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일상수행의요법

4. 불신과 탐욕과 나와 우를 제거하자..

원재(Aid Perfection) 2014. 10. 18. 12:47

정전(正典)

3 수행편(修行編)

1장 일상수행의 요법(日常修行-要法)

4) ()과 분(忿)과 의()와 성()으로써 불신(不信)과 탐욕(貪慾)과 나()와 우()를 제거하자.

팔조[八條]

[개요]

(1) 팔조법금(八條法禁), 팔조지교(八條之敎)의 줄인 말. 우리나라 고대 사회에서 시행된 여덟 가지의 법금. 그 중에 살인 상해(傷害)투도(偸盜)만이 전해지고 있음. 종래 기자(箕子)가 베푼 것이라고 전하여 왔으나 이에 대하여 고대 인류사회에 공통되는 만민법적 성질의 것이라는 설이 유력함.

(2) 대학의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팔조목을 줄인 말. 곧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를 말함.

(3) 원불교 수행문 교리의 하나로 교리를 도식화한 교리도(敎理圖)’에는 삼학과 함께 진공묘유의 수행문에 배치시키고 있다. 또한 원불교의 원경인 정전에는 근본교리들로 편성된 제2 교의편의 제5장에 자리하고 있으며, 동 제6장에서는 삼학과 더불어 공부의 요도라고 언명하고 있다. 팔조는 여덟 가지 조목이라는 뜻으로 일원상의 진리를 수행의 표본으로 삼아 공부를 할 때 공부 길을 바르게 잡아가도록 하는 요긴한 조목으로 공부를 촉진시키는 덕목 네 가지를 진행사조(進行四條), 공부에 방해되므로 버려야 할 요목 네 가지를 사연사조(捨捐四條)라고 하며, 이를 모두 합하여 팔조라고 한다.

[원불교 팔조 형성과정]

원불교의 근본 교리인 사은 사요와 삼학 팔조는 교조인 소태산대종사가 새 종교를 개창하면서 교법을 초안할 때부터 등장한다. 소태산은 방언공사와 법인기도를 마친 후 1920(원기5)에 부안 봉래산 초당인 봉래정사에서 교법을 구상하고 강령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이 곧 인생의 요도인 사은 사요와 공부의 요도인 삼강령 팔조목이다. 이러한 과정에 대해 원불교교사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원기 5(경술) 4월에 대종사 봉래산에서 새 회상의 교강을 발표하시니, 곧 인생의 요도 사은 사요와 공부의 요도인 삼강령 팔조목이었다.삼강령은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니 이는 곧 공부인의 마땅히 밟을 도로서 부처님의 말씀하신 계정혜를 단련하여 생령을 제도하는 요법이 되며, 팔조목은 신()(忿)()() 4조로는 진행 건을 삼고 불신(不信)탐욕(貪慾)()() 4조로는 사연 건을 삼아 삼강령 공부를 운용하는 요법이 되는 바 그 강령이 간명하고 교의가 원만하여 모든 신자로 하여금 조금도 미혹과 편벽에 끌리지 아니하고 바로 대도에 들게 하는 새 회상의 기본교리이다.”

이렇게 발표된 교강은 봉래정사에서 제자들에게 근기에 따라 예비훈련으로 시험해 보고, 그 성적이 매우 좋아 이때부터 교강은 기본교리로서 모든 신자의 훈련의 표준으로 삼았다. 1924(원기9)불법연구회라는 교명으로 정식 출범한 후 교서를 발행하게 되는데, 처음 발간된 문건이 1927(원기12)에 이공주의 주선으로 발간된 불법연구회규약》ㆍ《수양연구요론》ㆍ《상조조합규약3종이다. 이 중에서 불법연구회규약연구인 공부순서라는 제목 아래 연구 시 진행 건으로 신성을, 연구 시 사연 건으로 불신탐욕우를 명시했으며, 이보다 2개월 늦게 발간된 수양연구요론에는 연구의 진행조건과 연구의 사연조건이라는 별도의 장을 두어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4 연구의 진행조건 신 분 의 성, ‘이라 하난 것은 선악간 마음을 정한다 하니 신의 결과를 연구할 사, ‘이라 하난 것은 선악 간 마음을 일어내어 모든 일을 권면한다 하니 분의 결과를 연구할 사, ‘의심이라 하난 것은 무식의 주인이니 의심이 나고 보면 즉시에 알아보라 했으니 의심의 결과를 연구할 사, ‘정성이라 하난 것은 일을 일우난 땅에 간단이 업난 마음이니 정성의 결과를 연구할 사. 5 연구의 사연조건 불신 탐욕 나 우, ‘불신이라 하난 것은 무삼 일이든지 입지(立志)못한 가온데 불신이 되나니 불신의 본말을 연구할 사, ‘탐욕이라 하난 것은 무삼 일이든지 과하고 보면 탐욕이라 하나니 탐욕의 본말을 연구할 사, ‘라 하난 것은 무삼 일이든지 일우난 땅에 일을 만집(挽執)하난 것이 나가 되나니 나의 본말을 연구할 사, ‘라 하난 것은 사람 망하난 바탕이니 우의 본말을 연구할 사.”

이상의 내용을 보면 수행을 함에 있어서 무조건 적공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순서를 따라 적절한 방법을 써야 하며, 그러한 방법이 왜 타당한가를 연구하도록 한 점에서 매우 사실적이고 합리적인 수행법으로 팔조를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성에 대해서는 행한 결과를 연구하여 그 필요성을 깨달아 더욱 정진하게 하고, 불신탐욕우에 대해서는 그 본말을 연구하도록 하여 제거해야할 필요성을 깨달아서 다른 사람의 지도 권면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의지를 발하여 취하고 버리는 자력 수행을 하게 한 것이다.

1932(원기17)에 불법연구회의 정식 교서로 보경육대요령이 발간되었다. 보경(寶經)이라는 수식어는 보배로운 경전이라는 의미이며, 육대요령이란 경의 내용이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팔조 교리는 보경육대요령의 제2공부의 요도 삼강령 팔조목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은 수양연구요론에서 그 의미를 연구할 사라고 기술한 것과 달리 각 조목의 개념을 명확히 정의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현행 정전과 같은 것으로 보아 이 때 소태산에 의해 완정된 교리라고 할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진행조건, : 신이라 함은 믿음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 마음을 정하는 원동력이요, : 분이라 함은 용장한 전진심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 권면하고 촉진하는 원동력이요, : 의라 함은 일과 이치에 모르는 것을 발견하여 알고자 함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 모르는 것을 알아내는 원동력이요, : 성이라 함은 간단없는 마음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 그 목적을 달하게 하는 원동력이니라. 사연조건, 불신: 불신이라 함은 신의 반대로 믿지 아니함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 결단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이요, 탐욕: 탐욕이라 함은 모든 일을 상도에 벗어나서 과히 취함을 이름이요, : 나라 함은 만사를 이루려 할 때 하기 싫어함을 이름이요, : 우라 함은 대소유무와 시비이해를 전연 알지 못하고 자행자지함을 이름이니라.”

