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연편(機緣編) 08장
정산종사법어(鼎山宗師法語)
제2부 법어(法語)
제1 기연편(機緣編) 8장
말씀하시기를 「나는 평생에 기쁜 일 두 가지가 있노니, 첫째는 이 나라에 태어남이요, 둘째는 대종사를 만남이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모든 사람이 스승님의 은혜를 다 같이 느낄 것이나, 나는 특히 친히 찾아 이끌어 주신 한 가지 은혜를 더 입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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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제우지[花海際遇地]
[개요]
소태산대종사와 정산종사가 처음 만난 김해운의 집. 전북 정읍군 북면 화해리에 마동에 있다. 2000년(원기85) 수위단회에서 교단 성적지를 확정하면서 화해제우지도 교단의 23곳 성적지 중 한 곳으로 지정되었다.
[역사]
1917년(원기2) 정산은 스승을 찾기 위해 고향 성주를 떠나 전라도에 도착한 뒤 이름난 사찰과 도인을 찾아다녔다. 모악산 대원사에 잠깐 머물 때 정읍 북면 화해리 김해운의 청을 받아 그 집으로 거처를 옮긴 후 1918년(원기3) 이곳을 찾은 소태산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던 장소이다. 소태산과 정산이 만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있다. 정읍에 사는 김해운이 태을주(太乙呪) 치성차 모악산 대원사에 갔다가 정산을 만나 감복하여 ‘조선에 없는 만국양반’으로 받들며 화해리 마동에 1918년 2월부터 8월까지 7개월간 모시게 된다. 이 무렵에 강일순의 부인 정씨와 무남독녀 강이순(순임)이 마동 우물터 옆집에 살았다.
정산은 이곳에서 태을주 치성을 올릴 때 종종 이적을 보여 “경상도에서 온 송 아무개가 개안(開眼)했다”는 소문이 났다. 초여름 모내기를 앞두고 못자리 피살이가 한창일 무렵에 소태산이 화해리에 와서 정산을 만나 형제 결의를 하고, 두 달 뒤 김광선이 와서 장맛비 속에 정산을 인도해 영광군 길룡리에 갔다. 1986년(원기71)에 화해리 마동 동구 회나무 아래 소태산과 정산이 만난 것을 기념하여 ‘화해제우지비(花海際遇地碑)’를 건립했다. 《불법연구회창건사》에는 소태산과 정산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루는 김성섭(金成燮: 八山金光旋)을 부르시어 말씀하시었다. ‘전북 정읍 땅에 경북 성주에서 온 송모라는 젊은이가 있거든 데리고 오라.’ 팔산이 명을 받들어 찾아가던 즉시로 송도군(宋道君: 鼎山)을 만나 대종사의 말씀을 전했다. 도군 또한 숙연임을 크게 깨달아 말하기를 ‘나 역시 큰 원을 품고 수 백리를 정처 없이 왔으나 항시 마음에 무엇이 걸린 것만 같아 주소로 걱정하던 중 오늘에 불러 주시니 이제 영겁대사를 해결할 날이 왔습니다.’ 하며 멀리 사배를 올리고 즉시로 동행하려 했다. 그러나 그 집 주인(김해운)의 지극한 만류로 일시에 정의를 떼지 못하여 팔산과는 후약을 두고 갈리었다. 팔산이 돌아와 대종사께 그 사유를 고하니 대종사 미리 짐작하신 바 있으신듯 했다. 2, 3개월이 지나매 친히 팔산을 대동하시고 그 곳을 찾아가 일숙하신 후 사제 겸 부자의 의를 맺으시고 말씀하시었다. ‘이 일이 우연한 일이랴. 숙겁 다생에 기약한바 컸었느니라.’ 대종사 정산을 영광으로 데리고 오시어 중앙 위에 오르게 하시고 수기를 주시어 제반 사무를 대행케 하시므로 八위와 일반 대중은 19세의 연소한 분이나 장형같이 숭배하며 받들었다.”
정산은 어려서 수도(修道)에 발심하시어 강호(江湖)와 산곡에 기도도 하고 초당(草堂)에 정좌(靜坐)하여 심공도 쌓으며 스승 찾아 각지에 방황도 하다가 18세 되던 1918년 무오(戊午)에 화해리에서 소태산과 운명적인 만남이 있게 되었고, 이를 기념하여 원불교에서는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진 김해운의 집을 화해제우지라고 부른다. 소태산이 원불교의 창시자라면 정산은 원불교 창립기 여러 가지 제도적 기초를 세운 수립자라고 할 수 있다. 정읍 화해리에서 둘의 만남은 개인의 우연한 만남이 아니라 이 땅에 원불교를 열기 위한 역사적ㆍ운명적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원불교대사전)
김해운[金海運]
법호는 경타원(莖陀圓). 1872년 9월 1일 전북 정읍에서 부친 성화(聖和)와 모친 신씨(申氏)의 딸로 출생했다. 김태형(金泰亨)과 결혼하여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다. 일찍이 증산교를 믿고 있던 중 전주 대원사에서 정산종사를 만나 정읍군 북면 화해리 자기 집으로 가 머물기를 청하여 1918년(원기3) 이른 봄부터 7월까지 정산을 모시게 되었다. 이곳 화해리에서 소태산대종사와 정산이 역사적인 만남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이 땅이 ‘화해제우지(花海際遇地)’로 원불교 성지가 되었다.
김해운은 정산을 ‘만국양반’이라 부르며, 극진히 시봉했다. 세월이 흘러 정산의 인도로 입교, 소태산의 제자가 되었으며 아들인 김도일(金道一)과 더불어 화해교당 창립의 주역이 되었다. 1939년(원기24) 9월 21일 68세를 일기로 열반했다. 손자인 인용과 정용이 전무출신했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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