법신설과 근본적으로 일치한다고 본다.
④ 원불교의 법신불신앙은 특히 내재불로서의 자성불의 의미가 강조된다. 이와 같은 범재불론적이고 범은론적인 성격을 지닌 법신불일원은 우리의 본성을 따라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 그 자체가 바로 법신의 내재불로서, 바로 지금, 여기, 이 마음에 즉하여 영원 무한한 법신불이 약동하고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영성심리학자들에 의하여 강조되고 있는 우주의식(Cosmic Conciousness) 또는 본질 생명 등과 상통한다고 본다.(Ken Willber, 《통합심리학》;정인석, 《트랜스퍼스날 심리학》)
⑤ 원불교 법신불신앙은 조화적 회통성 내지 병진성이 특징이다. 그것은 자력과 타력, 신앙과 수행, 향상문과 향하문, 진리불공과 실지불공, 영과 육, 이와 사, 그리고 본체와 현상 등 인간의 삶 전반에 걸쳐 두루 조화적으로 회통시킨 원만한 종교신앙을 지향하고 있다.(원불교대사전)
험산궁곡[險山窮谷]
가파르고 험악한 산과 깊은 산골짜기. 문명세계와 동떨어지고 인적이 드문 깊은 산골마을을 가리키는 말로 소태산대종사가 탄생한 영촌마을 같은 곳이 당시로서는 험산 궁곡이었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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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곳이 꽃자리요 낙원의 샘터]
<양지혜 교무/포천교당>
사람들은 몸으로 겪는 노동은 그것이 아무리 고생스럽다 해도 그것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되어지면 얼마든지 감내하고 극복해 나갈 수 있으며 그 고생마저도 행복한 삶의 과정으로 포장하기까지 한다. 반면 우리 공부인들은 눈에 보여지는 보상이 없어도 처한곳이 아무리 진자리여도 힘든 경계가 경계가 아닌 오로지 공부할 때임을 알기 때문에 범사에 감사하고 은혜를 찾는다.
그 길이 스승과 함께 가는 길이라면 더더욱 소중하고 보람된 은혜 일 뿐이다. 요즘 계속해서 찾아오는 삶의 고난스러움에 힘겨워하는 교도들이 있다. 교당일을 내 일처럼 생각하고 가정에서 있어지는 가례도 교당에서 모실만큼 교당과 가까이 하는 교도인데 어려운 걱정거리가 연이어 생기고 보니 오히려 교무인 내가 그 교도들의 신심이 물러나지 않을까 염려가 될 정도이다. 다행히도 이런 우려와는 달리 경계에 속지 않고 오히려 공부심을 챙기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면서 "이 법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는 말을 전한다. 왜 대종사께서 이 법을 가져다가 실제 생활에 응용하라고 했는지 자기를 위해 이 법문이 생긴 것 같다며 경계를 만나면 대조할 법이 있다는 것에 너무 감사하다고 한다. 공부의 진진한 맛을 제대로 보는 교도의 모습에서 일원의 아우라가 느껴진다. 대종사께서는 "이 공부와 사업을 하기로 하면 먼저 굳은 신념과 원대한 희망으로 어떠한 천신만고가 있을지라도, 이를 능히 초월하여 모든 경계를 항상 낙으로 돌리는 힘을 얻은 후에야 한 없는 세상에 길이 낙원의 생활을 계속 할 수 있으리라"고 말씀했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힘들면 그곳을 벗어나려는 생각을 먼저 했었다. 육신의 힘듦은 얼마든지 견뎌 낼 수 있는데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도저히 못 참겠다 싶어 이것 저것 끌어다가 짝짓기 하면서 내가 그곳에서 벗어날 타당한 이유들을 찾곤 했었다. 마음에 공부심이 없으니 그 어떤 것도 힘들게만 느껴질 뿐 그곳이 나를 키워주고 있는 삶의 꽃자리임을 알지 못했던 어리석은 순간들이었다. 보통 사람들의 삶이 아니기에 더욱 힘들고 어렵다는 것쯤이야 출발 전 부터 각오는 하고 있었다. 20년 전 출가식때 당시 좌산종법사는 "가난이 축복이요, 고독이 행복이라"는 법문으로 첫 출발하는 우리들에게 각오를 다지게 했었다.