여기에 덧붙여서 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 관계를 첨가하여 중심교리의 상호관계를 밝히고 있다. 인생의 요도는 공부의 요도가 아니면 사람이 능히 그 길을 밟지 못할 것이요, 공부의 요도는 인생의 요도가 아니면 사람이 능히 그 공부의 효력을 다 발휘하지 못할지니, 이에 다시 한 예를 들어 그 관계를 말한다면 공부의 요도는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의술과 같고 인생의 요도는 환자를 치료하는 약재와 같나니라고 했다. 보경육대요령의 발행으로 완정된 기본교리는 후에 이들 교리의 실천 방법론이 첨가되어 1943(원기43)에 소태산이 직접 감수하여 불교정전이 발행되었고, 1962(원기47)에 일제 치하에서 부득이 삽입했던 내용의 일부를 수정하여 현행 원불교교전이 발행되었는데, 팔조를 비롯한 기본교리의 내용은 그대로 수록되었다.

[전통 종교사상의 수용과 팔조]

소태산은 대각을 이룬 후 자신의 깨달은 경지를 알아보기 위해 전통 종교들의 여러 경전을 열람했다. 따라서 소태산이 제정한 기본교리에 이들 전통 종교의 사상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팔조 교리는 특히 불교의 선요(禪要)가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원나라 고봉(高峰)선사가 지은 선요에 참선하는 데 있어 세 가지가 요긴하다고 하면서 대신근(大信根)대분지(大憤志)대의정(大疑情)을 참선의 삼요(三要)로 들고 있다. 팔조는 여기에 성()을 더하여 진행사조로 삼았다. ()은 유교에서 중시하는 덕목이지만 팔조에서의 의미는 신의를 행함에 있어 간단없이 정성스럽게 지속해야한다는 의미로 사실상 삼요에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원불교 경전이 발간되기 전에 참고 교재로 사용했던 수심정경(修心正經)명입문요법(明入門要法)에 의하면 선요삼요를 들어 해석하기를 의심은 신으로 체를 삼나니 신이 십분(十分) 있으면 의심이 십분 있어서 깨달음이 십분 있게 하니 이 말은 곧 정정(定靜)을 얻는데 요긴한 법이라, 어찌 그런가 하면 큰 원이 없으면 지극한 정성이 나지 아니하고, 큰 신심이 아니면 참 의심이 나지 아니 하나니라. 어떠한 원을 세워야 신과 분과 의와 성이 나오리까. 말하기를 천하에 지극히 오묘하고 지극히 보배롭고 지극히 성스럽고 높은 법이 오직 하나인 영보진국(靈寶眞局)이라, 영보국(=自性)은 사람마다 각각 몸 안에 타고난 성질을 가지고 있어 하늘이 그대로 명함이니 곧 나의본래 성품이라고 했다.

이어서 큰 분심을 내면 일만 이치가 나에게 갖추어 있고 일만 법이 이에 갖추어 있으니 오직 하나이거늘 도가 어찌 문이 많으며, 법이 어찌 길이 많으며, 오직 하나이거늘 사람들이 어찌 많이 구할 것이며, 오직 하나이거늘 내가 어찌 다시 의심하리요. 생각한즉 의심이 없고 바란즉 의심이 있나니 의심하여 가고 의심하여 옴에 의심하고 의심할 바가 없거늘 어찌 의심하리오. 홀연히 의심함을 태워버린 이것이 참 의심이라”.

참 의심아래 일만 의심이 적정하면 주야를 분별치 못함이 꿈도 같고 참도 같아서 공적한 천지에 오직 한 의심뿐이니 이것이 큰 의심이 아니고 무엇이리요. 대개 의심의 의()자의 공부는 가장 알아 얻기가 어려울 것이니 만일 큰 믿음이 아니면 이 의심이 나지 아니할 것이라. 그러므로 선요에 말하기를 신이 십분 있으면 깨달음이 십분 있다 하니 이를 가리켜 이름이니라. 신을 가히 신할 것이며 정성을 가히 정성할 것이니 신으로서 정정하면 신과 분과 의를 얻을 것이니 큰 신심이 아니면 그 신심이 어찌 장구하리요. 한 가지 정()해서 변치 아니하며 시종이 여일함을 이에 성()이라 이르느니라.”

성이 지극하면 팔만 사천 마군, 곧 어떠한 외경에라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되는데 그렇지 못하고 보면 외경에 매어 마음이 흔들리게 된다. 그러므로 무심함 곧 잡념을 끊어서 분별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이상의 내용을 보면 큰 원을 세워야 큰 분발심이 나고, 큰 분발심이 나면 하나의 큰 도를 구하는 데 매진하게 되어 달리 작은 의심을 발하지 않을 것이며, 작은 의심을 모두 제거한 상태에서 비로소 큰 원을 성취할 참 의심이 난다고 하여 참된 의심의 의미를 분명히 했다. 그리고 큰 신심과 큰 분발심, 큰 의심을 시종일관하게 지속하는 것이 성이라 하여 신성의 관계를 적실하게 밝히고 있다.

사연(捨捐) 조건인 불신탐욕우에 대해서도 수심정경은 참 도를 보배에 비유하여 그 보배를 잘 지켜 활용하기 위해 보배를 쌓아 놓은 영보국에 탐욕자, , 우자와 불신하는 자가 와서 이르면 곧 너희는 각각 지켜서 막고 어떠한 사람이든지 정성스럽고 믿음이 진일한 자가 와서 이르면 곧 문을 열어 들여서 빈집의 주인을 삼아 무궁한 재보를 사용토록 하라고 하여 수행을 하는 데 버리고 막아야할 조건을 명시했다. 수심정경이 원불교 초기 교단 시절에 활용되었던 점과 그 내용이 거의 일치한 점에 비추어 팔조 교리는 그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팔조의 내용]

팔조는 삼학 수행을 추진시키는 교리이다. 이를 비유하자면 삼학이 수행자가 나아갈 바 수레이고 길이라면 팔조는 그 길 위에 수레가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동력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팔조는 삼학을 공부하는 데 있어 한편으로는 공부의 순서이고 또 한편으로는 공부를 촉진하는 요법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소태산은 처음 발심한 사람이 일시적 독공으로 큰 이치를 깨닫고자 하는 욕심을 내기 쉽다고 지적하고 특히 중하근기는 오랜 시일을 두고 노력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 순서로 큰 원이 있은 뒤에 큰 신이 나고, 큰 신이 난 뒤에 큰 분이 나고, 큰 분이 난 뒤에 큰 의심이 나고, 큰 의심이 있은 뒤에 큰 깨달음이 있으며, 깨달아 아는 것도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천통 만통이 있나니라”(대종경수행품43).

