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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경(大宗經)/제2 교의품(敎義品)

제2 교의품(敎義品) 11장

대종경(大宗經)

2 교의품(敎義品) 11

또 여쭙기를 [일원상과 서가모니 불과의 관계는 어떠하오니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일원은 곧 모든 진리의 근원이요, 서가모니 불은 이 진리를 깨치사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스승님이시니, 비록 이 세상에 아무리 좋은 진리가 있다 할지라도 그를 발견하여 가르쳐 주시는 분이 없다면 그 진리가 우리에게 활용되지 못할 것이요, 비록 서가모니 불이 이 세상에 나오셨다 할지라도 이 세상에 일원상의 진리가 없었다면 서가모니 불이 되실 수도 없고, 또는 사십 구년 동안 설법하실 자료도 없었을지라, 그러므로 우리는 법신불 일원상을 진리의 상징으로 하고 서가모니 불을 본사로 하여 법신 여래(法身如來)와 색신 여래(色身如來)를 같이 숭배하노라. 그러나, 이것은 일원상과 서가모니 불을 구별하여 보는 자리에서 하는 말이요 만일 구별 없는 진리 자리에서 본다면 일원상과 서가모니 불이 둘이 아님을 또한 알아야 하리라.]

여래[如來]

석가모니의 십호(十號) 가운데 하나. 원불교 대각여래위의 준말. 석가모니의 공덕상(功德相)을 일컫는 십호는 여래(如來)응공(應供)정편지(正遍知)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사(無上師)조어장부(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세존(佛世尊)이다. 여래는 싼스끄리뜨 타타가타(tathāgata)’를 의역(意譯)한 것으로서 음역(音譯)하여 다타아가타(多陀阿伽陀)다타아가도(多陀阿伽度)달타벽다(怛他蘗多)라고도 한다.

이 말뜻에 대하여는 두 단어(單語)를 나누는 것이 좋다. 첫 말을 타타(tatha) 또는 타타-(tathā), 둘째 말을 가타(gata) 또는 아가타(āgata)라고 하는 차이가 있다. 타타(tatha)는 진실진리란 뜻, 타타-(thatā)는 같이, 곧 여시(如是) 또는 여실(如實)의 뜻, 가타(gata)는 가다()의 뜻, 아가타(āgata)는 도달오다(來格)의 뜻이다. 그러므로 thatā+gata라 하면 지금까지 부처님과 같이 저들과 같은 길을 걸어서 열반의 피안에(彼岸)에 간 사람이란 뜻, 곧 선서(善逝) 도피안(到彼岸) 등과 같은 뜻, thata+āgata라 하면 진리에 도달한 사람이란 뜻, thatā+āgata라 하면 지금까지의 제불과 같이 저들과 같은 길을 걸어서 동일한 이상경(理想境)에 도달한 사람이란 뜻, 또 이밖에도 아가타(āgata)를 오다(來格)의 뜻이라 하면 여래라는 것은 부처님과 같은 길을 걸어서 이 세상에 내현(來現)한 사람, 또는 여실한 진리에 수순하여 이 세상에 와서 진리를 보여주는 사람이라는 뜻, 한역(漢譯)에서는 이 뜻에 의하여 여래를 해석하되 여()로서 내생(來生)한 사람이라고 한 것이다”(운허용하, 불교사전).

원불교에서는 여래를 대각여래위의 약칭으로 주로 쓰고 있다. 소태산대종사는 대각여래위의 부처님을 동하여도 분별에 착이 없고 정하여도 분별이 절도에 맞는 사람의 위니라”(정전법위등급)라 했고, 대산종사는 여래는 오는 것 같을 뿐 흔적이 없다는 뜻이다. 오되 오지 않고 가되 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근(六根)이 육진(六塵)가운데 출입하되 물들고 섞이지 않는 것이다.

오고 감에 얽매이지 않고 오고 감에 흔적이 없어서 오게 되면 가는 것이 여래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하라했고, 유가(儒家)에서는 화이불류(和而不流)’라 하여 만유에 화하되 흐르지 않는다 했고, 선가(仙家)에서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 하여 화한 빛이 티끌에 함께 한다 했으니, 구슬이 진흙에 묻혀도 썩지 않고 그 빛을 잃지 않는 것과 같다”(대산종법사법문집3)고 했다.(원불교대사전)

법신여래[法身如來]

