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해설>① 법신불 일원상
<교리해설>① 법신불 일원상
[1호] 1969년 06월 01일 (일) | 교무부![]() |
이 宇宙에는 한 主人公이 있습니다. 形相과 이름이 없고 말과 말이 끊어져서 萬有밖에 있으되 능히 만유를 살리고 죽이며 萬有와 함께하여 不斷히 움직이되 삼세를 일관하여 변함이 없고 十方을 두루하고 우주만물이 이에 바탕하고 이에 의지하여 한없는 생명과 은혜를 입고 살아나가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모든 성자 철인들이 이 한 진리를 깨치기 위하사, 身命을 온통 바치시었고, 이 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하사 온갖 사랑을 다 하시었으니, 儒家(유가)에서는 이를 일러 太極 혹은 無極이라 하고, 道敎에서는 道 혹은 自然이라 하고, 佛敎에서는 法身佛이라 하여 이름은 각각 다르나 그 原理는 하나인 것입니다.
대종사 대각을 이루시고 말씀하시기를 「萬有가 한 體性이며 萬法이 한 根源이로다. 그 中에 生滅없는 道와 因果報應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서품 1장) 하신바와 같이 대종사님께서는 스스로 깨치신 경지에서 만유와 만법의 근원인 한 진리 한 두렷한 기틀을 말씀과 方便으로 이르지 아니하시고 그 모습 그대로 한 相을 지어 보이셨으니 이 진리가 바로 一圓으로서 「一圓은 法身佛이니 宇宙萬有의 본원이고 제불제성의 心印이요 일체 衆生의 本性이다」(교리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一圓은 萬眞理의 본원이요 萬信仰 統一體로서 진리를 찾는이가 이 밖에 찾을 길이 없고, 법을 찾는 이가 이밖에 믿을 곳이 없으며, 공부를 하는 이가 이밖에 닦을 법이 없는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宇宙萬有의 본원이요 제불제성의 心印인 法身佛 一圓相을 信仰의 對像과 修行의 標本으로 모시고」(교법의 총설)라고 밝히시어 과거와 같이 어떠한 物相이나 名號나 人格 즉 佛像등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시고 一圓의 眞理 자체를 최고종지로 하여 편벽된 수행을 圓滿한 修行으로 一圓化하시었고 편협하고 미신적인 신앙을 원만하고 사실적인 신앙으로 돌려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宇宙에 充滿하여 萬有를 通하여 나타나지 않음이 없는 진리를 표준하여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공부하는 마음과 佛供하는 생활을 놓지 않고 현실 속에서 한없는 慧福을 얻어 나가게 하신 것입니다.
(교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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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만유 (宇宙萬有)
우주 안에 있는 온갖 사물, 곧 우주만유·삼라만상·유정·무정, 동물·식물·광물 등 일체를 다 포함하는 말. 우주만유의 근본은 일원의 진리이고, 성·주·괴·공, 생·로·병·사, 생·주·이·멸로 생성 변화한다.
태극 (太極)
유교에서 우주 만물이 생성 전개되는 본체 또는 근원을 가리키는 말. 하늘과 땅이 아직 나뉘기 이전의 세상 만물의 원시(元始)의 상태. 처음 〈주역〉에서 시작하여 송나라 때에 와서 유교철학으로 대성되었다. 주염계의 〈태극도설〉에서 태극이라는 말이 처음 나온다. 「태극의 본체는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것으로서 무극(無極)이라고도 하고, 이것이 우주 만물을 생성 조화하는 근본이 되므로 태극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주자(朱子)는 태극 이외에 무극이 따로 없다고 하였으며, 소강절(召康節)은 도(道)가 곧 태극이라고 하였다. 태극은 원불교의 입장에서는 일원상의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서 우주만유의 본원이다.