요약하면 대원(大願)대신(大信)대분(大忿)대의(大疑)대성(大誠)대각(大覺)의 순서를 밟아 큰 도를 이루게 된다는 수행 적공의 순서를 밝힌 것으로 이는 수심정경에서 언급한 내용과 일치한다. 정산종사도 이와 같은 내용의 글을 제자에게 주어 공부 길을 잡도록 가르치고 있는데, 소태산이 간략하게 적공의 순서를 언급했음에 비해 정산은 각 개념의 의미를 좀더 상세히 설명한 점이 다르다.

큰 원을 발하라. ()를 경영하고 저만 이롭게 함은 이슬 같고 연기 같나니, 부처되어 중생 건지려 함이 모든 원의 머리니라. 큰 믿음을 세우라, 묘함이 다른 묘함이 없고 보배가 다른 보배가 없으며 철주의 중심이요 석벽의 외면이니라. 큰 분을 일으키라. 이익을 한 근원에 끊으면 그 공이 백배요, 세 번 주야를 반복하면 그 공이 만 배라 했나니라. 큰 의심을 품으라. 큰 믿음 아래 큰 의심이 있나니, 일심 이르는 곳에 금석도 뚫리리라. 큰 정성을 행하라. 진실 되어 거짓이 없으면 안과 밖이 둘이 아니요, 시종이 한결같으면 천지로 공이 같으리라. 일원대도 운전하여 무량중생 제도하고 영겁 고를 해탈하라”(정산종사법어응기편6).

이와 같은 팔조의 의미와 성격에 비추어 볼 때 팔조 중 진행사조는 삼학 수행의 보조과목에 한정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독립적인 수행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사연사조도 부분적으로는 진행사조에 배대하여 연관성을 가지지만 역시 수행을 하는 데 있어 금기조건으로 독립성을 가졌다. 그러나 원불교 교리의 체계상에서는 근원적 진리인 일원상 진리를 최고 종지로 모시는 가운데 삼학과 함께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뒷받침하는 수행의 과목이며, 동시에 인생의 요도인 사은에 대한 보은과 사요 이념의 적극적 실현을 이끌어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한편 팔조는 수행자가 견지해야 할 구체적인 요목에 해당하는 솔성요론, 계문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솔성요론은 수행자에게 권장하는 요목이며, 계문은 금기하고 억제할 요목이다. 이처럼 개연적인 성격만 보더라도 진행사조는 솔성요론과 관계된 것이며, 사연사조는 계문과 관계된다. 특히 팔조는 수행자의 공부를 촉진시키는 진행사조와 공부에 방해되는 요소를 제거하도록 한 사연사조, 곧 공부하는 데 있어서 성공의 조건과 실패의 조건을 함께 설치하여 빈틈없는 공부 길을 열어놓았다는 점이 독특하다.

[윤리 규범적 성격]

팔조를 윤리 규범적 성격으로 응용해 볼 수 있다. 팔조는 원불교 신앙과 수행에 관한 교리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팔조 자체의 독자적 성격으로 보면 윤리 규범적인 요소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진행사조인 신성은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다움을 실현해야 할 인간의 의무를 수행하는 기본 덕목이다. 진행사조 각 항목마다 만사를 이루려할 때라는 조건을 붙인 것은 하고자 하는 본능의 욕구와 인간으로서 행해야 할 의무를 망라함과 모든 인간의 행위에 이 조항들이 적용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규범들을 소홀히 한 결과 대단히 우려할만한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팔조를 사회적 윤리 규범으로 해석하여 응용할 필요가 있다.

신의 사회 윤리적 성격: 사회적인 신뢰는 무너진 지 오래며,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믿음을 가질 수 없게 된 병리현상이 만연해 있다. 그 원인으로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겪는 가치관의 혼란, 지도자의 부패와 몰가치에 대한 불신, 경쟁관계인 타인에 대한 적대감 등 여러 가지를 들면서도 대부분 자신에게 원인이 있음을 인정하려들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종교들이 믿음을 강조하는 것도 신앙의 대상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자신을 포함하여 인간과 인간의 일에 대한 믿음을 다지는 길로 연결시켜서 신을 인간의 보편적 덕목으로 정착시켜왔다.

분의 사회 윤리적 성격: 개인과 사회에 있어 발전을 저해하는 무사안일주의를 극복하는 데 매우 적절한 덕목이다. 분발심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각 개인이나 사회, 국가가 현재 처해있는 수준과 상황에 관계없이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분발하자는 것이 분이다. 따라서 분은 물량적 성과를 거두려는 목적만을 가진 개념이 아니라 삶에 활력을 얻게 하자는데 의미를 둔 가치 개념이며. 가시적인 성과는 삶의 활력에 의해 얻어진 부수적 결과인 것이다.

의의 사회 윤리적 성격: 의를 타인에 대한 의심, 즉 불신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의는 항상 깨어있는 의식을 가지라는 덕목이다. 위대한 분들의 업적은 모두 평범한 일조차 의심을 일으켜 궁구한 결과물이다. 미지와 신비의 베일을 벗기고 오늘날의 문명을 창조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일상생활에서 얻은 작은 의심을 소홀히 하지 않고 궁글려서 마침내 의심을 풀어낸 의지의 소유자였다. 위대한 발견과 발명, 또는 위대한 깨달음이 의심에서 비롯되었음에 비추어 항상 깨어있는 의식으로 삶의 현장을 끝없는 학습장 삼게 하는 성장지향의 덕목이 의이다.

성의 사회 윤리적 성격: 성은 앞서의 세 덕목들을 지속하게 하는 수단적 성격과, 정성 자체가 독립적으로 인간의 도리가 되는 성격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독립적 성격은 성과 반대되는 태도, 곧 불성실, 중도포기, 성의 없음 등의 태도를 부도덕하게 보는 관점에서 드러난다. 물론 그러한 태도가 법적 제재를 받을 만큼의 악덕은 아니지만 소중한 생명을 부여받은 인간으로서 모든 일을 정성스럽게 행해야한다는 것은 당위적인 인간의 도덕률이다.

사연사조인 불신탐욕우는 진행사조를 힘써 행할 때 극복될 수 있는 보조 과목이지만, 각 항목들이 모두 바람직한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 데 방해됨은 물론이고, 사회 윤리적으로도 해악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역시 보편적 규범이 된다.(원불교대사전)

진행사조[進行四條]

삼학 수행을 잘 할 수 있도록 촉진시키는 네 가지 조목으로 신성을 말하며, 사연사조와 더불어 공부의 요도인 팔조(八條)에 속한다. 각 항목들의 용어 쓰임새를 여러 가지로 고찰할 수 있지만 삼학 수행과 관련지어 보면, ()은 진리와 스승과 교법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수행정진하려는 마음을 확고히 하는 것, (忿)은 삼학 수행으로 반드시 삼대력을 얻겠다는 분발심을 일으켜 수행을 촉진하는 것, ()는 대소유무의 이치와 시비이해의 일에 대해 모르는 것을 깨치려는 강한 의지, 성은 삼학을 수행하는 데 게으르지 않는 정성심을 말한다. 이 네 조목은 삼학의 보조과목이지만 반드시 실행해야할 조항이라 해서 진행사조라 했으며, 그 중요성 때문에 원불교의 기본교리로 자리 잡게 되었다.(원불교대사전)

