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품(敎團品) 11장
대종경(大宗經)
제13 교단품(敎團品) 11장
대종사 서울 교당에서 이 완철(李完喆)에게 짐을 지고 역(驛)까지 가자 하시거늘, 완철이 사뢰기를 [제가 지금 교당 수축 관계로 십여 명의 인부를 부리고 있을 뿐더러 교무(敎務)의 위신상으로도 난처하나이다.]하니, 대종사 그 짐을 오 창건에게 지우시고 다녀오신 후 말씀하시기를 [완철은 아까 처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완철이 사뢰기를 [크게 잘못한 일은 아닌가 하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의 이유에도 일리는 있으나 짐 하나 지기를 부끄러이 여겨 스승의 명을 어기고도 그 일을 크게 생각하지 아니한다면 이것이 어찌 전무출신의 본분이라 할 것이며, 또한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어찌 만생을 널리 건지는 큰 일꾼 되기를 기약하리요.]하시고 [그러한 정신을 놓지 못하겠거든 차라리 사가로 돌아가라.]하시며 엄중히 경책하시는지라, 완철이 잘못을 사죄하고 그 후로는 위신을 생각하여 허식하는 일이 없는 공부를 계속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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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철[李完喆]
[주요약력]
본명은 형중(亨中). 법호는 응산(應山). 법훈은 종사. 서울ㆍ영산교당 교무, 중앙총부 교감, 교정원장, 감찰원장, 수위단원을 역임했다.
[생애와 활동]
이완철은 1897년 4월 28일 전남 영광군 묘량면 신천리 신흥마을에서 부친 경현(景玄)과 모친 김남일화(金南日華)의 5남 2녀 중 3남으로 출생했다. 이완철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자상하고 인자해서 효도와 우애가 극진했다. 일찍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여 경서(經書)를 읽고 탐구하는 시간이 많았다. 9세시에 한문사숙에서 8년 동안 수학했으며 총명이 출중하여 칭송을 받았다. 친형인 이동안(李東安)의 인도로 1921년(원기6) 4월(원기8년 또는 원기9년이라는 설도 있음)에 영산에서 소태산대종사를 뵈었는데, 마치 공자님을 뵈온 듯 정신이 황홀했다고 한다.
깊은 감명을 받아 소태산에게 귀의하여 제자되기를 발원했다. 가정이 어렵고 복잡했으나 1930년(원기15) 4월 전무출신을 서원하여 총부 농업부에서 농사일을 시작했다. 1932년(원기17)에는 학원교무로 봉직하여 후진들의 한문지도를 맡았으며, 1933년(원기18)부터 서울교당 교무로 12년간 재직했다.
“대종사 서울 교당에서 이완철에게 짐을 지고 역(驛)까지 가자 하시거늘, 완철이 사뢰기를 ‘제가 지금 교당 수축 관계로 십여 명의 인부를 부리고 있을 뿐더러 교무(敎務)의 위신상으로도 난처하나이다’ 하니, 대종사 그 짐을 오창건에게 지우시고 다녀오신 후 말씀하시기를 ‘완철은 아까 처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완철이 사뢰기를 ‘크게 잘못한 일은 아닌가 하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의 이유에도 일리는 있으나 짐 하나 지기를 부끄러이 여겨 스승의 명을 어기고도 그 일을 크게 생각하지 아니한다면 이것이 어찌 전무출신의 본분이라 할 것이며, 또한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어찌 만생(萬生)을 널리 건지는 큰 일꾼 되기를 기약하리요’ 하시고 ‘그러한 정신을 놓지 못하겠거든 차라리 사가로 돌아가라’ 하시며 엄중히 경책하시는지라, 완철이 잘못을 사죄하고 그 후로는 위신을 생각하여 허식하는 일이 없는 공부를 계속하니라”(《대종경》 교단품11).
이완철은 깊이 깨달은 바 있어 이후로 위신을 생각하여 허식하는 일이 없는 공부를 계속하여 후일 허식 없는 진솔한 도인(道人)으로 칭송받았다. 소태산의 열반 후 이완철은 교단의 원로로서 정산종사와 대산종사를 알뜰히 보필했다. 광복이 되던 해인 1945년(원기30)에는 영산지부장으로, 1948년(원기33)에는 총부교감으로 봉직하며 ‘유일학림’에서 후진들을 지도했고 속 깊은 공부에 정진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산을 보필하여 총부를 사수했으며, 1958년(원기43)에는 교정원장의 중책을 맡아 3년간 봉직했고, 1962년(원기47)에는 감찰원장으로 4년간 봉직했다.
