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재(Aid Perfection) 2014. 12. 28. 20:53

대종경(大宗經)

13 교단품(敎團品) 35

황 정신행(黃淨信行)이 여쭙기를 [과거 부처님께서는 무념 보시(無念布施)를 하라 하시고 예수께서는 오른 손으로 주는 것을 왼 손도 모르게 하라 하셨사온데, 대종사께서는 사업 등급의 법을 두시어 모든 교도의 성적을 다 기록하게 하시니, 혹 사업하는 사람들의 계교심을 일으키는 원인도 되지 아니하오리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사업을 하는 당인들에 있어서는 마땅히 무념으로 하여야만 무루의 복이 쌓이려니와 공덕을 존숭(尊崇)하고 표창할 처지에서는 또한 분명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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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신행[黃淨信行]

[개요]

본명은 온순(溫順). 법호는 팔타원(八陀圓). 법훈은 종사. 재가교도로 여성 최초의 구인제자인 수위단원 역임. 휘경학원과 사회복지법인 창필재단을 설립했다. 대한민국 사회사업의 대모, 한국 고아의 어머니로 불렸다.

[생애와 활동]

황정신행은 1903710일 황해도 연안에서 부친 원준(元俊)과 모친 송귀중화(宋貴重華)의 장녀로 출생하여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유복하게 성장했다. 13세에 서울로 유학, 이화학당 중등부를 졸업하고, 이어 경성여자보통학교에서 1년간 일본어를 배우던 중 부친의 열반으로 귀향, 31운동을 맞았다. 1921년 중국으로 건너가 길림성 여자사범학교에 들어가 3년 동안 중국어를 공부했고 이어 유치원 교사를 하다가 귀국, 이화여전 보육과를 1927년에 제2회로 졸업했다. 개화기의 신여성인 황정신행은 일본계 정토종 불교재단에서 경영하는 화광교원(和光敎院)에 들어가 관수동에서 화광유치원을 신설하고 교사 일을 맡아 보았다.

27세에 황해도 재령 사람으로 당시 서울 장안의 부호인 강익하(康益夏)와 결혼, 12녀를 두었다. 서울 종각 부근에 순천상회(포목점)를 차리고 동대문 부인병원(현 이화여대 부속병원)을 인수하는 등 부()를 축적했다. 황정신행과 원불교의 인연은 불연지인 금강산에서 비롯되었다. 원만하지 못한 가정 문제와 세속생활의 번뇌를 떨치고자 1935(원기20) 여름 아들 필국(弼國)을 데리고 금강산을 찾아 여행하던 중에 개성교당 교도 이천륜(李天倫)을 만나 불법연구회를 소개받았다. 이어 그의 연원으로 서울교당(당시 돈암동 소재)에 나가 이완철과 이동진화를 만나고 이완철로부터 금강경을 배웠다.

이어 1938(원기23) 35세 되던 해에 서울교당에서 소태산대종사와 역사적인 만남이 이뤄진다. 소태산과의 문답을 통해 30년 동안 들어온 기독교 목사의 말과는 달리 현세에서 무슨 희망이 있는 것 같았고, 부처되는 법까지 가르쳐준다는 말씀이 마음 가운데 크게 부딪혀 옴에 황정신행은 신심을 크게 발하여 제자가 되었다. 영생과 인과의 진리에 대한 믿음과 소태산이 새 부처님이라는 확신을 가진 황정신행은 중앙총부와 서울교당의 유지 발전은 물론 창업기 갖가지 교단 경제난을 극복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소태산은 황정신행이 서울에서 한 번씩 익산 총부에 오면 특별히 대중을 모아 성리 법문을 설하여 그로 하여금 큰 사업과 아울러 속 깊은 공부를 겸하도록 배려했다. 1939(원기24) 기묘동선(己卯冬禪) 때였다. 선원대중이 총부 공회당에 모여 소태산의 법설을 받든 후 송도성의 지도로 일기를 기록하고 있었다. 혜수와 혜시 등 사업성적 관련사항을 세세히 기록하게 함을 보고 황정신행이 심도 있는 질의를 소태산에게 했고 그에 대한 답을 정리한 것이 다음 대종경교단품35장 내용이다.

