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품(性理品) 31장
대종경(大宗經)
제7 성리품(性理品) 31장
원기 이십육년 일월에 대종사 게송(偈頌)을 내리신 후 말씀하시기를 [유(有)는 변하는 자리요 무(無)는 불변하는 자리나, 유라고도 할 수 없고 무라고도 할 수 없는 자리가 이 자리며, 돌고 돈다, 지극하다 하였으나 이도 또한 가르치기 위하여 강연히 표현한 말에 불과하나니, 구공이다, 구족하다를 논할 여지가 어디 있으리요. 이 자리가 곧 성품의 진체이니 사량으로 이 자리를 알아내려고 말고 관조로써 이 자리를 깨쳐 얻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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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는 무로 무는 유로]
<정현인 교무/원광대 원불교학과 교수>
원기 26년(1941) 1월에 대종사는 “유는 무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 지극하면 유와 무가 구공이나 구공 역시 구족이라”는 게송을 내리고 부촉하셨다.
“임종에서가 아닌 미리, 소수가 아닌 모두에게 전하니 각기 정진하여 후일에 유감이 없게 하라”(부촉품 2장)고 덧붙였다.
게송은 소태산 생애의 정점에서 설해졌다는 점에서 진리적인 구극성이 있다.
또한 교리를 가장 압축된 의미와 상징으로 축약했다는 점에서 고농축의 상징성이 있다.
그리고 존재의 실상을 운율에 바탕한 노래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보편적 대중성이 있다.
대종사의 게송은 일원상진리에 대한 인식의 패러다임이면서 현실대응의 원리로 원용될 수 있다.
한편 원불교적 논리인 동시에 사관(史觀)으로 파악될 수도 있다.
“유는 변하는 자리요 무는 불변하는 자리”이다. <일원상 서원문>에서는 변과 불변을 무상과 유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자리”란 “입장” 또는 “시각”을 말한다. 즉 주체적 자각에서 포착되는 진리의 모습이라 하여 좋을 것이다.
게송에서 진리인식의 제 1단계는 유무변환(有無變換)의 단계이다. “돌고 돌아”는 유무변환이라는 뜻이며, 이러한 유무변환의 동적 양태가 영원하다는 의미와, 주고받는 인과보응의 진리가 끊임없이 유행된다는 의미까지 포함되어 있다고 보인다.
그런데 이 차원에 머물러 있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 속성상 사상(事象)이 변화하면 변화하는 것에 집착하고, 변화하지 않으면 변화하지 않는 것에 집착하여 사바세계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서 제 2단계인 일체개공(一切皆空)의 단계 즉 “구공(俱空)”으로 도약이 필요하다. “지극하면”은 새로운 차원에로 도약하는 계기적 전환점이다. 그것은 바로 깨침이다.
범부의 일상적 안목에서 부처의 초월적 안목으로, 무명의 어두움에서 깨침의 광명으로 전환함이다. 그러나 깨침의 눈부신 광명에 진입한 수도인은 온통 사라짐만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구공의 소식이다.
이제 제 3의 일체개진(一切皆眞) 즉 “구족(具足)”의 단계로 또 한 차례의 도약이 요청된다.
그러나 도약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단계를 설정하기는 했으나 이는 논리적 전환일 따름이다. 사실 철저한 구공은 그 자체가 바로 구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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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공이니 구족이라]
30년 동안 열정을 변치 않을 자 그 누구인가?
<정현인 교무/원광대 원불교학과 교수>
게송은 대종사 열반 2년 전에 발표되었다. 그때의 정황을 친히 몽당연필로 쓰고 지우개로 지우고 하더니 마침내 게송을 완성하셨다고 그 때의 정황을 제자들은 전한다.
게송은 대종사가 진리접근의 방식과 내용을 숨김없이 드러낸 마지막 작품이라는 점에서 어느 교리보다 간명하고 예리하다.
대종사는 그로부터 2년 후 원기 28년(1943)에 발간된 <불교정전>의 교리도 하단 중앙에 게송을 위치시켰다.
게송의 내용은 3단계로 나눌 수 있다고 전 회에서 말하였다. 1단계인 ‘유무변환’은 온갖 양태가 존재하는 사바세상의 모습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세상이다.
그러나 2단계 ‘일체개공’에서는 모든 존재가 다 사라진다. 시간도 멈추고 심장도 멈추고 인식도 멈춘다. 공한 것마저 공하여 구공(俱空)이 된다. 이는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님이다.
그러나 제3 ‘일체개진’의 단계에서는 다시 맥박이 살아나고 꽃은 피며 흰 구름 유유히 흐르는 실상이 전개가 된다. 다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 되는 것이다. 이 구족(具足)의 세계에서는 유도 무도 살아 숨 쉬고, 너도 있고 나도 있다. 다만 일체가 은혜이며 천만 사물이 부처로 화현해 있을 따름이다.
조주선사가 하루는 <신심명>의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그저 취하거나 버리지만 말라(至道無難 唯嫌揀擇)’는 구절을 인용하여 법문을 하였다. 이 말을 듣던 한 학인이 질문한다. “취하거나 버리지 말라고 하셨지만, 선사께서도 결국은 <신심명> 한 구절을 취한 게 아닙니까?”
이런 질문에 조주는 “나는 모르겠다.”로 조주다운 딴죽을 건다. 변명을 늘어놓았다면 조주가 아니다. 유무에서 구공, 구공에서 구족으로 가기 위한 길에 대하여 묻는 제자에게 대종사도 시치미를 뗀다. ‘구공이다 구족이다 논할 여지가 어디 있으리오.’
이어서 대종사는 준엄하게 말씀하신다. “이 자리가 곧 성품의 진체이니 사량으로 이 자리를 알아내려고 하지 말고 관조로써 이 자리를 깨쳐 얻으라.”
누구나 30분 동안, 혹은 세 시간 동안 열정을 지닐 수 있다. 그러나 성공하는 사람의 공통점은 30년 동안 열정을 변치 않는 데에 있다. ‘관조’의 길을 통해야 도달하게 되는 성리의 길에 30년 동안 변치 않고 열정을 지속할 이 그 누구인가.
★★★★★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