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재(Aid Perfection) 2014. 12. 23. 12:06

대종경(大宗經)

10 신성품(信誠品) 14

대종사 설법하실 때에 김 정각(金正覺)이 앞에서 조는지라,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앞에서 졸고 있는 것이 보기 싫기가 물소 같다.] 하시니, 정각이 곧 일어나 사배를 올리고 웃는지라,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 동안 정각에게 정이 떨어질 만한 야단을 많이 쳤으나 조금도 그 신심에 변함이 없었나니, 저 사람은 죽으나 사나 나를 따라 다닐 사람이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제자로서 스승에게 다 못할 말이 있고 스승이 제자에게 다 못해 줄 말이 있으면 알뜰한 사제는 아니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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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각[金正覺]

법호는 선타원(善陀圓). 1984313일 전북 전주에서 부친 학경(學敬)과 모친 김순성화(金順成華)의 딸로 출생. 임덕봉과 결혼 후 딸 하나를 두고 부군과 사별하여 어려움을 겪던 중 보천교에 입문했다. 이후 송적벽의 인도로 소태산대종사 문하에 입문했다. 1925(원기10)경 전무출신을 단행하여 영산에서 근무했다. 1927(원기12)부터 8년간을 총부 공양원으로 근무하며 소태산의 식사를 수발했다.

김정각은 유난히 잘 졸았다. 법석에서 제일 앞자리에 앉아 졸고 있는 그와 관련한 법문이 대종경신성품 14장이다. ‘졸고 있는 것이 보기 싫기가 물소 같다는 소태산의 꾸짖음을 듣고 곧 일어나 사배를 올리고 웃는지라. 소태산은 내가 그 동안 정각에게 정이 떨어질 만한 야단을 많이 쳤으나 조금도 그 신심에 변함이 없었나니, 저 사람은 죽으나 사나 나를 따라 다닐 사람이라하고 이어 제자로서 스승에게 다 못할 말이 있고 스승이 제자에게 다 못해 줄 말이 있으면 알뜰한 사제는 아니니라고 했다. 외손녀 박은섭 등이 전무출신했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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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과 제자간 창자 이을 심법]

<양지혜 교무/포천교당>

대종경 신성품 14장에서는 '대종사께서 제자로서 스승에게 다 못할 말이 있고 스승이 제자에게 다 못해 줄 말이 있으면 알뜰한 사제는 아니다'고 말하고 있다.

학부시절 한참 사심과 정심이 왕래할 때 스승께 여쭸다. 스승께서는 마음에 사심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며 인정해 주고 당신 스스로에게도 나이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것이 사실이다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아직 어린 제자에게 전혀 가식적이지 않고 너무나 사실적인 모습을 보여주시는 모습에 어떤 분별도 생기지 않고 두 마음 없이 오롯한 신을 세웠던 것 같다.

이후 마음에 사심이 생겨 힘들 때마다 내안에 일어난 사심에 대해 솔직히 말씀을 드리면 스승께서는 나무라지 않으시고 '그랬냐' 한마디만 해주신다. 그러고 나면 신기하게도 그 사심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음을 경험했다.

마냥 좋았던 것만은 아니다. 모 교당에서 모시고 살때는 어찌나 야단을 많이 맞고 살았는지 모른다.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간사가 잘못해도 야단치고 교당 분위기가 조금 안좋아도 혼내시는 통에 살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때의 바람은 빨리 스승의 곁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어느날 선배가 와서 보고 자기도 이상했던지 스승께 나를 혼내시는 이유를 여쭈니 지혜는 키워야할 싹이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그 말을 선배로부터 전해 듣고 이후에는 어떤 꾸지람도 꾸지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르긴 해도 지금까지는 우리 스승께서는 나보다 더 나를 잘 알고 계시지 않을까 생각되어진다.