황정신행이 과거 부처님께서는 무념보시를 하라 하시고 예수께서는 오른 손으로 주는 것을 왼 손도 모르게 하라 했사온데, 대종사께서는 사업등급을 두시어 모든 교도의 성적을 다 기록하게 하시니, 혹 사업하는 사람들의 계교심을 일으키는 원인도 되지 아니하오리까하고 묻자, 소태산은 사업을 하는 당인들에 있어서는 마땅히 무념으로 하여야만 무루의 복이 쌓이려니와 공덕을 존숭하고 표창할 처지에서는 또한 분명하여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답했다. 심히 간고했던 당시 총부 살림에 서울에서 총부로 내려올 적마다 상당한 정재를 가져왔던 황정신행의 입장에서 무념보시의 정신을 대중에게 일깨웠던 점은 교단 만대를 통해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정산종사는 이러한 황정신행에게 1957(원기42) 4월 제1차 법훈증여식전에서 대호법의 원훈(元勳)을 주어 그 빛나는 공덕을 기렸다. 성장하면서 부친이 약자들을 돕는 모습에 영향을 받은 데다 이어 원불교의 타자녀교육의 교리정신에 바탕하여 황정신행은 한국고아들의 대모가 된다. 총부 안에 탁아소를 하게 되자, 소태산의 명을 받아 탁아소장이 되었고, 815광복이 되자, 송도성과 더불어 서울 남대문에서 전재동포구제사업을 전개하는 한편, 서울 한남동의 일본인 사찰인 약초관음사(若草觀音寺)를 인수해 보화원(普和園)’을 설립, 초대 원장이 되었다. 60여명의 고아들을 수용해 설립한 보화원은 원불교 고아원의 효시가 되었다.

19504UN의 사업 분야 지도자 양성을 위한 요원으로 선발되어 사회사업 훈련 및 시찰을 위해 영국을 순방하던 중 한국전쟁을 만난 황정신행은 928수복 이후 귀국, 전쟁 중에 외아들을 잃은 슬픔을 딛고서 이승만 대통령의 부탁을 받아 9백여 전쟁고아를 돌보기 위해 제주도로 향한다. 한국보육원 원장직을 맡아 혼돈과 무질서, 겹치는 흉년으로 이루 형언할 수 없이 어려운 고아원을 꾸려가면서도 원불교의 정신을 원아들에게 심어주어 용기를 잃지 않게 했다. 1956년 미국 유니버설 영화사가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전송가(戰頌歌)란 영화를 제작하면서 황정신행 원장과 한국보육원은 전 세계에 알려졌다.

그는 어린이는 가정이나 국가라는 지역적인 한계를 초월한 우주적인 존재이다. 국가나 지역을 떠난 우주적인 안목으로 한 생명을 바라보고 인류애를 발휘해야 한다고 호소, 외국인들로부터 많은 협조를 받았다.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을 만나면서 황정신행은 동원도리동기연계동척사업의 삼동윤리(三同倫理)를 더욱 새롭게 체험했다. 제주도에서 7년여를 지낸 한국보육원은 그 후 서울 이문동 천막촌과 휘경학원 자리를 거쳐 현재 양주 진달래동산에 위치하고 있다. 황정신행은 1982(원기67)에 사회복지법인 창필재단(昌弼財團)’을 설립, 한국보육원을 이에 귀속시켜 원불교 교단에 희사했다.

새싹회에서 1984년 그에게 수여한 제28회 소파상은 한국고아의 어머니로서 일생을 오롯이 헌신해온 거룩한 삶에 한 증표가 되었다. 또한 황정신행은 1970년에 학교법인 휘경학원(徽慶學園)’을 설립, 산하에 휘경여중고등학교를 설립하고 건학이념에 원불교 정신을 담아 여성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1992년에 황온순, 천성(天聲)을 받들어 구십년이라는 문집이 발행되었다. 원불교 교단사업에 많은 정재를 희사하여 원불교의 수달장자라는 별호를 얻었다. 2004629일 열반했다.(원불교대사전)

★★★★★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