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경(大宗經) 제6 변의품(辨疑品) 1장
<20190817 토요일 법인성사 50일 정진기도 48일차>
대종경(大宗經) 제6 변의품(辨疑品) 1장
대종사
선원 경강(經講) 시간에 출석하사
천지의 밝음이라는 문제로
여러 제자들이 변론함을 들으시다가,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은 천지에 식(識)이 있다고 하는가 없다고 하는가.]
이 공주
사뢰기를
[천지에 분명한 식이 있다고 하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무엇으로 식이 있는 것을 아는가.]
공주
사뢰기를
[사람이 선을 지으면 우연한 가운데 복이 돌아오고 악을 지으면 우연한 가운데 죄가 돌아와서, 그 감응이 조금도 틀리지 않사오니 만일 식이 없다 하오면 어찌 그와 같이 죄복을 구분함이 있사오리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그 구분하는 증거 하나를 들어서 아무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하여 보라.]
공주
사뢰기를
[이것은 평소에 법설을 많이 들은 가운데 꼭 그렇겠다는 신념만 있을 뿐이요, 그 이치를 해부하여 증거로 변론하기는 어렵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현묘한 지경은 알기도 어렵고 가령 안다 할지라도 충분히 증명하여 보이기도 어려우나, 이제 쉬운 말로 증거의 일단을 들어 주리니 그대들은 이것을 미루어 가히 증거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통하여 볼지어다. 무릇, 땅으로 말하면 오직 침묵하여 언어와 동작이 없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다 무정지물로 인증하나 사실에 있어서는 참으로 소소 영령한 증거가 있나니, 농사를 지을 때에 종자를 뿌려 보면 땅은 반드시 그 종자의 생장을 도와 주며, 또한 팥을 심은 자리에는 반드시 팥이 나게 하고, 콩을 심은 자리에는 반드시 콩이 나게 하며, 또는 인공을 많이 들인 자리에는 수확도 많이 나게 하고, 인공을 적게 들인 자리에는 수확도 적게 나게 하며, 인공을 잘못 들인 자리에는 손실도 나게 하여, 조금도 서로 혼란됨이 없이 종자의 성질과 짓는 바를 따라 밝게 구분하여 주지 아니하는가. 이 말을 듣고 혹 말하기를 “그것은 종자가 스스로 생의 요소를 가지고 있고 사람이 공력을 들이므로 나는 것이요, 땅은 오직 바탕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리라.
그러나, 종자가 땅의 감응을 받지 아니하고도 제 스스로 나서 자랄 수가 어디 있으며, 땅의 감응을 받지 아니하는 곳에 심고 거름하는 공력을 들인들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땅에 의지한 일체 만물이 하나도 땅의 감응을 받지 아니하고 나타나는 것이 없나니, 그러므로 땅은 일체 만물을 통하여 간섭하지 않는 바가 없고, 생·멸·성·쇠의 권능을 사용하지 않는 바가 없으며, 땅뿐 아니라 하늘과 땅이 둘이 아니요, 일월 성신과 풍운 우로 상설이 모두 한 기운 한 이치어서 하나도 영험하지 않은 바가 없나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짓는 바 일체 선악은 아무리 은밀한 일이라도 다 속이지 못하며, 또는 그 보응을 항거하지 못하나니 이것이 모두 천지의 식이며 천지의 밝은 위력이니라. 그러나, 천지의 식은 사람의 희·로·애·락과는 같지 않은 식이니 곧 무념 가운데 행하는 식이며 상 없는 가운데 나타나는 식이며 공정하고 원만하여 사사가 없는 식이라, 이 이치를 아는 사람은 천지의 밝음을 두려워하여 어떠한 경계를 당할지라도 감히 양심을 속여 죄를 범하지 못하며, 한 걸음 나아가 천지의 식을 체받은 사람은 무량 청정한 식을 얻어 천지의 위력을 능히 임의로 시행하는 수도 있나니라.]
{대종경} 제6 변의품 1장
만물은 다 보면서 알고 있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을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다. 그 무정한 물(무정물)이 사람의 언어 따라 각기 다르게 반응하는 이미지들을 본 후론 모든 물이 달리 보였다.
어떤이는 밥을 가지고도 어떤 경우엔 검은 곰팡이가 슬었고, 어떤 말에는 하얗게 발효가 됐다는 실험 결과들을 연이어 보여주기도 했다. 무정물이라고 여기는 물이나 밥 같은 것들 조차도 사실은 다 보고 다 알고 있어서 말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는 영험한 존재임을 보여준 실험이었다.
어디 물이나 밥뿐이랴. 그보다 더한 바위나 무쇠나 책상이나 우주안의 모든 것은 다 보고 다 알고 있음을 소태산 대종사는 변의품 1장에서 땅의 영험함을 예로 들어 보여주셨다. 천지는 식(識)이 있다! 온 천지만물이 다 보고 다 알고 있으니 생생히 느끼고 응대하라는 일깨움이다. 일체만물이 다 식이 있어 우리가 하는 일체를 다 보고 다 안다는 말씀이다.
요즘 의문 하나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빠른 속도로 폐허가 진행되는데, 거주하면 허름한 집도 몇백년을 간다는 사실이다. 기둥만 한번 만져줘도 오래간다 하니 사람이 가진 기가 얼마나 불가사의한가 싶을 뿐, 정확한 원인은 모른다. 집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도 다 알고 보고 있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우주안 모든 존재, 허공도 다 보고 다 알고 있으니, 무정물이라고 무엇 하나인들 함부로 대할 수 있을까. 최령한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랴. 어린 자녀 앞에서 부모가 하는 모든 언행들을 신생아들도 다 보고 듣고 알고 말하고 있다. 때문에 우주만물 어느 것을 대하더라도 부처님을 대하는 마음으로 경외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우주만물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자기를 표현하는 언어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인간의 언어체계와는 달라서 귀로 듣지 못할 뿐이다. 물도 밥도 사람이 마음으로 보낸 언어를 다 알아듣고 변화를 달리 일으키지 않던가. 마음의 언어는 일체만물과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화분을 잘 가꾸지 못하는 나는 물을 제때 주지 못해 죽게 만드는 일이 잦다. 다른 집 화초들이 싱그럽게 커가는 것을 보면서 갑자기 우리 화초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간 귀찮은 일거리라 여기고 어쩌다 마지못해 물을 주곤 했으니, 목마르다고, 관심 가져달라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얼마나 했을꼬.
고마워! 미안해! 수고했어! 이런 식으로 다 보고 다 아는 일체만물과 마음과 기운으로 대화하며 살아보면 알게 된다. 동물도 식물도 물건이며 공간도 한 기운으로 연하여 살랑살랑 우쭐거리며 좋아하는 것을. 이럴 때는, 내가 하루 종일 움직이는 모든 육근작용은 귀찮거나 해야만 하는 일거리가 아니라, 천지만물에 대한 신앙이며 불공이 된다. 이때 수행은 저절로 함께 있다.
따로이 신앙처를 찾고 수행할 시간이 없다며 넋두리 하는 것은 얻고자하는 것들과 완벽히 등진 삶이며 불행이며 고통이다.
허공과 일체 무정물과 일체 식물과 일체 동물과 일체 인류를 영험한 식을 가진 부처로 대하며 소통하고 산다면 처처불상 사사불공이 편만한 낙원세상이 어디 다른 곳에 있으랴.
<송도교당 / 장오성 교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