가끔 교도들에게서 서운한 마음을 찾을 때가 있곤 한다. 교도들은 교무니까 말을 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을거라 생각을 하는 듯 하다. 앞뒤 생략하고 핵심만 전달하는 식의 말을 던질 때면 당황되고 실제 곤란한 지경에 이를 때도 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상()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상이 남아 있고 더 두터운 업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도 교무에게는 그것이 상처가 되어지지만 말은 못한다. 그런 경험이 몇 번 있고 보면 교도와 보이지 않는 투명한 막이 생겨있음을 느끼게 된다. 속 깊은 마음을 연하는 것이 아니라 교무와 교도로서의 기본적인 관계만을 유지할 뿐 법정으로 두터워지는 관계는 되어지지 않는다.

교무와 교도가 알뜰한 사이가 되어지지 않았는데 어찌 교화가 될 것이며 그곳에 신심 공심 공부심들이 들어갈 것인가. 어떤 이유였든지 어떤 상황이 되었든지 결국 자기 공부는 자신 스스로가 하는 것이기에 나의 스승과 심심상련이 되어졌듯이 교도들과 심심상련이 되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대산종사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전신전수(全信全受)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사제지간에 창자를 이어야 법이 전해지기에 회상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에 창자를 이어 법을 전할 수 있는 제자 한 사람만 있어도 일생에 경사가 아닐 수 없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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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습, 형태, 모양, 특징, 특성, 성질. 싼스끄리뜨로는 락샤나(lakṣaṇa). 다른 것과 구분 짓게 하는 것, 차별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2) 생각하는 것, 생각관념. 싼스끄리뜨로는 삼즈냐(saṃjñā). 아상(我相)법상(法相) 등의 상이 여기에 해당한다. 유식(唯識)과 선종에서는 의식의 대상에 대한 고정된 관념으로서 깨달음을 방해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원불교에서도 마음에 상을 가지고 있거나 이에 집착하면 밝은 지혜를 발현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3) 상태자리위치경지. 싼스끄리뜨로는 아바스타(avasthā).(원불교대사전)

아상[我相]

(1) 사상(四相)의 하나. 오온(五蘊)이 일시적 인연으로 모여서 이루어진 자기를 영원한 실체라고 집착하는 것.

(2) 자기의 지식학문능력지위문벌재산 등을 자랑하며 남을 멸시하는 마음. 잘난 체, 똑똑한 체, 아는 체, 남을 멸시하는 마음. 아상만 떼면 사상을 떼기가 쉽다.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네 가지를 사상이라고 하는 데, 이 중 아상이 가장 근원이 된다. 정산종사는 중생은 아상에 가려서 제 허물을 보지 못하고 남의 시비만 본다고 했다(정산종사법어법훈편21).(원불교대사전)

사상[四相]

(1) 깨치지 못한 중생들이 전도(顚倒)된 생각에서 실재한다고 믿는 네 가지 분별심, 곧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을 이른다.

아상

모든 것을 자기 본위자기중심으로 생각하여 자기가 가장 잘 났다고 하거나, 자기의 것만 좋다고 고집하거나, 오온(五蘊)의 일시적 화합으로 이루어진 자기 자신을 실재한다고 집착하는 소견.

인상

우주만물 중에서 사람이 가장 중요하며, 일체만물은 사람을 위해서 생긴 것이라, 사람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인간본위에 국한된 소견.

중생상

부처와 중생을 따로 나누어 나 같은 중생이 어떻게 부처가 되고 무엇을 할 수 있으랴 하고 스스로 타락하고 포기하여 향상과 노력이 없는 소견.

수자상

자기의 나이나 지위나 학벌이나 문벌이 높다는 것에 집착된 소견.

이러한 사상에 사로잡히면 중생이요, 사상을 벗어나야 불보살이 될 수 있다. 사상을 아인사상(我人四相)이라 한다.

(2) 모든 사람이 다 겪게 되는 네 가지 과정. 일기(一期)사상 또는 과보(果報)사상이라고도 하는데, 인생의 생사를 말한다.

(3) 우주만물이 생멸 변화하는 과정을 네 가지로 설명하는 것. 곧 온갖 법의 유위(有爲)를 설명하는 것으로 사유위상(四有爲相)이라 한다.

생상(生相): 만물이 발생하는 것.

주상(住相): 만물이 안주(安住)하여 그대로 존속하는 것.