이완철은 총부에 거주하면서 누구와도 무간한 할아버지였다. 이곳저곳 찾아가 ‘어떻게 사는가’하고 일일이 살피며 세세곡절 진정을 통해 주었다. 조석으로 원불교학과 기숙사를 들려 방문을 열어보고 ‘밥은 먹었느냐?’, ‘방은 따뜻하냐?’며 일일이 챙기는 등, 이완철은 교단의 자상하고 인자한 어버이였으며, 그가 있는 총부는 언제나 평온하고 따뜻한 가족의 분위기였다. 교화일선에서 애쓰다 총부를 찾아오는 후진들은 으레 이완철을 찾아 무슨 일이든 다 털어놓고 하소연했고, 나올 때면 환한 얼굴에 안심과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이완철은 또한 스스로도 배우려는 자세를 놓은 적이 없었지만 가르치려는 성의도 대단했다. 특히 젊은 후진들을 보면 ‘젊은이는 실력 양성이 제일이다’ 하며 일에 쫓겨 공부할 여가가 없는 아래 사람들을 측은히 여겼다. 이완철은 동지들에 대한 애정도 각별했는데, 교단일로 근심하다 찾아와 흉금을 털어놓으면 ‘공심 있는 동지들을 보면 청심환 먹은 것같이 속이 시원하다’며 흡족해 했다. 이완철은 어렵고 딱한 처지에 놓인 동지일수록 알뜰한 손길로 보살폈고, 용기를 북돋아 생기를 돋게 했다.
교정원장 재직 시 어려운 교당과 건강이 좋지 않은 교무에게 편지하기를 잊지 않았고 몸이 아픈 교무에게는 보화당에 부탁하여 약을 지어 보내기도 했다. 동지의 고락이 자신의 고락이었고 교도들의 근심과 즐거움이 또한 자신의 근심과 즐거움이었다. 이완철은 대중의 정신을 열어주고 동지들간에 윤기를 북돋우기에 힘썼다. 사이가 좋지 않은 동지들을 볼 때 열변을 토하여 그들의 정의를 통하게 했고 그들의 고충과 사정을 세세곡절 다 들어주었다. 후진들이 공부심이 풀어질까봐 만날 때마다 어떻게 공부하느냐 물었고 후진들의 청함에 응하여 예회 때 설교단상에 오르기를 마다한 적이 없었다.
설법할 때는 항상 서두에 ‘그러면’ 하고 시작했고 중간에 ‘또로 말하면’ 하고 설법을 이어나갔다. 언체(言體)는 분명치 않으나 귀담아 들으면 그 소박하고 깊은 진리는 늘 실생활에 부합되는 내용이라 적어 놓고 보면 명설법이었다. 이완철은 출가생활 36년에 옷 입는 것도 교단을 위해서 입었고, 식사를 하는 것도 교단을 위해서 했으며 일거일동이 교단을 위하는 전일한 마음으로 그 정성이 하늘에 사무쳤으니, 그의 피 한 방울, 살 한 점은 바로 교단을 위한 제물이었다. 이완철은 평소에 지병이 있었는데, 1965년(원기50, 69세) 건강이 눈에 띄게 악화되어 있었다.
추계 교무 강습 중 예횟날이었다. 이 날도 몸이 불편한 중에도 흔연히 대각전 설법단상에 올랐다. ‘법은 물과 같다. 물 쓰듯이 활용하라’는 요지의 일장 설법이었다. 이후 병세는 더욱 침중해져, 3일 후인 1965년(원기50) 10월 6일 새벽 5시에 조용히 자는 듯 열반했다. 슬하의 태연ㆍ정은ㆍ정인과 손자인 건직, 그리고 외손자인 조영진ㆍ효경ㆍ대성이 전무출신했다. 1965년(원기50) 10월 수위단회에서는 이완철의 공덕을 기리며 대봉도의 법훈을 추서했고, 1977년(원기62) 10월 제71회 수위단회에서는 법위를 정식 출가위로 추존하고 종사의 법훈을 추서키로 결의했다.(원불교대사전)
오창건[吳昌建]
본명은 재겸(在謙). 법호는 사산(四山). 법훈은 대봉도. 소태산대종사의 구인제자 가운데 한 사람. 교단 창업기 공심의 표준적 인물. 1887년 10월 17일 전남 영광군 백수면에서 부친 윤안(允安)과 모친 김중풍(金中風)의 3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소태산이 대각 후 시행한 저축조합, 방언공사, 법인기도에 동참했으며, 소태산이 부안 변산에서 법을 제정할 때 전문으로 시봉했다. 키가 크고 기력이 장했으며, 모습이 소태산을 닮아 ‘작은 대종사’로 불렸다.