환경이 날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힘들어 하고 있음을 알고 보니 한평생 변함없는 모습으로 이 회상에 전무출신한 선진들의 모습이 얼마나 존경스럽고 장하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존경할게 없다고 생각했던 교무도, 촌스럽다고 무시하던 교무도, 품위 없다고 눈치를 했던 교무도, 더 이상 내가 비난하고 평가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 교무들의 일생을 이 회상의 바탕이 되고 터전이 된 그 자체로 너무나 소중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온 선진이요, 우리 교무라는 감동에 희열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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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라[aura]
아우라(aura)는 독일의 평론가인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이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논문에서 사용한 용어.
'어떤 예술작품이나 물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 혼, 모방할 수 없는 특유의 기운, 창조성이 느껴지는 유일무이성, 즉 다른 것과는 다른 한 예술작품의 고유한 특성 혹은 미적 아름다움'을 뜻한다.
아우라는 우리말로 그냥 ‘분위기’라고 번역되는데, 한 대상이 관찰자에게 숨결처럼 살며시 다가오는 듯힌 느낌, 감정이입을 뜻한다.
그 대상이 예술작품이 되면 작품과 감상자 사이의 신비한 교감, 둘러싸는 은밀한 신비함을 의미하게 된다. 예를 들어 고흐의 '해바라기'라는 그림을 미술관에서 원품으로 보았을 때 느끼는 감동, 음악홀에서 파바로티의 노래를 들었을 때의 바로 그 느낌이 아우라이다.
20세기 초반 유럽 철학자들은 마치 우리가 인문학의 위기를 걱정하듯 예술의 위기를 논하고 있었다. 이때 발터 벤야민은 예술위기의 본질이 아우라의 상실이라고 진단했다.
모든 예술이 종교적 제의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예술은 작품과 인간사이의 몰입을 통해 신비한 신적 체험을 맛보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그렇지 못한가. 그 이유는 현대예술에는 작품이 갖는 시/공간적인 일회성이 없기 때문이다.
아우라의 구체적인 속성은 바로 시/공간적인 현재성과 유일성이다. 발터 벤야민은 산업사회가 되자 예술이 기계를 통해 복제되기 시작하면서 그 아우라를 상실했다고 본다.(시사상식사전)
아우라(aura)는 인체로부터 발산되는 영혼적인 에너지다[1]. 또는 어느 인물이나 물체가 발하는, 일종의 독습인 영적인 분위기도 가리킨다.
「숨」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아우라(αύρα/aura)」에 유래해 영어로서는 약간 문어적인 표현이다. 한자 표기에서는 「오랍(奥拉)」이 된다.
아우라의 개념의 설명에 개인차가 생기는 일도 있다.
테드 안드류즈는, 「인간 아우라라고 하는 것은 육체를 둘러싸는 에너지 필드」에서 「인간을 푹 감싸는 입체적인 것」 「건강한 사람의 경우, 아우라는 몸의 주위를 타원형, 혹은 계란형으로 싸고 있다」 「평균적인 사람은 신체의 주위 2.5~3m에 걸쳐서 감싸고 있다」고, 해설했다.
제인 스트라자즈는, 아우라라는 것은 사람을 둘러싸는 「기분의 장소」라고 해, 사람의 건강, 기분, 에너지 레벨에 대해 가르쳐 준다고 했다.
윌리엄 앳킨슨은, 아우라는 실재하는 힘이라고 해, 「생각체」라고 했다. 아우라에도 타입이 있고 그 기본형인 「프라나오라」는 생명의 현물질이기도 하다고 했다.
과학자이며 신비 사상가인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주위에는 「파동체」가 존재해, 그 안에 인간의 사고가 시각적으로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다.
또, 종교화 등에 그려지는 후광(헬로)을 아우라로 간주하는 일이 있다. 유태의 신비학 카발라에선, 아우라를 「성기광(星気光)」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크리스트교의 종교 회화에는, 빛의 아우라에 싸인(예수 등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