이상(異相): 만물이 쇠퇴하여 가는 것.

멸상(滅相): 만물이 파멸되어 버리는 것.

(4) 우주의 성.(원불교대사전)

오온[五蘊, pañca-skandha]

존재에 대한 인식 활동. 인간의 육신과 정신 또는 우주 만유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기본 요소. 오음(五陰), 오취(五趣)라고도 한다. ()은 덮는다, 물건을 쌓는다는 뜻으로 색(色受想行識)을 말한다. 색은 육신을, 수상행식은 마음의 작용을 나타낸다. 색온은 지수화풍의 화합으로 형체가 있는 것, 유기물질, 육신을 말하고, 수온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작용이며, 상온은 생각 또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고, 행온은 받아들인 사실을 근거로 업을 만드는 것이며, 식온은 다섯 기초 원소의 핵을 이룰 알음알이 상태로 있는 형태를 말한다.(원불교대사전)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오온(五蘊)의 다섯 가지 내용. 인간의 육신과 정신을 표현하는 요소 또는 우주 만유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기본 요소. 오음(五陰)오중(五衆)오취(五聚)라고도 한다.

(빛 색)은 형상과 색깔로서 형상 있는 모든 물체를 말한다.

(받을 수)는 괴롭다즐겁다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 등으로 느끼는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생각 상)은 외계의 사물을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그것을 상상하여 보는 마음의 작용, 곧 연상을 말한다.

(다닐 행)은 인연 따라 생겨나서 시간적으로 변천하는 마음의 작용, 곧 반응을 말한다.

(알 식)은 의식하고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여기에서 색은 인간의 육체요, 식은 인간의 마음이다.

중생은 자아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고 다만 오온이 잠시 모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깨치지 못한 중생은 애욕 번뇌와 생사 거래에 집착하여 오온이 텅 비어 실체가 없는 것임을 모르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온갖 죄업을 짓고 천만가지 괴로움 속에 헤매게 되는 것이다. 사람만이 오온이 일시적으로 모인 것이 아니라 우주 만물의 현상세계가 다 오온이 일시적으로 모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존재하는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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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사전

[알 식, 적을 지, 깃발 치]

<한자사전의 뜻>

1. 알다

2. 지식

3. 식견

4. 친분

a. 적다 ()

b. 기록하다(記錄--) ()

c. 표시하다(表示--) ()

d. 표지(標識: 표시나 특징으로 다른 것과 구분함) ()

e. 깃발(-) ()

<단어 뜻풀이>

사물(事物)의 시비(是非)를 판단(判斷)하는 작용(作用) 오온(五蘊)의 하나. 사물(事物)을 인식(認識)이해(理解)하는 마음의 작용(作用)

<형성문자>

대법원 인명용으로는 식, . 뜻을 나타내는 말씀언(말씀)와 음()을 나타내는 ()으로 이루어짐. ()로 듣고 알게 된다는 뜻으로 알다를 뜻함. 본디는 ()이라고만 써서 여러 가지 뜻을 나타내었으나 나중에 말뚝은 ()이라 쓰고, 안표(眼標)가 되는 깃발은 ()라고 쓰며, 그 밖에 ()() 따위의 글자가 생기고, 안표(眼標)알다란 뜻의 경우(境遇)(말씀언변)을 붙여 ()이라고 씀

. 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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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싼스끄리뜨 비즈냐나(vijñāna). 대상을 인식하는 마음의 작용. 범부의 인식작용을 식()이라 한다. 12인연의 하나. 대상을 분별하는 인식작용으로서 식()은 근(: 인식기관)이 경(: 대상)을 연()으로 하여 그 작용을 일으킨다. 소승에서는 안의의 6(六識)을 말하고, 대승에서는 6식에다 제7 말라식(末那識), 8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더하여 8식을 말한다. 십이인연의 세 번째 과정으로서의 식은 과거생의 혹업에 의하여 모태(母胎)에 탁태결생(托胎結生)하는 순간을 말한다.