[]

믿음성이 있고 성실함. 오상(五常)의 하나. 신 중 한 가지 덕목으로 우정이 두텁고 친구를 속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신은 원래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외면적인 일인데 논어에 와서는 이것이 충이 되어 내면적인 성심의 자각이 되었다. 인간으로서 내적 양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성실함 마음을 의미하며 그에 의하여 거짓 없이 언행하는 것이 신이다. 불교에서는 싼스끄리뜨 슈랏다(śraddhā)쁘라사다(prasāda)아디묵띠(adhimukti) 등의 역어로 삼보에 대한 믿음, 곧 종교적 신앙처에 귀의함 또는 부처의 가르침을 믿음으로서 마음이 맑고 깨끗하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널리 진심의 의미로 쓰인다. 불교의 선요(禪要)에는 참선하는 방법의 세 가지 요긴한 요목으로 대신근(大信根)대분지(大憤志)대의정(大疑情)을 삼요(三要)라 했다 원불교에서는 공부의 요도인 팔조(八條) 중 진행사조의 하나로 신이라 함은 믿음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할 때 마음을 정하는 원동력”(정전팔조)이라고 정의했다. 한편 종교의 기본 요건인 신앙심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여 신앙의 대상을 믿는 마음을 의미하는 신심을 줄인 개념으로도 사용된다.(원불교대사전)

 

[忿]

분심. 분하여 성내는 마음. 불교의 선요(禪要)에 참선하는 방법의 세 가지 요긴한 요목으로 대신근(大信根)대분지(大憤志)대의정(大疑情)을 삼요(三要)라 한 것 중의 하나이다. 원불교에서는 분발심의 줄인 말로 사용하며 공부의 요도 중 진행사조의 하나로 분이란 용장한 전진심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권면하고 촉진하는 원동력이라고 정의했다. 강렬한 의욕을 가진 마음 상태로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실천의지를 가지고 자기만족에 떨어지지 아니하며 나날이 새로워지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정진하는 마음을 놓지 않는 자세를 말한다.

(忿)과 분()은 같은 의미를 가진 글자인데 우리말 사용에 있어서 분()은 분발하여 기운을 낸다는 의미로 쓰이고 분(忿)은 분발하는 마음상태를 묘사하는 의미로 쓰인다. 이 두 글자는 모두 화를 낸다는 분노의 의미로 많이 쓰이기 때문에 종교 수행에 관련된 개념으로는 적절하지 않다고 할 수 있지만 용례상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원불교에서 사용하는 바와 같이 나태와 반대되는 분발심으로 해석한다.(원불교대사전)

[]

의심. 믿지 못하여 이상하게 여기는 생각이나 마음. 불교의 선요(禪要)에 참선하는 방법의 세 가지 요긴한 요목으로 대신근(大信根)대분지(大憤志)대의정(大疑情)을 삼요(三要)라 한 것 중의 하나이다. 원불교에서는 공부의 요도인 팔조(八條) 중 진행사조의 하나로 일과 이치간에 모르는 것을 발견하여 알고자 함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할 때에 모르는 것을 알아내는 원동력이라고 정의했다.

우주의 성주괴공과 만물의 생로병사와 같은 근원적 존재의 원리를 비롯하여 현실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알고자하는 강렬한 욕구를 가진 마음 상태를 말한다. 큰 신심과 서원을 세우고 불조의 화두나 경전 또는 생활하는 가운데 걸리는 것이 있으면 이를 끊임없이 연마하여 사리간에 걸림이 없는 깨달음을 얻게 하는 원동력으로 앎을 사랑하는 마음자세 곧 깨어 있는 의식을 갖도록 촉구하는 수행 요목이다.(원불교대사전)

[]

성실, 성심, 거짓 없고 정성스러운 마음. 원불교에서는 공부의 요도인 팔조(八條) 중 진행사조의 하나로 성이란 간단없는 마음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 그 목적을 달하는 원동력이라고 정의했다. 중용(中庸)에 성이란 하늘의 도요 정성하는 것은 사람의 도라 했으며, 이를 풀이하여 성은 진실무망(眞實無妄)한 것을 이름이니 천리(天理)의 본연이요 정성스럽게 하는 것은 진실무망하게 하고자 하는 것을 이름이니 이는 사람이 당연히 해야할 바라고 했으며, 대학(大學)에서는 팔조목의 하나로 학문하는 격물(格物)과 사변하는 치지(致知)에 모두 의성(疑誠)이 필요하다라고 했다.

일을 할 때 정성이 나지 않는 이유는 그 일과 나의 원() 사이의 관계를 철저히 모르기 때문이며, 종교 수행에 정성이 부족한 것은 서원이 크지 못하고 신심이 깊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은 해태심이 나면 채찍질하여 쉼 없이 공을 쌓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며, 천지팔도(天地八道) 중에 지극히 정성한 도를 체받는 공부로서 천리의 원칙인 이소성대(以小成大)의 이치를 따라 지성불식(至誠不息) 하라는 수행의 요목이다.(원불교대사전)

사연사조[捨捐四條]

삼학 수행을 해나가는 데 방해가 되므로 반드시 버려야할 네 가지 조목으로 불신탐욕우를 말하며, 진행사조와 더불어 공부의 요도인 팔조(八條)에 속한다. 각 항목들의 용어 쓰임새를 여러 가지로 고찰할 수 있지만 삼학 수행과 관련지어 보면, 불신(不信)은 신의 반대로 수행정진하려는 마음을 정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며, 탐욕은 수행을 할 때 급히 이루려는 욕심을 내는 것을 말하며, ()는 수행에 정진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거나 수행의 성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이 해이해지는 것을 말하며, ()는 수행의 원리와 방법을 잘 알지 못하고 자행자지하는 것을 말한다. 이 네 조목은 삼학의 보조과목이지만 반드시 극복해야 할 것들이기 때문에 사연사조라 했으며, 그 중요성 때문에 원불교의 기본교리로 자리매김했다.(원불교대사전)

불신[不信]

믿지 아니함. 사람 사이에 서로 믿지 못하는 것 원불교에서는 공부의 요도팔조중 사연사조(捨捐四條)의 하나로 불신이라 함은 신의 반대로 믿지 아니함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결정을 얻지 못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모든 일을 할 때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저울질하고 헤아리는 마음상태이다.