인과보응의 이치 (因果報應―理致)
지은대로 받게되는 우주와 인생의 근본원리. 우주의 근본적 진리의 한 측면. 소태산 대종사는 우주의 진리를 크게 불생불멸의 진리와 인과보응의 이치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인과보응의 이치는 인간과 우주를 움직이는 근본적 진리이다. 이 지구 위에는 수많은 민족과 국가가 있고 수십억의 인류가 살고 있다. 수만종의 직업이 있고 남녀노소의 구별, 성격과 취미의 구별, 사상과 의식구조의 구별, 생활형태의 구별 등 다양한 구별이 있다. 이 모든 다양성과 천차 만별의 구별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우연인가, 필연인가, 운명의 장난인가, 신의 조화인가. 그것은 인간의 심신작용에 따라 그렇게 전개되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게되는 인과보응의 이치에 따라 천차 만별의 구별이 있게되는 것이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 잘 살고 못살게 되는 것은 인과보응의 이치에 따라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게되는 것이다. 인과보응의 이치를 믿고 믿지않는 것은 인간의 삶의 태도(인생관)에 큰 차이를 가져온다. 인과의 이치를 믿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고 스스로 책임진다. 어떠한 고통도 참고 견딜줄 알며 어떠한 역경도 극복할 의지를 갖게 된다. 자신의 불행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지도 않고 남을 원망하지도 않는다. 모든 일에 투쟁적 방법으로 상극 악연을 짓지도 않고, 부당한 방법으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땀 흘려 일하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영원처럼 소중하게 산다. 우주에 사시 순환하는 이치를 따라 인생에 생로병사가 있음을 알아서 죽음을 싫어하거나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인과보응의 이치를 믿지않는 사람은 자신의 불행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고 남을 원망한다. 부당한 방법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며 때로는 투쟁적 방법으로 상극 악연을 지어 더욱 죄고의 구렁텅이로 빠져든다. 불로소득을 취하면서도 진리와 자기의 양심 앞에 참회하고 부끄러워할 줄을 모른다. 인과보응의 이치를 멀리서 찾을 것 없다. 인간의 일상생활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가을이 되면 넓은 들판에 황금 물결이 출렁인다. 어떤 사람이 오곡 백과를 거두어 가는가. 아무나 함부로 거두어 가지 못한다. 땀 흘려 심고 가꾼 사람이 거두어 가는 것이다. 지은대로 받는 것이요 짓지 않으면 받지 못하는 것이다. 해마다 여름철이면 홍수로 생명을 잃고 집을 잃고 논밭을 잃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아무리 홍수가 나도 피해를 입지 않는 곳에서 집을 지어 살거나 농토를 가진 사람은 생명과 재산을 잃지 않는다. 홍수로 인해 큰 피해를 입거나 생명을 잃은 사람이라고 해서 어느 누가 그곳에 살라고 시킨 사람이 없다. 그 사람 스스로가 그렇게 선택한 것이다. 곧 자업 자득인 것이다. 가령 부모가 자식을 여러 명 낳아 길러서 똑 같이 교육시키고, 똑같이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할지라도,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는 잘 사는 자식도 있고 못 사는 자식도 있다. 부모가 차별나게 살으라고 바란 것도 아니고 어느 누가 그렇게 시킨 것도 아니다. 자식들 스스로가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개척해 가고 책임지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달라지는 것이다. 인과보응의 이치에 따라 자업자득의 결과로 그렇게 달라지는 것이다. 이 지구위에 많은 나라가 있다. 살기좋은 나라도 있고 살기 어려운 나라도 있다. 선진국에서 태어나고 후진국에서 태어난 것도 어느 누가 그렇게 시킨 것이 아니다. 그 사람 스스로가 그렇게 선택한 것이다. 이 지구위에 많은 민족이 있다. 백인종·흑인종·황인종·홍인종 등으로 각각 다르게 태어난 것도 어느 누가 시킨것이 아니다. 그 사람 스스로가 그렇게 선택한 것이다. 이 넓은 지구 위에서 한국 땅에서 태어난 것도, 경기도·강원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서 각각 태어난 것도, 김씨·이씨·박씨·최씨·정씨로 구별해서 태어난 것도, 키가 큰 사람 키가 작은 사람으로 태어난 것도 그 사람 스스로의 선택에 따른 것이다. 같은 부모의 자식이면서도 똑같이 생긴 형제는 없다. 각기 다르게 태어난 것도 스스로가 그렇게 지은 결과인 것이다. 이 지구위에 인류가 출현한 이후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오고 있지만 똑 같이 생긴 사람은 하나도 없다. 조금씩이라도 어딘가 서로 다른 것이다. 각자의 선택에 따라 지은 바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인과보응의 이치는 각자의 선택인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과 불행의 책임은 스스로가 져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미룰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은 인과보응의 이치에 따라 스스로의 선택으로 스스로의 인생을 개척해 가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인과보응의 이치는 우주와 인생의 근본진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