법신불을 달리 부르는 말. 대산종사는 법신여래와 색신여래라는 개념을 대비하여 사용하고 있다. “유교에서는 무극(無極)으로 중()이요 원()이다. 중은 과하지도 미급하지도 않은 자리이며, 불교의 원은 태허와 같아서 모자람도 남음도 없는(圓同太虛 無欠無餘) 자리이다. 또 기독교의 하나님인데, 이 자리는 우주 전체가 만법귀일(萬法歸一)의 열 님이 합한 자리로, 하나님이 곧 열 님이요, 열 님이 곧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신불사은(法身佛四恩) 전체가 원불님이요, 일원불(一圓佛)이시다”(대산종법사법문집3)라고 하여 법신불의 개념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법사님의 색신여래(色身如來)는 가시었으나 법신여래는 대중의 가슴에 영원히 자비 불보살의 혼()과 성자(聖者)의 탑()을 세워주실 것입니다”(대산종법사법문집4)라고 하여 진리를 깨친 분의 마음을 법신여래라 하고, 그분의 몸을 색신여래라 한다.(원불교대사전)

색신여래[色身如來]

(1) 부처님의 몸. 부처님의 마음을 법신여래, 부처님의 몸을 색신여래라 한다.

(2) 모든 사람들의 육신, 시방삼세를 통해서 본다면 사람은 누구나 언제인가는 부처가 될 수 있으므로 사람의 육신은 곧 색신여래이다. 또한 공즉시색(空卽是色)이므로 사람의 육신 그대로가 색신여래이다. 원불교에서는 색신여래에 긍정의 의미를 많이 부여하고 있다. 우리가 공부와 사업을 잘하기로 하려면 만사만리의 근본인 이 몸, 곧 색신여래를 잘 관리해야 한다. 색신이 죽으면 법신도 볼 수 없으므로 색신여래 관리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 법신여래와 색신여래 관리를 다 같이 잘하려면 마음에 타는 불을 끄고 진리의 눈을 뜨고 생활할 때 과욕을 부리지 말고 중심(中心)중도(中道)중화(中和)를 잘해야 한다.(원불교대사전)

[일원상과 서가모니불의 관계]

모경희 교무

한 사람이 방문을 하여 불단에 일원상이 모셔져 있음을 보고 여러 가지 의문이 생겼던듯하다. 대종사께 여쭙고 답변해주신 말씀이 9장에서부터 이곳 11장에까지 이어진다.

오랫동안 부처님의 형상을 모셔옴에 익숙하였던 터라 방문객은 우리 회상에서 일원상을 모심에 대한 이해가 쉽지 않았던가 보다. 어느 분을 본사로 모시는지, 왜 법신불 일원상을 모시는지에 대한 사실적이고 진리적인 설명을 듣고서도 또다시 일원상과 서가모니 부처님과의 관계를 여쭈었다.

일원은 진리요, 서가모니불은 그 진리를 깨치시고 어리석은 우리 중생들에게 가르쳐 주신 스승님이시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시기 전에도 우주는 끊임없이 생성변화 하여 왔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으며 혹은 잘살고 혹은 못사는 온갖 나타난 현상은 우리도 알 수 있으나, 왜 그런 차별이 생기는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 잘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그 원리와 근원을 알지 못하였다.

이에 부처님께서 온갖 고행 끝에 우주의 이법을 깨달으시고 나타난 현상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법신불의 세계까지 드러내 주시니, 부처님이 아니셨으면 우리 어리석은 중생들이 만물의 근원이 하나임을 어찌 알 것이며 생과 사의 원리를 어찌 알 것이며 죄복의 근원을 어찌 알 것인가.

이는 마치 약초 속에 우리의 건강을 회복할 좋은 약효 성분이 있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여 활용하지 못하면 한낱 잡초에 불과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대산종사께서는 이 천지에 성인이 안계시면 천지는 공각에 불과하다고 하셨다. 빈 집에 들어가면 허전한 것과 같이 천지도 성인이 안 계실 때는 빈집과 같다고 하셨다.

그러나 아무리 부처님께서 뛰어난 지혜를 가지셨다 할지라도 이 우주에 진리가 없었다면 부처님이 되실 수도 없고 49년간 설법하실 자료도 없었을 것이다. 즉 아무리 약초에 대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이 세상에 약효가 있는 식물이 없다면 약초 전문인이 될 수 없고 그 능력을 발휘할 수도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우주의 진리와 그 진리를 발견하여 가르쳐 주신 스승님은 서로 떠날 수 없는 관계이다.

그러므로 대종사님께서는 진리의 상징으로서 법신불 일원상을 밝히시고 서가모니 부처님을 본사로 드러내시어 법신여래와 색신여래를 함께 숭배하게 하셨다.

그러나 기실 색신이 법신을 떠나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법신 또한 색신을 떠난 존재가 아니다. 분별없는 자리에서 보면 둘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