개인적으로는 자만과 아상(我相)에 빠져서 스승이나 동지 등 타인을 믿지 못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폐쇄적 사고에서 비롯되며, 사회적으로는 불신풍조가 만연한 상황에서 인간적 신뢰가 무너져서 피해망상에 젖어 일어나는 마음이다. 종교적으로는 큰 서원과 신성의 추진이 없을 때, 멀리 넓게 보지 못할 때 생긴다. 불신의 마음은 성불의 장벽이 되고 악도에 떨어지는 근본이 된다. 따라서 불신의 원인을 알아 제거하고 굳은 믿음으로 수행에 정진하도록 하기 위해 버려야할 조목으로 설정했다.(원불교대사전)

탐욕[貪欲]

사물을 지나치게 탐하는 욕심. 불교의 삼구(三垢) 또는 삼독(三毒)의 하나. 정전공부의 요도인 팔조 중 사연사조(捨捐四條)의 하나로 탐욕이라 함은 모든 일을 상도에 벗어나서 과히 취함이라고 정의했다. 탐욕은 모든 죄악의 근본이 되고 고통의 씨가 되며 요행심과 욕속심을 조장하여 순리를 버리고 역리로 탐하는 바를 얻으려고 하다가 마침내 패가망신(敗家亡身)에 이르고 만다. 인간의 욕구는 무한하지만 실제로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인데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한 욕구를 향해 질주하게 될 때 온갖 불의와 악행을 저지르게 된다.

그러므로 지나친 욕심을 제거하거나 절제하는 노력을 해야 하며, 그 방법으로 자기만의 이익을 추구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이익을 배려하는 공생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공동의 이익 속에 자기의 목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면 극단적 이기주의에 떨어지지 않는다. 소태산은 욕심은 없앨 것이 아니라 도리어 키울 것이니 작은 욕심은 큰 서원으로 돌려 키워서 마음이 거기에 전일하면 작은 욕심은 저절로 잠잘 것이요 그러하면 저절로 한가롭고 넉넉한 생활을 하게 된다”(대종경수행품36)고 하여 공익심으로 탐욕심을 대체하도록 했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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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 느리고 게으름. 하기 싫어 뒤로 미루는 마음. 원불교에서는 공부의 요도인 팔조 중 사연사조(捨捐四條)의 하나로 ()라 함은 만사를 이루려 할 때 하기 싫어함이라고 정의했다. 게으름은 모든 일을 이룰 수 없는 원인이며 결과적으로 육신생활과 정신생활에 가난을 가져다준다. 나태는 인간에게 욕구의 본능과 함께 내재된 안일의 본능에서 비롯하며 모두 소아적 이기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현실적으로는 몸과 마음이 병들었을 때, 하고자 하는 일이 자주 실패할 때,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없거나 목표의식을 상실했을 때 일어난다. 나태를 극복하는 방법은 큰 서원을 세우고 분발심을 일으켜서 소아주의를 대아주의로, 이기심을 이타심으로 바꾸는 마음자세가 중요하다.(원불교대사전)

[]

어리석음. 무명의 업력에 가려서 사리간에 어두운 마음. 원불교에서는 공부의 요도인 팔조 중 사연사조(捨捐四條)의 하나로 우라 함은 대소유무와 시비이해를 전연 알지 못하고 자행자지함”(정전교의품5)이라고 정의했다.

대소유무와 시비이해를 모른다는 것은 모든 존재의 원리와 삶의 구체적인 현상을 통틀어 알아야할 대상으로 보는 관점의 해석이며, 그렇다면 우치함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은 깨달음을 얻은 부처의 경지에서나 가능하기 때문에 중생은 끊임없이 배움을 놓지 말고 사리연구로 지혜를 밝혀야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 모르고 행하면 하는 일마다 실패할 것이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고집하면 다른 사람의 지혜조차 사장시킬 것이고 결국 온갖 죄악을 초래하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무지(無知)의 지()를 강조하여 모르면서 아는 체하며 자행자지하는 것을 경계했다.(원불교대사전)

[진행사조로 나의 모든 일을]

<김현욱 교무/상담학 박사>

새해를 맞아 새로운 일터로 가는 교도님, 인사이동 하는 교무님들께 '안녕들 하십니까'로 안부를 전하고 싶다. 나는 현재 오랜 수학휴무 기간 후에 교역의 현장으로 복직을 준비 중이다. 어떤 곳으로 가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현재 나는 두렵고 불안하다. 그러면 이 마음을 어떻게 공부해야 할까?

원불교교전'공부인으로 하여금 그 공부하는 방향로를 알게 하기 위한' 소태산 대종사님의 워크북이다. 워크북은 활용될 때 그 효용 가치가 드러난다. 나도 이 시절 가장 민감하고 만사인 새로운 근무지에서 잘 살고 싶은 마음을 경전 원문에 대조하며 응용하는 공부를 해본다.

()이라 함은 김현욱의 믿음을 이름이니, 김현욱이 만사(새로운 근무지에서 잘 사는 것)를 이루려 할 때에 김현욱의 마음을 정하는 원동력(原動力)이니라.

(忿)이라 함은 김현욱의 용장한 전진심을 이름이니, 김현욱이 만사(새로운 근무지에서 잘 사는 것)를 하고자 할 때에 김현욱을 권면하고 촉진하는 원동력이니라.

()라 함은 김현욱이 일과 이치(새로운 근무지에서 잘 살게 되는 일과 이치)에 모르는 것을 발견하여 알고자 함을 이름이니, 김현욱이 만사(새로운 근무지에서 잘 사는 것)를 이루려 할 때에 김현욱이 모르는 것을 알아내는 원동력이니라.

()이라 함은 김현욱의 간단없는 마음을 이름이니, 김현욱이 만사(새로운 근무지에서 잘 사는 것)를 이루려 할 때에 그 목적을 달하게 하는 원동력이니라.

요즘 나의 만사가 새로운 근무지에서 잘 사는 것임을 선명하게 알아차리게 된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김현욱 만사인 마음을 따라 '어디로 갈까?' '누구와 살까?''잘 살 수 있을까?' 등 여러 가지 분별성과 주착심의 마음들이 있었다. 과거에 경험과 기억들, 미래에 대한 불안과 설레임들 속에서 내가 뭘 해야 하나, 뭘 어떻게 해볼까 하는 생각과 감정이 춤을 췄다.

문득 현재 나의 만사가 선명하게 알아차려졌다. ', 맞다. 이게 요즘 나의 만사지.' 그리고 진행사조 신분의성으로 대조하면서 이 순간의 마음이 온전히 수용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때그때 각자의 마음에 가장 민감하고, 각자 삶 속에서 만사를 이루려 할 때, 각자의 이름을 넣어서 경전 원문에 대조하고 응용해 보자.

진행사조 4조목을 모두 '원동력이니라' 하신 대종사님의 염원을 용심법 원불교교전에 대조하고 응용하는 법의 훈련으로 '원동력' 삼는 경험을 통해 확인해 보자.

[···성은 신앙인의 표준]

<김원종 교무>

"()이라 함은 믿음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마음을 정하는 원동력이니라."

()은 표준이다. 신앙의 표준이 일원상이며 수행의 표준도 일원상이며 일원상이 견성 성불하는 표준이 되는 것이다. 이 표준은 출발점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삼대력을 얻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으로 믿음이 확고하게 세워져야 한다.

삼대력을 얻는데 방해되는 것이 믿지 않는 것이다. 믿지 않으면 표준이 없어서 우왕좌왕하여 출발 자체가 되지 않는 것이다.