[용어의 성립 및 전개]

유식학파가 대승불교에서 독립된 학파로 자리매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아뢰야식(阿賴耶識, ālaya-vijñāna)이다. 이 식의 발견은 부파불교 이래 윤회의 주체에 대한 추구의 긴 여정에 종지부를 찍은 셈이다. 바라문교가 윤회의 주체를 아(, ātman)라고 하는 정신적인 상징을 설정한 반면, 불교는 무아(無我)를 주창하면서 윤회를 설명해야 하는 어려운 입장에 놓이게 된다. 곧 전생의 업력에 의해 현재의 자신이 형성된다고 할 때, 전생의 자기와 현재의 자기를 동일체로 설정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불교윤회설이 안고 있는 문제점이었다.

부파불교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로 설명하는 것과 십이연기설과는 별도로 윤회의 주체를 설정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설일체유부의 경우는 전자를 취해 십이연기설에서 윤회의 주체를 오취온(五取蘊)으로 보았고, 상좌부의 유분식(有分識), 대중부의 근본식(根本識), 화지부의 궁생사온(窮生死蘊) 등과 같은 정신적인 기체를 윤회의 주체로 설정한 것은 후자의 경우이다. 유식학파에서는 처음에는 이 두 가지 방향이 모두 추구되었으나 후에 둘이 결합되어 십이연기설 가운데 식을 아뢰야식으로 설정하기에 이른다.

아뢰야식이라는 개념은 유식학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유식학파가 이 식을 발견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요가의 체험에서 나온다. 요가는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몰두시켜 6식의 활동을 멈추게 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 6식의 활동이 멈추면 그 속에 잠재되어 있던 심층심리의 세계가 전개되는데 이 심층심리의 세계가 바로 아뢰야식의 세계인 것이다. 이 아뢰야식의 대상과 인식작용은 깊고 미세하여 지각하기 어렵다고 한다. 따라서 유식학파에서는 성문과 독각이 6식의 현상만을 관찰하는 것에 비해 대승의 보살은 심층의 현상도 관찰하여 모든 대상을 아는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증득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아뢰야라는 개념은 원시불교경전에서는 집착이나 집착의 대상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부파불교에서는 집착의 대상으로 여러 가지 사물들이 고려되고 있다. 이에 반해 유식학파에서는 집착의 근원적인 대상으로 아뢰야식을 발견한 것이다. 따라서 집착의 근원적인 대상 곧 집착되어진 식이라는 의미에서 아뢰야식이 만들어졌다. 아뢰야에는 이 이외에도 장()이나 택()으로 한역되는 저장하다는 의미가 있다. 아뢰야식은 모든 법을 습기(習氣)의 형태로 저장하고 있다.

습기는 과거에 지은 행위의 인상이므로 모든 법을 결과로서 저장하고 있는 셈이다. 요가 수행자들은 이 식이 마치 습기를 저장하는 곳이나 창고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아뢰야를 붙여 아뢰야식이라고 명명했다. 그런데 이미 아뢰야가 집착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식학파에서는 집착보다는 저장 곧 섭장(攝藏)의 의미가 더욱 강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원불교에서의 의미]

12인연에서 식()은 생명 있는 것에 한하나, 원불교의 경우에는 유정물(有情物)만이 아니라 무정물(無情物)에까지 식이 있다고 본다. “무릇, 땅으로 말하면 오직 침묵하여 언어와 동작이 없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다 무정지물로 인증하나 사실에 있어서는 참으로 소소영령한 증거가 있나니, 농사를 지을 때에 종자를 뿌려 보면 땅은 반드시 그 종자의 생장을 도와주며, 또는 팥을 심은 자리에는 반드시 팥이 나게 하고, 콩을 심은 자리에는 반드시 콩이 나게 하며, 또는 인공을 많이 들인 자리에는 수확도 많이 나게 하고, 인공을 적게 들인 자리에는 수확도 적게 나게 하며, 인공을 잘 못 들인 자리에는 손실도 나게 하여 조금도 서로 혼란됨이 없이 종자의 성질과 짓는 바를 따라 밝게 구분하여 주지 아니하는가”(대종경변의품1).(원불교대사전)

★★★★★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