소태산을 항상 가까이서 시봉했기 때문에 교중사(敎中事) 감역하는 처사법을 배워 교중사 감역에 능했는데, 특히 지방 교당 건축 감역을 많이 했다. 서울교당ㆍ당리교당ㆍ신흥교당ㆍ초량교당의 건축과 영산원 대각전, 개성교당 보수 등 총지부를 막론하고 도처에 교당 건축의 창성한 공덕을 쌓았다. 오창건은 기개 또한 장대하여 의롭지 못한 일이나 스승에 대한 무례함을 접하면 참지 못하는 불같은 성미도 지녔다.
일제 치하에 있을 때 일경(日警)이 소태산의 함자를 함부로 부르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그를 꾸짖어 보낸 사실이 《대종경》 실시품 9장에 나온다. 오창건은 영산 서무부장, 총부 서무부장 등을 오래 맡아 초창기 어려운 교단 살림을 알뜰히 보살폈고, 전주와 원평교당 교무로 일선교화에도 참여했다. 또한 총부 예감, 감찰원장 등을 지냈다. 1953년(원기38) 1월 23일 세수 66세를 일기로 열반했다.(원불교대사전)
★★★★★★★★★★
[빈 마음의 행복]
<정원아 교무/유린교당>
빈 마음으로
스승의 명 받들고
허식없는 진인으로
영원한 행복 누리자
이 장은 대종사께서 이완철(당시 경성교당 교무)에게 짐을 지고 서울역까지 가자고 하시니 교무 위신상 못 가겠다고 하므로 오창건과 다녀오신 후에 “위신을 생각하는 허식을 버려야 진솔한 인격을 이룰 수 있고, 스승의 명을 어기고는 만생령(萬生靈)을 제도하는 일꾼이 될 수 없다.”고 엄중히 경책하신 법문이다.
이 법문을 통해 배울 바는 스승의 명을 어기지 말자, 위신을 생각하는 허식을 버리자, 원 없는 일을 억지로 권하지 말고 후에 깨우쳐 주자, 스승님께 잘못을 사죄하고 정진하여 서원을 이루자는 것으로 빈 마음이라야 실천할 수 있고 빈 마음이라야 행복을 가득 담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지면상 다음 두 가지만 살펴보자.
첫째는 빈 마음으로 스승의 명을 받들어서 만생령과 더불어 행복하자는 것이다.
대종사께서 “스승의 명을 어기고 어찌 만생령을 건지는 큰 일꾼 되리요. 고치지 못하겠거든 차라리 사가로 돌아가라”고 크게 걱정 하셨다.
왜 사가로 돌아가라고까지 하시며 스승의 명을 중히 여기셨을까. 스승의 명은 곧, 진리와 법과 교단의 공명(公命)으로써 교법을 실천하는 길이므로 성불제중의 큰 원을 이룰 수 있으며, 명을 어기고 사사로이 일을 하면 도가의 명맥을 끊는 죄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종사께서 “정산은 나의 명을 한번도 거역한 일이 없었다.”는 정산종사의 만고신의(萬古信義)를 본받아서 각자 근무처에서 가까이 모시고 있는 스승님부터 천심으로 믿고 받들며, 혹여 스승의 명이 대의에 어긋난다고 생각되더라도 자기고집과 분별 주착심이 없는 순일한 빈 마음으로 여쭙고 받들어서 제생의세의 큰 일꾼이 되자는 것이다.
둘째는 허식이 없는 진인으로 영원히 행복한 자유를 얻자는 것이다. 왜 허식이 나오는가? “내가 교무인데, 사장인데, 남편인데 그런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어, 시어머니에게 밥하게 하다니, 큰 며느리 대접도 안 해주면서, 박사 체면상 허드레 일은 못하겠어” 하는 위신과 체면과 명리(名利)에 묶인 사상(四相)의 거짓 나에 주착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허식은 불만과 원망을 낳고 계교사량으로 늘 괴롭고 불행하며 인연을 잃고 결국 죄악에 빠진다.
따라서 허식을 없애려면 참 마음을 기르는 데 마장이 되는 오욕과 삼독심과 상대심을 놓고, 정신수양으로 본래의 참 나를 찾아 참 자유를 얻고, 사사(私邪)가 없는 진인(眞人)이 되도록 대정진 대적공을 해야 한다.
★★★★★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