"(忿)이라 함은 용장한 전진심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권면하고 촉진하는 원동력이니라."

분발심은 나도 그 표준대로 하면 된다는, 나도 할 수 있다는, 나도 하겠다는 마음이다.

부처님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다. 나에게도 일원이라는 이름의 성품이 있고 부처님에게도 일원이라는 성품이 있어서 부처님은 성불 하셨는데 나는 중생으로 남아 있을 것인가? 나도 그 표준대로 공부하여 삼대력을 얻어 성불하겠다는 마음이 분(忿)이다.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자고 싶은 것 다 자고도 성불할 수 있겠는가. 분발심으로 욕심을 제거하고 용기를 갖고 출발하여야 할 것이다.

"()라 함은 일과 이치에 모르는 것을 발견하여 알고자 함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모르는 것을 알아내는 원동력이니라."

내가 표준으로 믿고 있는 것을 의심하라는 것이 아니다. 내가 믿고 표준을 삼고 있는 것이 표준대로 잘해나가는지 점검해 보는 것이 의()이다.

어리석음이란 대소유무와 시비이해를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자행자지함을 말하는 것이니 중근기병의 원인이 되는 어리석음을 표준과 대조함을 통해서 그 어리석음을 없애야 할 것이다.

"()이라 함은 간단없는 마음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그 목적을 달하게 하는 원동력이니라."

내가 믿고 있는 그 표준대로 신앙과 수행을 잘하고 있다는 판단이 서면 그 판단대로 꾸준하게 그 일이 성공될 때까지 계속하는 것이 정성이다. 삼대력을 얻는데 방해되는 게으름을 정성심을 통하여 제거하자. 하지 않으면 얻을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큰 원()이 있은 뒤에 큰 신()이 나고, 큰 신이 난 뒤에 큰 분(忿)이 나고, 큰 분이 난 뒤에 큰 의심이 나고, 큰 의심이 있은 뒤에 큰 정성이 나고, 큰 정성이 난 뒤에 큰 깨달음이 있는 것이니 신분의성으로 삼대력을 얻어 보자.

[신분의성 품고 교화 속으로]

<김신근 교무>

참으로 묘한 인연이다. 유년회, 학생회를 다닐 때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교무님!

군 제대 후 대기업에 공채로 들어가면서 내 이 회사에서 미래의 비전을 꿈꾸리라라는 큰 포부를 가지게 되었다. 하루하루 점점 시간이 더해가며, 그 창창했던 비전이 작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무렵 익산교당 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인생을 이렇게도 살 수 있겠구나.’라는 새로운 활력이 찾아왔다. 또한 궁금증도 생기게 되었다. ‘사람이 과연 인생을 살면서 무엇을 알아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궁금증은 내 삶의 대전환을 유도하게 되었다.

그렇다. 빠르게 변화하는 이 세상의 흐름에 분명한 중심이 있어야겠구나.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다름 아닌 진리였다. 그런데 누가 이것을 알려줄 것인가? 이 바쁘게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과연 이것을 누가 알려준단 말인가? 드디어 내가 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결심하고 출가를 단행한다.

이런 결심의 출가동기와 늦깍기의 출가라는 은근한 부담이 늘 나를 챙기고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간사를 마치고 영산선학대 1학년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다짐했다. 교무님이 되는 그날까지 그동안의 나를 완전히 버리고, 새로운 나로 탈바꿈 하겠다는 각오로.

먼저 새벽좌선에 부단한 정성을 들였다. 그 이유는 10여년의 사회생활을 수도인의 기질로 만들어야 했기에 말이다. 정말 남모르는 눈물겨움이었다. 점점 좌선에 자신이 생기고, 여유가 생기면서 교리공부에 전념을 하게 된다.

전체의 교리내용을 파악한 후, 세세한 내용을 확실히 파고드는 방법을 통해 교리공부를 하였다. 그런데 정말 힘들고 어려운 것은 마음공부를 통한 인격의 변화부분이었다. 전생의 습관과 업력! 유무념 등을 통해 개인적 말 또는 행동이나, 대중생활의 취사들을 조금하다보면 어디선가 다가온 그 습관과 업력은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내 마음은 잘하려고 하는데, 왜 안 된단 말인가? 그 현실 앞에 나를 일으켜 준 그것은 바로 출가동기였다.

그렇게 공부를 하여 학업기 6년의 시간이 흘러 얼마전 그 꿈에 그리던 출가식을 하게 되었다. 간사 때 2층에서 선배의 출가식을 보며, 가슴 벅찬 그 출가식을 내가 했단 말인가? 그 어려운 조건에서 잘 적응하며 공부한 내 자신에게 뜨거운 박수와 위로를 하였다.

이제 새로운 저 넓은 교화의 그림을 예측해본다. 과연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말이다. 새부처님 대종사님의 교법을 어떻게 펼칠 것인가 말이다.

분명한 것은 보은자의 역할을 사심없이 다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수학기간 내내 많은 스승님들을 지도와 훈증으로, 이 어리석은 중생의 눈이 뜨이고, 귀가 열리고, 드디어 마음이 열리어 세상을 살아가는 원리를 통해 진리의 소식을 맛보게 되었다.

내가 이렇게 큰 은혜를 입었기에, 나도 내가 받은 이 기쁨을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오롯하게 모두 다 전해야겠다는 다짐을 챙기며, 현장을 그려본다.

[신분의성을 세우자.]

<교정원 문화부>

()을 바로 세우면 분발심이 일어난다. 그리고 큰 의심이 나타나며 정성심이 살아난다. 이때 자연히 불신과 탐욕, 나태와 우치함이 제거된다.

이처럼 신을 깊이 세우는 일이 일체 어두운 마음을 밝히는데 대단히 소중하다. 여기서 신이란 무엇을 믿는다는 것일까. 우리 앞에 어떤 믿음을 세워야 하는가. 공부인에게 있어 이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수행문에 있어서 신은 내가 바로 부처임을 믿는 것이다. 나는 온전한 일원의 표현이며 법신의 화현이다. 내가 그대로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존재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묵은 분별심이 발동하여 자신을 못난 중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자신은 부족하고 문제가 많으며 무가치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스스로를 부정하고 불신할 때 분발심이 일어날 수 없다. 그러면 탐욕이 일어나고 진리에 대한 의심이 생기지 않는다. 우치한 마음 때문에 정성심이 살아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위대한 존재다. 나는 존귀한 부처이다. 나의 참 가치는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다. 이를 조용히 인정해보자. 처음에는 심한 반발심이 일어날 것이다. 그럴 수 없다는 자기부정의 입장을 합리화하는 생각들이 솟아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자신을 깊이 존경하고 사랑해보자. 그러면 어느덧 저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힘이 솟아날 것이다. 자신감이 일어나고 나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에 기쁨이 차오를 것이다.

오늘날 유전자 과학에서 밝힌 바로는 인간의 세포 하나에는 35억년의 정보가 담겨있다고 한다.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수많은 세상을 끊임없이 성장하며 살아온 위대한 영혼인 것이다.

나의 존재는 이처럼 무한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어서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부모를 선택하고 그외 유익한 환경을 선택하여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고 있다. 때문에 삶의 모든 것이 나의 바람이고 나의 뜻 아닌 것이 없다.

대종사님께서는 나의 조물주는 나(대종경 변의품9)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피조물이 아니고 이 몸과 세상을 선택하고 창조하는 주체이다. 나는 나의 삶을 오롯이 책임지는 자이며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외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실을 거부하고, 불신할 때 나는 어리석은 분별에 빠지게 된다.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 나에게 있음에도 그것이 바깥에 있다고 주장한다. 현실적으로 나에게 불이익을 주고 나를 괴롭히고 무시하는 인연과 여건들이 나에게는 나쁜 것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조물주로서의 나는 내 앞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내 성장에 꼭 필요한 것이며 나를 위한 좋은 선물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무한능력을 지닌 내 앞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삶에서 어느 것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이것이 바로 일체가 부처라는 처처불상의 소식을 듣고, 일마다 불공하며 낙원세상을 수용하는 길이 될 것이다. 지금 여기가 부처가 사는 살기좋은 극락임을 잊지말자.

[믿음은 약속으로 나타난다.]

<이성은 교무/충북교구장>

믿음은 마음을 결정하는 바탕

신분의 성은 삼대력을 촉진

일상수행의 요법 제4조 신과 분과 의와 성으로써 불신과 탐욕과 나와 우를 제거하자는 공부의 요도 삼학 팔조 가운데 팔조 공부에 해당한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다 보면 그 일을 성공으로 이끄는 요인과 또 일의 추진을 저해하는 요소가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삼대력을 양성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삼대력 양성을 적극적으로 촉진시키는 요소가 있는가 하면 이를 지연시키고 마침내 삼대력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요소가 있다.

신분의성은 삼대력 양성을 촉진시키는 요인이다. 그런 뜻에서 신분의성을 진행사조라고 한다. 불신탐욕나우는 삼대력 양성을 저해할 뿐 아니라 삼대력에 대한 관심 자체를 말살시킨다. 그래서 버려야 할 요인이므로 사연사조라고 한다. 진행사조와 사연사조를 합쳐 팔조라고 한다.

신이란 믿음이다. 믿음은 믿는 마음을 말하는데 대종사께서는 이 믿음을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마음을 정하는 원동력이라고 하셨다. 어떤 운동을 일으키는 근원이 되는 힘이 원동력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모든 일을 할 때에 마음을 결정하게 하는 가장 바탕이 되는 힘인 것이다.

만일 믿음이 없다면 일을 하려는 바탕이 되어 있지 아니하므로 우리는 아무 일도 이루어 낼 수 없게 된다. 믿음은 그렇게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이 믿음은 행동상으로는 약속을 지키는 행위로 나타나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어떠한 일을 하겠다는 마음이 결정되었다면 그것은 나와 그 어떠한 일과 어떻게 하겠다는 약속이 성립된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음이란 실천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 나와 특정한 대상과의 약속을 지키는 행위라고 풀이 할 수 있다. 이러한 약속행위는 대상에 따라 대체로 다음의 세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나에 대한 나의 약속 행위이다. 이를 우리는 보통 신념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약속행위를 잘 이행하는 사람을 신념이 강하다고 한다.

둘째는 너에 대한 나의 약속행위이다. 이를 우리는 신의라고 한다. 약속 상대에 대하여 어김없이 약속을 지키는 사람을 신의가 분명한 사람이라고 한다.

셋째는 진리에 대한 나의 약속행위이다. 이를 신앙이라고 말하고 싶다. 따라서 신앙이란 진리와의 약속이행 행위로 나타난다고 하겠다.

믿음은 이처럼 약속의 대상에 따라 신념, 신의, 신앙이라는 체계를 이룬다. 이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제일 어려운 믿음은 신앙이다.

약속은 지켜질 때에 의미를 갖는다. 약속을 잘 지키려면 약속을 할 때에 약속이 내용이 무엇인가를 확인해야 한다. 약속의 내용을 모르고서는 약속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신념이나 신의에 있어서는 약속의 내용이 약속할 당사자들에 의하여 조정이 되어진다. 약속의 내용이 서로 합의할 수 없는 것이라면 약속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신앙은 그렇지 않다. 진리와 나와 한 약속의 내용을 조정할 수가 없다. 진리의 뜻을 오로지 일방적이다. 진리의 뜻에 따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의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때문에 믿음 가운데 신앙이 가장 강렬하고 제일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만일 신앙의 싹이 터오른다면 그 힘으로 신의도 신념도 강해질 것이다.

한번 한 약속은 조건 없이 지켜져야 약속의 의미가 살아나듯이 믿음도 변하지 않을 때에 빛이 나는 것이다. 열 사람의 법을 응하여 제일 좋은 법을 믿으라는 대종사님의 말씀은 믿음의 소중함에 대한 크나큰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사연사조는 마음 바이러스이다.]

<이성은 교무/충북교구장>

도가의 공부 신분의성과 관계 있어

처음부터 맹렬한 공부심, 주의 필요

은 정성스러움이다. 대종사께서는 성에 대하여 간단없는 마음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그 목적을 달하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하셨다.

목적을 달하게 한다는 말은 일의 완성을 의미한다. 한번 시작한 일의 끝맺음이 완성이요, 바로 목적의 달성이다. 그러므로 성은 새로운 탄생의 뜻을 포함한다. 학자가 연구 결과에 대한 논문을 완성하면 그것은 논문의 탄생을 의미하여 기술자가 새로운 기계를 하나 제작하여 완성하면 그 기계의 탄생이 되는 것이다.

공자님의 성이 아니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도 우리 생활에 정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표현해 주신 것이다.

은 또 모심의 뜻도 있다 우리가 꾸준히 정성을 다한다는 것은 모심이 아니고는 할 nt 없는 일이다. 건물을 잘 관리하는 일, 농작물을 잘 보살피는 일 등 모두가 그 바탕에 모시는 마음이 들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결국 성은 지속적인 모심을 통하여 새로운 태어남을 이루게 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대종사께서는 도가의 공부(마음공부)는 원래 재질의 유무나 시일의 길고 짧음에 큰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신과 분과 의와 성으로써 정진하고 못 하는데에 관계가 있나니 누구나 신분의성만 지극하면 공부의 성취는 날을 기약하고 가히 얻을 수 있다고 하셨다.

신분의성이야말로 우리가 목표로 하는 바를 성공의 길로 이끌어 주는 나침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분의성의 반대는 사연사조인 불신, 탐욕, , 우이다.

불신이란 믿지 아니함이다.

믿지 않기 때문에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결정을 얻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는 신의 반대가 된다. 믿음이 확고하지 않으면 유혹을 받기 쉽고 결국 불신으로 빠지게 된다.

탐욕은 모든 일에 있어서 과도하게 취함을 말한다. 과하기 때문에 자신이나 주위에 대하여 피해를 끼치게 된다. 마음 공부에 있어서도 분이 지나치면 탐욕이 되기 쉽다. 그것은 편벽된 수행에 떨어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는 게으름이다.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하기 싫어함이 게으름이다. 우리가 일상성에 빠지는 것은 게으름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일상성이 게으름을 키우기도 한다. 마음공부에 있어서는 빨리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나에 빠지게도 한다. 처음에는 대단한 기세로 정진에 들어갔으나 공부되어짐을 느끼지 못하면 실망을 느끼면서 점점 게으르게 된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맹렬한 공부심은 스스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

는 어리석음이다. 대소유무의 이치와 시비이해에 디하여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 우이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제 멋대로 행동()하게 된다. 그리하여 성현들이 가르침을 가벼이 여기며 마음공부에 대하여도 자기 주견만을 고집하는 행위를 하게 된다.

한마디로 마음 공부에 대한 어른을 모시지 않는 것이 우이다.

불신탐욕나우는 모든 공부와 일을 그르치는 바이러스들이다.

바이러스는 호시탐탐 침범할 틈을 노린다. 이 바이러스들의 확실한 예방과 퇴치는 신분의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에 수행인들은 확신을 가져야 할 것이다.

[신과 분과 의와 성으로서 불신과 탐욕과 나와 우를 제거하자.]

<김의선 교무/김제교당>

일상수행의 요법 4조는 정전 제2조 교의편 수행문의 삼학에 따른 진행 4조의 신· · · 성과 사연 4조 불신· 탐욕· · 우이니 이를 총괄하여 8조를 수행편의 조항으로 편입, 교강으로 밝히고 생활을 통해 실천토록 한 것이다.

· · · 성을 진행 사조로 밝혀주신 것은 삼학공부에 협조가 되니 추어 잡으라는 가르치심이다. 수행자로서 성불하는 데 원동력이 될 뿐 아니라 크고 작은 모든 일에 목적달성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진행 4조는 추어잡지 않아도 일의 성사에는 필연적으로 작용되어 일이 이루어지는 마음작용이니 큰일을 성취하고 더욱 이 성불하여 제중하겠다는 서원에는 의도적으로 사조의 조항을 통해 마음을 챙겨 삼학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다.

불신· 탐욕· · 우를 사연사조로 밝혀주심에는 삼학공부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성불과 모든 일에 장애가 되는 마음으로 과거로부터 모든 일에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불신· 탐욕· · 우가 들어서 성취를 못한 것이다. 그러니 큰일을 이루려 하고 성불제중의 서원자는 이러한 마음을 살펴 공부 삼아 제거하고 삼학공부가 잘 되어 삼대력 얻고 성불을 하게 하심이니 총괄적인 8조를 받들어 실천해야 한다.

8조란 우리가 일을 하려 할 때 자성으로부터 일어나는 8가지 불변심이니 이 여러 가지 마음들이 들어서 일을 성공도 시키고 그르치게도 하는 조화 있는 마음작용이다.

()= 믿음이니 만사를 이루려할 때 마음을 정하는 원동력이다. 일에는 먼저 마음을 정(결정)해야 시작이 되고 시작이 있음으로서 성공이 있나니 그 정하는 마음이 신인 것으로 정법(正法)과 정사(正師)를 믿는 정신(正信)이 있고, 요행이나 사도를 믿는 미신이 있나니 미신은 모든 일에 성공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정신의 표준을 교전 대의에서는 진리· · 스승· 교단의 사대불이신(四大不二信)으로 밝혀 주셨다. 삼학공부만이 성불할 수 있다고 믿어 삼학공부를 실천하는 생활이 되어야 할 것이다.

(忿)= 용장한 전진심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할 때 권면하고 촉진하는 원동력이 된다.

정당한 일에 굳은 결심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는 용감한 정념(正念)이 있고 부당한 일에 덤벼드는 일시적 혈기의 용맹인 객분(客忿)이 있다. 우리는 성불의 서원이 서지 않거나 삼학공부 하는 중에 실망이 있을 지라도 하면 된다는 분심을 가져 끝까지 밀로 나가는 실천이 있어야 한다.

()= 일과 이치에 모르는 것을 발견하여 알고자 함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 모르는 것을 알아내는 원동력이다. 정당한 일을 믿지 않거나 스승과 법을 저울질 하는 사의(邪疑)가 있고 진리· · 스승에게 그 마음을 정하고 깊이 그 내용을 알고자 하는 정의가 있나니, 우리는 의심을 가져 까닭 있는 삼학공부를 해야 하다. 만일 까닭 없는 삼학공부를 하면 요령 없는 공부가 되어 성불의 성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리 간에 의심을 가져 궁글리고 의단을 이루는 까닭 있는 공부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

()= 간단없는 마음으로 만사를 이루고자할 때에 그 목적을 달성하는 원동력이 된다. 부당한 일에 무모하게 바치는 우성(愚誠)이 아니라 정당한 일에 정당한 방법으로 한결같이 계속하는 정성이어야 한다. 비록 서원과 믿음과 분심과 의심이 있었다 해도 그것이 일시적일 때 는 큰일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성불할 때까지 정성(正誠)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불신(不信)= 신의 반대로 믿지 않음이니 만사를 이루려할 때 결정을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 진리를 믿지 않는 고로 깨달음을 얻지 못하며 삼학공부의 필요성을 믿지 않으니 공부를 하지 않을 것이요, 하지 않으면 성공 또한 할 수 없는 것이다.

탐욕= 모든 일을 상도에서 벗어나 과하게 취하려는 마음이니 무엇이나 지나친 욕심을 부리는 것이다. 우리가 삼학공부를 하는데 있어서도 너무 빨리 하려는 마음인 것으로 이 마음이 오히려 일의 성사에 장애가 되는 것이다.

()= 만사를 이루려 할 때 하기 싫어하는 마음이며 뒤로 미루는 마음이며 하면서도 게을리 하는 마음이다. 그러니 삼학공부에 있어서도 하기 싫어하고 뒤로 미루며 하면서도 게으름을 부리나니 일에 장애가 되는 것이다.

()= 대소유무와 시비이해의 진리를 전혀 모르므로 자행자지하는 마음 즉 어리석고 미련한 마음이니 삼학공부의 필요에 대하여도 전혀 모르는 마음으로 장애가 된다.

이상 8조를 가지고 삼학공부를 할 때 신분의성의 진행 사조만 튼튼히 잡고 나가면 불신, 탐욕, , 우의 사조는 스스로 물러나는 거시오, 또한 불신, 탐욕, , 우의 사조만 잘 살펴 제거하면 신, , , 성 사조는 원만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일원의 위력을 얻고 일원의 체성에 합하고자 하는 성불제중의 서원자이기에 반드시 삼학공부를 하여갈 때 일상생활을 통하여 신· · · 성을 추어 잡아 공부할지언정, 불신, 탐욕, , 우에 조금이라도 끌려가는 생활이 없도록 하는 실천이 있어야 한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